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비판적 읽기.

Reading 2014. 6. 30. 04:33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경이로움의 징후들>. 조형준 역. 새물결, 2014. 35,000. Trans. of Signs Taken for Wonders: Essays in the Sociology of Literary Forms, by Franco Moretti, rev.ed., trans. by Susan Fischer, David Forgacs and David Miller, London:Verso, 1988.

 

국역본에는 이 책의 개정판, 정확히 말해 개정-영역본을 을 번역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모레티 자신이 밝히고 있듯 여기에 수록된 글들 대부분은 원래 이탈리아 어로 집필되었다; 위에 병기한 원문 서지사항에 번역자 명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판에는 개정판에 실린 <미결정의 마력>("The Spell of Indecision"), <진리의 순간>("The Moment of Truth"), <문학적 진화에 대해>("On Literary Evolution")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Verso는 저작권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2005년에 이 책을 Radical Thinkers 시리즈로 재출간 하면서 개정판이 아닌 초판을 내는 우를 범했는데, 혹시 원서를 구할 분이 있다면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거의 4-50쪽 가깝게 볼륨 차이가 나고, 초판에 누락된 세 논문 다 이 책에 수록된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흥미롭다. 이 책의 원제는 T. S. 엘리엇(T. S. Eliot)의 시 "Gerontion"에서 인용한 문구로 알려져 있다(http://www.bartleby.com/199/13.html). 국역본은 원제를 부제로 넣고 "경이로움의 징후들"이라고 번역했는데, 내 체감에 한국어 '경이로움'이 아무래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꽤 지니고 있다면, 본래 양가적인 의미를 함께 포함하는 wonders(대표적으로 DraculaFrankenstein의 괴물에서 드러나듯) "경악"이나 "기괴함"과 같은 의미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원제를 옮겨보자면 <경이의 기호들: 문학적 형식의 사회학에 관한 논의들> 정도가 되려나. 국역본은 제목만이 아니라 논문수록순서조차 바꾸었는데, 하여간 출판시장을 생각하면 한 권이라도 더 팔려고 뭔짓을 더 못 하겠냐만...

 


** 세미나를 진행한 뒤 책 전체의 내용을 훑어정리하는 글은 다음 주소 참고. http://begray.tistory.com/125

 

 

1.

 

 

먼저 새물결에서 출간한 국역본의 만듦새에 대해 간단하게 평하겠다.

 

 

나는 국역본에서 판본에 따라 꽤 내용이 다른 텍스트를 번역하면서 서지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사소한 일로 용서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정도는 정말 사소해 보일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오자나 문장구성성분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거나 하는 경우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많다. "이지미"(이미지!) "초아자"(초자아!) 등은 애교에 가까우며, 심지어 원문의 영어각주를 틀린 것도 있다. <고보덕>_Gorboduc_Gordobuc이라고 표기해놓아서(69 각주8) 르네상스 전공자가 아닌 나는 처음에 본문의 국역표기가 틀린 줄 알았다. 오기가 너무 많다보니까 내 배경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명/저서명/개념 등에 대해서 올바로 표기가 되었는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 (<리어 왕>에 나오는) Gloucester '글로우세스터'라고 쓴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으며(당연히 보통 "글로스터"라고 옮긴다), <프랑켄슈타인>의 인물명을 나열하면서 "연인 유스틴"(28)이라고 쓴 것도 당황스럽다. 모레티의 원문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원 텍스트의 Justine 은 연인이 아니라 (괴물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시녀/하녀이며 보통 영어식으로 저스틴이라고 읽거나 프랑스식으로 읽어도 쥐스틴 정도가 될 거다. 배경이 주네브라서 스위스 식으로 읽었다고 한다면야 (스위스 식 발음을 모르는) 나는 잘 모르는 일이겠다만.

