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글쓰기 첨삭 지도에 관해.

Comment 2014. 5. 19. 02:50

내일 저녁 수업까지 첨삭된 페이퍼를 돌려줘야 해서 쉼없이 코멘트를 하고 있다. 발제도 다 끝났는데 책을 읽지 못해서 조금 짜증나긴 하지만, 일단 이것만 넘기면 이제 책만 보면 된다. 요즘에 학생들의 읽기/쓰기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곳곳에서 듣는다. 사실 예전에도 글을 잘 쓰는 신입생들은 드물었다-_-;;; 졸업생도 그저 그런 수준인데 신입생 수준만 높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돌이켜보면 제대로 된 첨삭을 받을 기회도 별로 없고 (나는 학부 때 통틀어서 제대로 첨삭된 페이퍼를 두 세번 정도 받아본 것 같다- 학위 논문 쓸 때 제대로된 첨삭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깨달았다...유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언제나 감사할 뿐이다), 글쓰기교실을 이용하는 학생들도 많지 않다. 솔직히 평균적으로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충분한 읽기/쓰기 교육을 받고 졸업한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이 학교는 매일 미국의 명문대를 지향하지만 역으로 읽고, 쓰고, 수사를 다루는 훈련은 줄어들고만 있다...이제 핵심교양이 사라지면 안 그래도 부족한 기회가 더 줄어든다); 졸업 후 독서량이 대체로 빈약한 것, 사회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의 언어가 이토록 저열한 수준인 것도 교육의 부재랑 무관하진 않을 터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을 보유해봐야 "정치적 문맹"의 빈도가 여전히 높다면 그들이 받는 교육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와 사회가 읽고 쓰기의 중요성을 모르는데 학생들이 이를 귀찮은 과정으로만 치부하는 것도 당연하다.


원래 이런 이야기를 적으려는 게 아니었지만, 여튼. 원래 지금 페이퍼를 받는 기간은 아니다. 기말과제를 받고 첨삭을 해서 돌려주면 끝인데, 솔직히 나도 신입생이었던 시절이 있어서...솔직히 기말과제 돌려받아도 안 본다. 그래서 초고를 먼저 받고 첨삭해준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기말 완성본을 받기로 정했다. 자기들이 직접 글을 고쳐야 첨삭한 내용을 주의깊게 볼 테니까. 과제를 완전히 딴판으로 이해한 학생들이 서너명 되서 역시 좋은 판단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전날 한 7명 정도 해놓고 이제 8명을 연속으로 하니까 손목이 시큰거린다. 원래 손글씨를 잘 쓰는 편이 아니고 최근에 쓸 일도 별로 없어서 힘이 너무 들어간 듯 싶다(애들이 글씨를 알아먹기는 할런지...). 3쪽짜리 페이퍼 하나 당 평균 1시간 정도 들이고 있다. 점수만 매기는 페이퍼라면 이 정도로 신경쓰지는 않는다(감점요소만 나열하고 간략하게 총평 적으면 된다...익숙해지면 맘먹고 10분이면 하나 끝낸다). 어차피 얘들이 학부에 있으면서 글쓰기를 제대로 배울 (혹은 배울 마음을 먹을) 일 자체가 별로 없다. 2학년만 되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필요한 걸 다 안다고 '믿기' 때문에 (물론 실제로 자신의 믿음에 일치할 정도의 성숙에 도달하는 학생은 극소수다...줄창 학교에서만 살았는데 겨우 21살에 자기 삶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으면 그쪽이 비상식적이지 않나?) 첨삭의 약빨...이 떨어진다.


