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벤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이영석. <지식인과 사회>.

Reading 2014. 4. 13. 05:04

푸코 세미나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딱 절반까지 했다. 오늘은 나치즘과 시민사회의 세 가지 형식(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각각 대중선거, 시장자본, '문화'로 실현되는-)의 타락에 관해서 부연설명을 하느라--이렇게만 쓰면 엄청 거창하지만 결국에는 역사와 사회이론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을 한 거다--시간이 좀 걸렸다. 정확히 원래 계획보다 한 주가 늦었는데, 4월 안쪽에 이 책을 마치려고 한다. 푸코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25년의 시차를 뛰어넘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그가 여기서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담론을 분석하면서 드러내는 면모는 내가 지금까지 한국의 그 어떤 신자유주의 비판에서도 보지 못한 이론적 핵심을 찌르고 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텍스트를 읽는 것은 (특히나 지난 16년간 한국에서 행해졌던 갖가지 권력의 작동을 부분적으로나마 기억한다면) 가슴을 뒤흔드는 일이다.


어제 오늘에 걸쳐서 폴 벤느Paul Veyne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_Comment on ecrit l'histoire_, 직역하면 역사서술론 정도 되겠다) 국역본, 역사학자 이영석의 <지식인과 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_Che cos'e un dispositivo_를 읽었다. 아감벤의 <사물의 표시>는 첫 번째 에세이, '패러다임'만 읽었고 '표시론'과 '철학적 고고학'에 관한 글은 일단 다음에. 내일부터는 엘리엇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_The Mill on the Floss_를 읽어야 한다. 원래 슈미트의 _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_(한국에 번역된 슈미트 책 중에 읽어보지 못한 몇 권 중 하나다...학교 도서관에 국역본이 없어서;;), 표기를 보면 알겠지만 영역본을 읽으려다가 역자서문만 읽고 본문은 손을 대지 않았다. Filmer의 _Patriarcha_와 함께 홉스 세미나 중에 읽으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는다.


벤느가 국가박사학위논문(1973)이랑 이 책(1971, 부록으로 붙은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는 78년에 추가되었다)만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에 들어갔다는 것이--물론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레이몽 아롱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꽤나 놀라웠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에게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느의 텍스트는 소수만 번역출간되었을 뿐이며 현재는 거의 절판/품절이다... 본래는 푸코와 관련된 저술을 찾다가 이 책을 집었으나, 도서관에서 빌린 김에 조금씩 읽다가 (다소 급하게, 충분히 음미하지는 못하고) 끝까지 다 보았다. 벤느는 여기에서 일종의 인식론적인 질문들에 기초하여 다른 학문들, 예컨대 자연과학과 (일반)사회학과 대조시키면서 역사학의 성격을 규정한다. 책의 세 부분이 각각 "역사학의 대상" "이해" "역사학의 진보"라는 타이틀을 띠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쉽게 말해 벤느는 일종의 역사론, 역사학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그는 추상적인 개념을 전제하며 스스로를 과학으로 규정하는 맑스주의를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며, 당시 프랑스 사학계의 지배적인 입장으로 군림하기 시작하던 아날학파와도 다소간의 거리를 둔다. 그는 역사가 (과학적 "설명"의 대립쌍으로서) '이해' 또는 "이해가능한 줄거리"라고 주장하며 '이론'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설명이란 '줄거리의 전개를 보여주기,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기'를 의미한다. 그것이 역사적 설명이다. 이것은 매우 세속적이며,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 '이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겠다"(153). 아마 이 텍스트에서 일관되게 주장되는 바가 있다면 바로 이 역사를 이해로 정의하는 태도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론에의 거부, 다른 한편으로는 '줄거리' '이야기'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나는 벤느의 입장이 '한계'와 '필연적 가상'을 이야기하는 칸트의 그것을 꽤나 닮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어쨌든 역사적 인과성을 강조하는 갖가지 이론을 파괴하기 위하여 포퍼는 물론이고 하이에크나 미제스 같은 (좌파들이 쉽사리 인용하리라고 상상키 힘든) 이들까지 자유롭게 인용해서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순진한 실증주의로 빠지지는 않기 때문에--애초에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역사가의 진술가능한 폭은 엄청나게 쪼그라든다--, 벤느는 "역사학이 과학이라는 것을 부정"(262)하고 이야기로서의 역사라는 중심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키는 대신 다양한 지적 전통들과 비판적인 대화를 반복하는 길을 택한다. 다시 말해 (나처럼 대충 읽은 독자에게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벤느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무엇이 아닌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스타일적으로 일견 다소 산만해뵈는, 에세이적인 느낌을 강하게 피우지만 그 대상이 꽤나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주제들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스타일에 휩쓸리지 않고 부분부분에 필요한 숙고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장 "줄거리를 이해하기", 8장 "인과성과 소급추정", (파슨스와 베버를 다루면서 일반사회학의 불가능성을 고찰하는) 12장 "역사학, 사회학, 완전한 역사학"의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부록으로 딸린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도 겉으로 보기보다 만만한 글이 아니다. 조금 촌스러운 비유지만, 술에 취한듯 갈지자로 걷지만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되는 취권의 달인 같은 느낌이랄까. 여튼 대략적인 입장을 정리하는 것보다 천천히, 부분적인 진술을 주의깊게 읽는 쪽이 훨씬 생산적일 책이다. 나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이영석의 책은 기본적으로 2차문헌들에 대한 연구를 사회사라는 형식에 맞추어 정리하고 집약한 책이다. 대략의 역사적 배경, 주요 주제들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좋지만, 흔히 사회사들이 빠지기 쉬운 길목, 즉 결정적인 '한 방'이 결여되어 있고--저자의 독자적인 테제가 없고--딱히 통찰력 있는 진술도 없으며 (그가 맨 처음에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피터 게이의 고전적인 연구 같은 텍스트에서는 볼 수 있는) 커다란 뼈대가 없다는 약점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가장 나쁜 말로 표현한다면 잡화상, 혹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 인상들을 모아놓은 자료집 같다. 물론 한국에 사실상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관한 문헌들 자체가 빈곤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컨대 가장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경우에도 처참할 정도로 연구가 빈곤하다...<도덕감정론>에 관한 평균적인 입문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박세일의 역자 해제를 읽느니 차라리 혼자 꼼꼼히 스미스가 전개하는 논리와 개념들을 정리하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된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상대적인' 가치가 적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하지만 말이다.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 특히 <시민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_An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_는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에서 시민사회에 관한 최초의 이론적 정식화를 시도한 책으로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 책을 소개하는 매우 드문 국내문헌에 속한다. 몇몇 부분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1차 텍스트를 직접 다루면서 간략한 주제를 정리하긴 하나 딱히 통찰력 있는 독해는 아니고 개설서적인 키워드 정리에 가깝다. 18-19세기 영국사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특히 주요한 2차 문헌들에 대한 선별된 목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갖고 있으면 좋겠지만, 2만원짜리 참고문헌목록이 적절하 가격인지는 모르겠다. 해당 부분을 조금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는 입장에서는 한번 읽고 대략 정리했으면 굳이 두고두고 읽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당대 텍스트를 안 읽어도 되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허겁지겁이라도 한번씩은 읽어본 입장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가 그다지 핵심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뒷부분의 논문들, 특히 오리엔탈리즘이나 근대성에 관한 논문은 빈약해서 당황스럽다.

