은유, 내적언어, 이해, 비판적 수사학 [131126]

Critique 2014. 3. 18. 13:03

*2013년 11월 26일 페이스북.


우리는 언어를, 특히 사물과 행위를 가리키고 묘사하는 언어를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내적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번역하고 또 재해석한다. 나는 링크된 글에서 언급된 '은유'를 그런 내적 언어가 작동하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한다. 우리의 행위를 우리 자신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행위들을 표현하는 언어를 가져야하고, 은유는 이러한 언어들이 성립하는 가장 일반적인 기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누군가는 눈을 치우는 일을 일종의 공부나 수양처럼 스스로에게 묘사해 부여할 것이며, 글쓰기를 야금야금 빈 공간을 줄여가는 채움의 과정으로 묘사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은유는 결코 단순한 fiction이 아니다. 그 어느 집단보다 표면적이고 실증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군대나 기업과 같은 집단이 성취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슬로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슬로건들이 집단구성원들의 자기-행위-이해를 재구성하는 목표를 가진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자기이해를 위한 언어로서의 은유의 힘은 사색하는 이들의 편견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직까지 한국의 교육기관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채색하는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은유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은유를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재구성하고 때로는 (비판적 시각으로)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르치는 장소로서 수사학과의 필요성은 분명해 보인다. 진실로 구체적인 것, 혹은 진실로 추상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대다수의 경우 사람들은 곧바로 다가오는 선명한/단순화된 도식들을 선호하거나 그것들을 통해 개념을 자기 식대로 번역-이해한다. 우리가 타자들과 함께하는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하나의 윤리적인 목표로 여전히 간주한다면, 그러한 개념화과정, 자기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보다 섬세한 지점까지, 아도르노 식으로 말한다면 "대상에 개념의 폭력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과정으로서의 수사학, 언어를 가르치는 길은 사유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언어를 섬세하게 기르는 일은 낯설고 다른 것을 섬세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과 동일한 과정 안에서 행해진다.

주어진 지식의 축적을 통해서 세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기만이다. 주어진 지식을 오역하지 않고,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내적 언어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실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학문은 지식의 외적인 축적으로서 행해졌다. 나는 외적인 축적물로서의 지식을 변용시키는 번역과정을, 즉 사유의 과정, 대상을 우리 자신의 언어로 ("사적 언어는 없다"는 진술은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다; 사적 언어는 편재하며 우리는 사회적 언어는 커녕 바로 옆 사람의 언어에도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다; 사회적 언어는 사적 언어의 모태가 되지만 결코 두 언어는 등치될 수 없다) 옮기는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을 요구한다. 언어 습득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언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함을, 우리는 각자의 언어습득과정에서 이미 주어진 표현들에 자신의 의미와 색채를 부여한다는 결론을 내게 해준다. 의미와 색채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것은 세상의 다채로움에 다가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독백적인 언어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확장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

언어를, 언어 사용 패턴을, 언어 이해패턴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수사학rhetoric. 언어를, 은유를 주어진 그대로 흡수하는 대신 진리를 말한다고 자임하는 은유의 겉껍질을 깨트리는 방법으로서의 비판적 수사학. 우리가 한편으로는 주어진 언어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어진 언어를 번역하고 이해하는 내적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게 사실이라면, 바로 그러한 언어의 메타레벨에 서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새로운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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