 

조금 더 크리티컬한 사실을 추가한다면, 목차에 나오는 쪽수표기와 10<문학적 진화에 대해>부터 책이 끝날 때까지의 쪽수 표기가 정확히 2쪽씩 차이난다. 예컨대 10장은 365쪽에서 시작하지만, 목차에 따르면 367쪽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9<진리의 순간> 3"비극과 혁명적 정치"까지만 맞는 걸 보면 원래 3절이 두 쪽 정도 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인데, 내용이 누락된 바가 있는지는 현재 원서를 대조할 수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다. 문장은 크게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은 아닌데 군데군데 제대로 읽히지 않거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제법 많다. 변명의 여지 없이 제대로 교정을 보지 않고 초보적인 실수조차도 잡아내지 못한, '기본이 안 된' 책이다. 새물결의 사실상 실질적인 운영자로 알려진 조형준은 역자의 말에서 모레티와의 오랜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데, 책을 이 따위로 만들어서 출간하는 건 감사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배은 아닌가? 새물결이 재정이 어렵다니 뭐니 이런 이야기는 간간이 들려왔다만, 책을 망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같은 출판사,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인 (대략 10여년 전에 출간된) <근대의 서사시>(_Modern Epic_)랑 비교해 봐도 심하다.

 

기초적인 만듦새와 함께 학술서로서도 최악이다. 원저에 있는 찾아보기index는 당연히(...) 누락됐다. 더불어 아주 많은 부분에서 원문 혹은 영역본에 실린 저술 인용을 해당 저술의 국역본 인용으로 대체하는데, 국역본 서지사항 및 쪽수표기를 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도대체 원문의 서지사항은 왜 삭제하는가? 학술서 번역이라면 당연히 원저의 서지사항을 그대로 두고 국역과 비교대조하면서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게 상식 아닌가? 난장이나 후마니타스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더 심각한 사실은 그나마도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모레티의 저술에는 벤야민이나 칼 폴라니, 베버 같은 이들의 인용이 수시로 등장한다. 나는 맑스의 <자본>을 강신준 판이 아닌 김수행 판으로부터 인용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슈미트의 <독재론>이나 <정치신학>은 원서에 독일어판이 실렸다보니 역자가 국역본과의 원문대조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벤야민 선집이라든가,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텍스트들의 경우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된 텍스트들이 아예 국역본 서지사항이 실리지 않거나 훨씬 마이너한 판의 국역본으로 옮겨져 있는 것은 상당히 당황스럽다. (길에서 나오지는 않았으나, 벤야민 선집의 기획자이자 주 역자인 최성만이 번역한)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지금은 품절되어 구할 수도 없는 새물결 판의 각주로 단 것은 애교로 봐 줄 수 있지만, 벤야민의 다른 글들을 굳이 수십 년 전에 나온 반성완 역으로 옮긴다거나 하는 건 비상식적이다. 한 두군데 나오는 것도 아닌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도 꽤 잘 되고 유명한 번역본인데 왜 영어각주만 실려 있는가? (맥퍼슨C. B. Macpherson <소유적 개인주의>나 푸코 <감시와 처벌>도 국역본 병기가 없기는 하다만...)

 

요점을 말하자면 학술서의 번역은 당연히 연구자 혹은 해당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찾아보고 원문대조 및 추가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다. 원서에 실린 각주를 그대로 옮기거나 국역본의 쪽수를 병기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특별히 논쟁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국역본 병기 또한 정본으로 인정받는 판본을 선택하는 게 상식적이다. 학술서를 옮긴다는 것은 역자/교정자/편집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아마 벤야민 번역문제를 둘러싸고 새물결과 길 혹은 최성만 교수 사이에 무언가 트러블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만약 그 때문이라면 사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책무를 포기한 치졸한 행위고, 그게 아니라면 지적인 게으름 혹은 무책임함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New Directions' 총서 출간 예정작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책들이 많다(개인적으로는 찰스 테일러의 주저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나는 <공포의 변증법>을 읽고 차라리 이 출판사의 이 총서로 출간되지 않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론 쪽을 공부해온 사람이라면 이 비유가 어떤지 알텐데, 책을 끝까지 다 읽은 뒤 머릿속에 거의 10여년 전 동문선, 특히 김** 교수의 프랑스 이론 번역서들이 떠올랐다. 2010년대도 절반에 도달했는데, 한국의 학술서 번역은 동문선의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인가. 저 좋은 책들을 이따위로 계속 찍어낼 거라면 미안하지만 곱게 출판사 문을 닫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지인이 산 국역본을 조금 뒤져보다가 직접 서점으로 달려가서 정가 주고 국역본을 샀다... 맨 위의 서지사항에도 기록했지만, 3일치 생활비에 준하는 35천원이다)

 

 

2.