* 4/13 추가: 이영석이 스미스나 흄을 소개할 때 쓰는 '감정'이란 단어가 무엇의 역어인지 모르겠다. 로크 이후로 영국의 인간학에서 사용되는 감정/감각/감성 등은 오늘날 우리의 용법과는 조금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번역도 신경쓸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common sense는 '상식'이기도 하지만 '공통감각'이기도 하다. 스미스의 TMS(<도덕감정론>)의 경우도 moral sentiment 가 단순히 도덕적인 마음가짐이나 기분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 공감 및 어떤 종류의 당위에 대한 감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지식인과 사회>에서는 예컨대 흄을 이성이 아닌 감성/감정에 중점을 둔 사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는데, 아직 내가 흄을 읽어본 게 몇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성과 대비되는 식의 감정이라고 쓰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이해해 버리면 흄과 로크식의 논의를 받아서 이야기하는 칸트가 초월적 감성학transcendental aesthetics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제대로 연결이 되기 어렵다-보통 학부 초년기에 읽는 개설서에서는 로크, 흄, 버클리 같은 "영국경험론자"들과 칸트가 대비되는 식으로 쉽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로크만 하더라도 EcHU 에서 인간에게는 감각자료를 받아서 상을 완성하는 기능이 있다고 말한다(우도 틸 참조). 칸트 정도까지 인식구조의 형식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단순한 감각론자로 간주되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스타로뱅스키만 읽어도 로크-루소-칸트 간의 연결고리를 상정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에, 영국경험론자들의 입장을 이해할 때는, 그리고 그들의 직계후손에 속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을 이해할 때는 감각에 관한 용어를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보통 감수성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한 걸로 유명한 울스턴크래프트Wollstonecraft의 체계에서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성 의 대립구조를 세우는 게 아니다.



아감벤의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몰아서. <장치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친구"는 최근에 읽은 가장 아름다운 에세이에 속하며, <사물의 표시> 첫 글인 "패러다임"은 지적으로 굉장히 유용하다. 물론 내가 아감벤을 별로 읽지 않았지만 (<호모 사케르>도 예전에 사놓고 손도 안댔다) 내가 읽은 모든 아감벤의 글들 중에 "패러다임"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고를 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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