나는 공들여 첨삭을 할 때 보통 서너 층위에서 글을 보려고 노력한다. 개념어휘를 적절히 구사하는지, 문장쓰기는 효율적인지+안 좋은 습관은 없는지, 문단 구성 및 연결은 적절한지, 글 자체의 구성과 완성도는 어떠한지. 조금 더 신경쓸 경우 여기에 이 학생에게 어떤 방향의 공부가 적절한지도 생각해본다(물론 이건 글 하나만 봐서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본문에 코멘트를 다 한 뒤 총평을 따로 적는다. 사실 코멘트를 받을 때 (유쌤이 해주셨던 것처럼) 모든 문장을 다 교열보는 정도가 아니면 간략한 코멘트만으로는 지적받은 부분만 고치거나 막연히 기분이 좋거나 나쁘기 쉽다. 코멘트 받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쪽이 고치기에도, 생각하기에도 좋다. 선문답 던져봐야 받는 사람은 대체로 이해 못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아니지만...본문에 코멘트할 때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총평은 보다 일반적인 진술을 쓰는 식으로 나눈다. 보통 글의 전반적인 구조를 언급할 때는 총평 쓸 때 적는 편이다. 전체 글을 한번에 조감해서 보여줄 수 있으면 바로 그 위에 코멘트를 해도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물질적인 요건&형식들에 근본적으로 구속받는다) 여러 쪽짜리 A4 출력본은 그렇게 되기 힘드니까. 결론적으로 신입생들의 글은, 사실 학부생들은 거의 그렇지만, 저 너댓 개의 영역 전부에서 조언을 받아야만 하기 마련이다. 문제가 안 보이면 코멘트할 게 줄어서 참 좋지만 보통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글쓰기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해봐야 3,000자 짜리 논술(A4 2쪽도 안 된다) 수준이라... 물론 문제만 지적해주면 곤란하다. 잘 한 건 잘 했다고 얘기해줘야 한다. 나는 성격이 좀 짜서 칭찬에 인색하긴 하지만, 보통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자기가 잘하는 지점이 있어도 뭘 어떻게 잘하는지 알기 어렵다(내가 그랬다). 더군다나 장점 중에도 완전히 발현된 건 별로 없고 살짝 피어나기 시작한 아직 가능성 수준의 것들이 대다수다. 결국 글을 보는 일,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은 다양한 층위에서 피어나는 가능성들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기계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쉽다(논문 한 편만 제대로 써보면 그 정도 시각은 몸에 밴다). 그러나 가능성들을 발현시키는 것, 더 나은 글을 쓰도록 요구하는 것, 더 나은 읽기/쓰기를 위한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진짜로 필요하면서도 어렵다. 아무리 글을 못 써도 단순히 기분이 상하고 위축되지 않으면서 무언가 새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그런 길을 조금이나마 보여주어야 한다(물론 내가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른손 관절이 엄청 피로한 상태이긴 한데, 잠들기 전에 한 편이라도 더 해야 내일 덜 피곤하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예전에 응원해놓은 코멘트라도 읽고 힘을 내야겠다. 그런 사소한 요소라도 이럴 때는 힘이 된다-


+

[5월 20일 추가작성]


수업의 최종과제에 peer review를 추가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과제를 완성 후 지정된 사람들끼리 서로의 과제를 읽고 글의 개성/장점/단점을 짧고 솔직하되 무례하지 않게 평가해 적으라는 거다. 해당 코멘트를 읽고 고치든 안 고치든 본인 마음. 물론 원래 peer review는 제대로 돌아가려면 이것보다 훨씬 빡세게 시켜야 한다. 첨삭도 시켜보고, 평도 좀 더 제대로 해 보고. 그래도 굳이 이렇게나마 시키는 까닭은 사실 review를 받는 사람이 아닌 하는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읽고 쓰지만 사실 자신이 쓴 내용이 어떻게 읽히는가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심지어 그렇게 해야 할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빌어먹을 의사소통실패사회는 부분적으로 이런 문제에서 기인한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튼 다른 사람의 과제를 보면서 A가 어떻게 읽히는구나, B라고 쓰는 게 어떤 효과를 낳는구나 등을 조금이라도 떠올리게 되면 내 의도는 성공이다. 한번이라도 글의 효과를 생각해본 사람은 자연히 자신의 글을 적을 때도 그 효과를 의식하게 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아 이건 어떤 효과를 노리고 쓴 거구나"까지 생각할 수 있는데 (비판적 수사학/독서라는 게 엄청 대단한 게 아니다...글이 어떤 효과를 갖는지, 그것이 무엇을 드러내고 감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비판적 수사학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것까지는 안 바란다. 그렇게까지 시키려면 이것보다 훨씬 정교한 코스를 짜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 어차피 1학점짜리 수업이라서,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익히게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발상 자체를 한번이라도 느끼도록 이끌어내는 쪽이 효율이 좋다. 그런 점에서 이 과목은 정말로 교수자의 아이디어에 의존한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다보니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들도 계속 짜내게 된다. 역시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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