 

 

국역본에서 제일 잘 많이 읽히고 언급될 부분은 역시 <공포의 변증법>("Dialectic of Fear")이겠지만[갑자기 수년 전 우석훈 선생이 <생태 요괴전>을 출간했을 때, 드라큘라와 자본가를 연결시키는 비유를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며 그런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던 '유명한 책 블로그 운영자'가 떠오른다...우석훈 선생의 이야기 중에서 일부는 그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오해를 산 것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글은 원서의 서문으로 실렸다가 국역본에서 맨 뒤로 밀린 <영혼과 하피: 문학적 역사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한 성찰>("The Soul and the Harpy: Reflections on the Aims and Methods of Literary Historiography" 이하 SH)이다. 우리는 <공포의 변증법> 전체로부터 이후 모레티의 작업(<세상의 이치> <근대의 서사시> 및 지정학적 문학사 저술들)을 예견하게 하는 맹아적 진술들을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레티의 야심과 목표, 그리고 이 사람의 작업의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 있는 방법적 태도를 보여주는 글은 역시 SH. 단속평형이론 같은 논리의 차용은 기본적으로는 모티프의 차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만 말해둔다. 단순히 이 책으로부터 재밌는 글 몇 대목 뽑아 읽으려는 가벼운 독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때 국역본 맨 뒤에 실린 이 글을 먼저 읽고 그 다음 처음부터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번 더 읽는다면 너무 박학하기 때문에 우리가 저평가하기 쉬운 이 '학자'의 기획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이 글을 맨 뒤로 돌린 국역본은 사실 학술서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위배하고 있다...연구자의 방법과 입장을 밝히는 글이 맨 처음에 위치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따라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에서도 책 전체를 전부 다루기보다는 SH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를 보다 면밀하게 다루는 길을 선택한다.

 

 

모레티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무엇을 자신의 적수로 겨냥하는가를 짚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넘어서고 싶어하는지 전혀 감추지 않는다. "자신의 특수한 미신의 희생물인 문학비평"(404), "온통 뒤죽박죽인 내적 모순들, 프톨레마이오스적 주전원, 사후 설명들, 완전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궤변들"(420), "항상 자신에 고유한 경험적 토대를 가볍게 생각하며, 공동의 목표와 명확한 규칙을 가진 과학적 공동체를 수립하려고 분투하기보다는 은연중 모든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정당화하는 것"(427)...다시 말해 자의적일 뿐더러 객관성에 대한 최소한의 자의식조차 없는 "취향판단"(424)들의 난립이다. 이와 같은 매우 비판적이지만 동시에 그 대상이 불명확해 보이는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1980년대 초 문학비평/연구라는 학문분과 자체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영문학의 경우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2차 대전 이후의 시점에서부터 문학연구 자체를 나름의 엄밀함을 갖춘 '정상적인 학문'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후발 주자들에게 문학 텍스트를 물신화한다고 지겹도록 비난받은 신비평 자체가 본래 이러한 시도의 산물이며, 1970년대부터 미국 영문학계에 불어닥친 (데리다, 푸코 및 각종 언어이론들을 포함한) 이른바 '프랑스 이론'의 열풍은 문학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학문 또는 '정상과학'이 되기 위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론을 찾고자 했던 열망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구조주의 계열과는 조금 다른, (광의의) 맑스주의적 색채를 보다 간직한 신좌파임에도 불구하고 모레티가 서있는 위치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문학전공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문학을 향유하고 주어진 전통을 따라가는 데 무비판적인 이들이 아니라면, 자신이 하는 연구가 실제로 '학문'인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묻게 된다...모레티의 텍스트가 단순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괴짜의 작업 정도로 간주된다면, 이는 한국에서 아직 문학을 '과학화'하려는 진지한 열망이 유의미하게 전면에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30여년 전 모레티가 던진 질문은 아직 한국의 문학연구자들에게 너무 빠르기 때문에 올바로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보수적인 문학연구자들이 이론적인 사유, 방법론에 대한 고찰을 단순히 지적인 현학이나 유행 정도로 간주하는 상황이야말로 이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학적인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조차도 하지 않는 순진한 존재들임을 잘 보여준다...특정한 이론에 동의하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서 도입되었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재한 것이다)

 

실제로 모레티는 자신의 의도를 매우 분명하게 표현한다. "문학비평의 역사학적 지위를 토대 자체로부터 재검토"(411) "모든 측면에서 역사학의 분과학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문학비평"(406, 강조는 원문), "하나의 형식 또는 일군의 관련된 형식들을 연구함으로써 사회의 역사에 기여하는 것"(419) ,"문학사는 결국 사회의 총체사[아날 학파의 용어들이 국내에 번역된 전례를 참고한다면 "전체사"가 보다 타당할 것이다]라는 맥락에서 역할과 존엄성을 찾아야 할 것"(420) 등등. 이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역사학 혹은 전체사의 일부로 문학사회학 또는 문학비평을 재구축하는 것이 그의 야심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가 이야기하는 '역사학'의 속성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두 대목만 인용하면 충분하다. "원칙상 문학적 해석들의 검증 기준은 다른 모든 과학의 분과학문에서 사용 중인 것과 동일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해석에 대해 일관되고, 일의적이고 완벽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검증은 가설 자체에 비추어 볼 때--대상을 구성하는 텍스트나 텍스트들에서 모순적으로 또는 불가해하게 보이는 데이터와 그것을 비교해보는 데 있다"(423) "만약 비평이 자신에게 합리적으로 검증 가능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면 수사학적 분석은 필연적으로 '보다 경성인' 사회과학 내에서 상이한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427). 애초에 두 인용이 속한 절의 제목이 (명백히 칼 포퍼의 영향이 드러나는) "'반증 가능한' 비평을 위하여"인 데서 분명해지지만, 여기에서 모레티는 문학비평을 일종의 '정상과학' 혹은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417)으로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가능한 선 내에서) 만들고 싶어하며 그래야만 다른 분과학문들과 함께 전체사=역사학의 일부분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후 모레티의 궤적이 어떠한 맥락에 입각해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가 스티븐 제이 굴드의 논리를 차용하든, 세계체제론의 지정학적인 요소를 끌어오든, 혹은 통계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취하든, 그 어떤 것도 단순히 변덕스럽거나 괴이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과학적인 역사학으로 만들고 자신의 학문분과 외부에 있는 연구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의 지식을 생산하고자 할 뿐이다. 그가 SH에서 제시하는 사례, "문학비평가가 전체주의에 관한 학제간 학술대회에 참가해 알레고리의 메커니즘에 관해 1시간 동안 발언을 하는"(427) 일은 전혀 엉뚱한 발상이 아니다. 연구의 예상독자가 전통적인 문학전공자들 혹은 부르주아 교양독자를 넘어 타 분과학문의 연구자들을 포괄한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상식적인' 광경이다--그리고, 반드시 모레티가 원했던 형태가 아닐 수는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학제간 연구작업은 오늘날 미국 및 서구권에서 상당히 흔하게 행해지고 있다.

 

 

 

문학연구의 과학화에 대한 입장의 찬반을 곧바로 따지기 전에, 우리는 그가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의' 과학을 추구하는지를 따져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회과학/역사학의 전범이 (적어도 1980년대의 이 시점에서) 아날 학파라고 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애초에 전체사라는 용어도 그렇고, "장르라는 생각은 <아날> 학파가 장기지속이라고 부르는 차원을 문학사 속으로 도입"(411) 한다는 진술은 그가 자신의 핵심적인 개념을 (국내에 출간된 책들로 한정한다면, 그의 주저 <세상의 이치><근대의 서사시> 모두 '장르'를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음을 상기하자) 어디에 빚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유감스럽게도 구글을 통해 검색할 때 모레티와 아날 학파의 관계를 언급하는 텍스트는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만... 아날 2세대이자 프랑스 역사학계의 교황 소리까지 들었던 페르낭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의 대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긴밀한 연관을 상기한다면, 아날로부터 자신의 근본적인 토대를 찾던 그가 이후 세계체제론의 모티프를 받아오며 '문학지리학'과 같은 개념을 추구하는 게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모레티의 독특한 관점, 19-20세기 소설을 '극단'이 아닌 '일반적인 상태'에 주목해 읽을 것을 요구하며 근대소설 장르의 근본적인 동기를 '타협'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을 조금만 상기해도 어떠한 맥락에 속해 있는지 분명해진다(<세상의 이치> 서문에서 모레티는 자신의 시각을 분명히 드러낸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레티는 자신의 패를 공개한다. 단지 지금 한국의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나 역시 아날학파에 관해서는 기초적인 안내서 한 두 권을 읽은 정도에 불과하기에 정밀하게 개념들의 변형을 논할 여력은 되지 않는다. 일단 급한 대로 기초적인 수준에서 아날 학파의 변천을 소개하는 글을 링크해둔다.

 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433)

 

아날 학파와 모레티의 관계는 그가 단순히 자신의 핵심적인 이론적 부품을 전자로부터 참고한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일차적으로 그가 문학연구와 사실상 등가로 취급하는 "수사학적 분석은 사회과학의 영역을 세련화시키고 확대시키며 후자는 그것들 나름대로 그러한 분석에 역사적 기본 틀--이것을 벗어나서는 수사학적 규약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을 제공"(405-06)한다. '역사적인' 문학연구의 근본적인 배경/무대/토대가 되는 지식의 체계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모레티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아날 학파, 특히 브로델이 주창한 전체사가 그 자리에 들어앉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이 시점부터 모레티는, 그가 맑스와 맑스주의자들의 연구를 놀랄만큼 잘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맑스주의적 문학비평가가 아닌 셈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체사와 상대적으로 좁고 미시적인 범위의 문학 연구를 매개/연결시키기 위해 다시 자크 르 고프와 "심성사" 개념이 인용된다(402). 이후에 이 영민한 연구자가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학문을 계속해서 유지하는지, 또 주요한 방법을 수정하지 않는지의 여부는 실제로 그의 최근 저술들을 따라가야만 하겠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모레티의 입장은 이렇고 큰 기조는 바뀌지 않은 듯 하다.



 

여기까지 모레티가 속해 있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맥락을 짚었다면, 이제 고개를 돌려 그가 실제로 제안하는 방법을 한번 정리해보자. 핵심은 다음의 문장이다. "문학 텍스트들은 수사학 기준에 따라 조직된 역사적 산물이다"(406, 원문 강조). 그렇다면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수사학은 (케네스 버크Kenneth Burke를 포함한 수사학의 연구를 인용하며 설명하듯) 갈등관계에서 "사회적, 정서적, 당파적 성격을, 간단히 말해 가치평가적 성격"을 가지며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것이다(397, 원문 강조). 보다 익숙한 용어로 정리한다면 특정한 가치체계에 따라 사람을 설득하는 기능을 갖는 언어적 표현, 곧 이데올로기의 언어적 장치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데올로기와의 비교는 모레티가 수사학적 문채/형상(figure)이 "기술[description]과 가치평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불가분의 전체로 하나로 결합"(399)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가치평가의 측면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감성적인 것이 있으며, 이 감성적인 것은 사회적인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 곧 "수사학적 문채들, 그리고 긴 내러티브들을 결합하는 더 큰 결합들은 모든 세계관[Weltanschuung]의 심층적인, 묻혀 있는, 비가시적인 가정들과 같은 종류의 것"(401)으로 "그것[수사학적 형식]들의 지속적이고 은밀한 작용은 모든 문명의 무의식적 문화, 암묵적 지식에 대한 연구의 광범위한 장을 가리킨다"(402). 다시 말해 문학텍스트=수사학적 표현들의 집합체는 세계관 혹은 심성을 끊임없이 학습시키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사회구성원들을 '설득'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그리고 사회의 분열과 변동에 따라 새로운 수사적 표현 및 형식들이 등장하고 이것이 새로운 문학 장르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문학 장르의 단속적이고 급작스러운 생성-폭발과 '자연선택'에 관해서는 10장을 참고할 것).


 문학텍스트의 변천을 논하는 '통시적' 관점이 역사학적인 과제와 연결된다면, 문학텍스트의 형식적인 면을 분석하는 '공시적' 관점이 수사학적 분석에 임무를 부과한다. 문학장르는 유사한 성격을 공유하는 복수의 문학텍스트들을 묶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모레티는 루카치로 대변되는 입장, 곧 폐쇄적인 형식을 넘기 위한 "유동적이고, '열린' 미규정 상태"(410)를 유지하는 '삶'을 강조해온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오히려 문학으로부터 형식의 폐쇄성, 앞서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기지속적인 면모를 강조하며, "형식이 결정적인 사회적 뿌리를 갖게 되어 사회적 삶 속으로 들어오고, 점점 더 은밀하고 규칙적인 방식으로--따라서 보다 효율적으로 그것을 자극하고 조직할지를 가리키는" "규약"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문학 장르는 곧 규약을 문학적인 맥락에서 표현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곧 소수의 걸작들, 주어진 규칙을 뛰어넘으려는 텍스트들이 아닌 규약에 복종하고 이를 충실히 이행하는 대다수의 텍스트들이 '과학적' 문학연구의 진정한 대상으로 등장하며 이들로부터 도출되는 규약=문학장르가 새로운 연구의 본질적인 개념적 도구가 된다(<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텍스트를 새롭게 꺼내드는 거라든가, 대중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놀랍지 않다...오히려 신역사주의와 아카이브, 대중독서시장의 분석이 진부해질 정도로 일반화된 요즘에는 이러한 태도에 저항하는 입장이 더 급진적으로 보일 정도다).


 이처럼 동질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문학 장르를 연구의 핵심대상으로 간주할 때, "'보다 느린' 문학사. 그리고 보다 '불연속적인' 문학사"(416)가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심성사가 기본적으로 꽤나 긴 시간적 단위를 요구함을 상기하자). 그리고 이와 같은 문학사는 단선적인 발전의 역사, 곧 하나의 형식/장르가 또 다른 형식/장르의 준비단계로서만 의미를 갖는 관점이 아닌 (그래서 모레티는 헤겔적인 '시대정신'의 암묵적인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이한, 심지어 상호 대립적인 상징적 형식들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인정해야 하며 "문학사는 자신의 대상을 전체적인 균형이나 불균형이 오직 내부에서만 작용하는 개별적 힘들의 결과일 뿐인 일종의 자장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에서 모레티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아도르노의 성좌=짜임관계konstellation 및 '힘의 장'forcefield과 같은 개념틀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모레티는 "작품의 기술적 특수성들...의 형식들의 물질성"(418)에 기초한 새로운 예술사/문학사의 구축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물질적인' 형식들이 생성되고 산포되고 사멸하는 조건들을 제공하는 맥락으로서의 문학외적인 현상에 대한 참고가 다시 요구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조건들 위에서 , 혹은 다양한 맥락들을 포섭하고 활용하는 문학텍스트 및 장르의 "개별적 형식의 특수성"(429)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근대의 지배적인 문학장르로서의 소설이 (서구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갈등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이미 봉합할 수 없는 갈등을 '타협'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데서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아마도 여기가 바흐친/아도르노/제임슨과 같은 맑시스트 문학비평의 전통과 모레티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일 것이다). 곧 모레티에게 있어서 문학은, 적어도 근대소설은 "형식상의 타협"(449)을 실천하는 텍스트다.



 지금까지 정리한 모레티가 제안하는 시각과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그의 연구가 분명히 상당한 효용을 가지리라 예상한다(이제 본격적으로 그 결과물들이 나오고 있다...결국엔 직접 읽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영문학 분과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영문학의 양적/질적 폭발과 함께 했던 '이론의 시대'는 좋든 싫든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적어도 정신분석, 데리다, 푸코 등의 논의가 가져다 주었던 종류의 충격은 (제국의 '반주변부'에서 볼 때는) 한동안 나타날 성싶지 않다. 신좌파 중에서 꽤나 젊은 편이었던 모레티는 어떤 면에서 '문학의 과학화'라는 지침을 아직까지 수행하고 있는 드문 존재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도대체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지점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그의 연구는 큰 틀에서의 문학/문학사/문학사회학 연구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하지 그 외의 잔여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하게 유의미한' 영역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가 비판하는 '자의적인' 문학비평들이 순진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다 엄밀한 성격의 학적 연구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레티의 태도에는 동감할 수 있다. 엄밀함과 자기비판의 추구가 없는 연구는 연구자의 사적 견해를 공인하는 수단 이상의 지점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가 구체적으로 취하는 입장에 몇 가지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문학비평이 동시대의 심성에 개입하는 과정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와 같은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 이상으로 인간사회를 전진시키고자 하는 학문의 도구성을 망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우리가 대상을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형식과 믿음조차도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임을 감안한다면, 어쨌든 과거를 연구하는 이들 또한 동시대의 이데올로기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문학의 과학화'라는 모레티의 슬로건 자체가 특정한 가치관의 산물이듯이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초래하는 동시대의 조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문학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과정은 다른 '정상과학들' 보다 더욱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 문학연구자들의 연구가 결국 (정전들의 형성과 함께) 사회구성원들의 역사적 무의식 및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면 우리는 그에 따른 책무를 짊어져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만약 모레티의 입장이 '과학화될 수 있는 영역을 제외한 전 영역의 추방'을 의도한다면(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히 그러한 입장에 반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들과 무관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점은 대중문학-문학장르-'형식적 타협'으로 이어지는 그의 분석초점에 관한 것이다. 물론 나는 모레티의 연구가 매우 유용하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연안이 아닌 대륙'을 탐험하는 시도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이 '성공적인 타협'에 도달하는 텍스트가 있는 반면, 그렇게 될 수 없는 텍스트들 역시 분명히 있다. 후자의 텍스트들은 때로 (고전적인 언어를 빌리자면) 형식과 내용이 충돌하기도 하며, (아도르노가 <신음악의 철학>에서 쇤베르크를 다루며 보여주었듯) 형식 자체를 지속적인 발전이 결국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내기도 한다. 혹은 (나는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이 한 사례라고 생각하는데) 텍스트가 해결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문제를 결코 성공적으로 봉합할 수 없기 때문에 내파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평균과 극단의 대립이 내포되어 있는데, 특히나 아도르노를 따라 진리는 극단으로부터 드러난다는 교의와 대립시킬 때, 모레티의 논의는 (추가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외부적 조건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문학텍스트 내부의 동적인 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텍스트가 타협을 수행하는 것, 혹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데올로기적 봉합물"로 작동하곤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항상 타협에 성공하지는 않으며 그와 같은 타협이 무너지는 순간들은 단순히 외적인 모멘트의 개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에 나는, 아도르노가 강하게 주장했듯이, 텍스트 혹은 수사적 형식들이 작동하는 내적인 계기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큰 틀에서 본다면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과 모레티의 관점은 완전히 상충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타협'의 모델이 봉합-실패의 모델(대표적으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_The Political Unconscious_에서 보여준 모델-)을 완전히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이 주제를 깊게 다루지는 않겠지만, 아도르노의 미학 혹은 (모레티의 텍스트와 매우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정치적 무의식>의 모델을 모레티의 모델과 맞세워 보는 작업이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최종적으로 나는 SH에서 무비판적으로 도입되는 아날 학파의 전제들 자체를 검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프랑스의 역사학자 폴 벤느Paul Veyne의 중요한 저작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와 모레티 혹은 그가 취사선택-재구성한 아날학파적 문학사의 전제들을 꼼꼼히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은 있다. 나 자신이 벤느의 텍스트를 완전히 섭취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통적인 관념적 사관과 아날 학파 양자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방법론을 구축하려 시도했다는 점만 말해둔다.



이 모든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모레티의 텍스트가 무척이나 흥미로우며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가져다준다는 점만큼은 사실이다. 문학연구자, 문학사연구자, 예술사 연구자, 문학사회학 연구자 모두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꽤나 늦게, 멀쩡하지 않은 꼴로 도착했지만, 이제부터라도 모레티의 작업이 진지하게 이해되고 (필요에 따라) 수용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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