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적인 공론장과 역사

Comment 2014. 5. 29. 04:40

솔직히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전문기술적인 공부를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대체로 밥벌레로 간주된다. 특히나 내가 청소년기까지 보내온 중간-하층계급의 '실용적인' 관점에서 지켜본다면 투자에 비례한 소득도, 안정성도, 투자액을 돌려받는 시점도 모두 불투명한 대학원에 들어간다는 것이 납득이 된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지금처럼 대학원-교수의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나 상징자본의 축적여부도 계속 하락하는 추세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지간히 강철같은 자기규율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자존감 유지에 상당히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나마 축적해돈 자본이 이미 많은 사람은 좀 낫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생존투쟁과 인정투쟁 모두에서 험난한 꼴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한) 대학원생들이 특히나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타인을 폄하하고자 하는 강한 호승심에 이끌리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엔 이런 호승심은 극복되어야 하며 극복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방대한 역사를 가진 학문분야라고 한다면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분야의 전 영역을 한 명의 학자가 감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학문의 축적이 어쩔 수 없이 (자연과학적 학들에 비해) 개별적으로, 단독적으로 진행되는 인문사회학 계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작업은 모두 단독적인 면모가 있지만, 그 단독적인 면모들이 모여 어떤 (가변적인 그러나 가정될 수 있는) 총체를 구성한다. 삶의 아주 다양한 면모들을 일시적으로 제거하고 오로지 학문적 영역이란 것만 생각한다고 한다면, 연구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 총체의 전진에 기여하게 된다(심지어 과연 전진이 가능한지, 전진해왔는지와 같은 질문도 그러한 전진의 일부로 간주된다...우리는 우리가 전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총체로서의 학문을 인식할 때, 그리고 자신이 최대한의 재능과 노력을 투입한다고 해도 총체를 혼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연구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우연적인 선한 성격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서로를 동료 연구자로 바라볼 수 있다. 약간 이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 순간 우리들은 일종의 공적인 주체로서 주체화subjection한다; 전문적인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개인의 성격적 결함을 넘어서는 공적 주체로 만든다는 것, 나아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친밀함과 원한, 질투, 증오, 적대, 애정의 대상이었던 주변의 타자들을 잠재적인 동료=나와 마찬가지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너는 내가 할 수 없는/하지 않는 분야를 다루며, 나는 너의 그러한 연구를 이해하고 참조하고 활용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연구와 학문 분야를 전진시키며, 이러한 전진은 다시금 너로 하여금 스스로와 전체의 진전에 뛰어들도록 촉구하는 것이다--여기에는 스미스적인 예정조화론이라기보다는 주체와 주체 간의 변증법이 차라리 더 어울린다. 이러한 해설은 실제로 꽤나 하버마스적인 도식의 냄새를 풍기는데, 애초에 하버마스적 도식이야말로 그 구성원들이 각각 '주체', 다시 말해 이성적 주체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평적인/학적인 공론장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학적 연구가 근본적으로 칸트적인 논리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면, 칸트로부터 기인한 하버마스의 구상이 현재의 학적 연구와 닮지 않았다면 그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칸트-하버마스적 틀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 우리는 규범적인 층위에서는 모두 칸트-하버마스적 주체가 되도록 요구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멈추지 말자.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전문적인 학적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괄호=차폐막을 벗기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우리 모두가 실제로는 언제든 상징계를 찢어발기고 들어올 수 있는 실재를 전혀 모르는 주제에 태연하게 상징계로서의 '학문적 공론장'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실재의 견뎌낼 수 없는 가혹한 두려움에 맞서 스스로와 스스로가 속한 질서의 체계를 지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연약한 상징계는 정확히 우리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보통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상급자의 존재 혹은 난해하고 불합리한 행정으로 너무나 손쉽게, 나이브하게 도식화되는 현실의 권력관계가 자신의 부조리함을 드러낼 때  "그래, 사실 이 세계는 원래 그런 곳이지, 여기도 똑같아"라는 태도를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을 지탱하는 체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냉소하면서도, 또 다른 이들의 냉소를 알면서도 그러한 실재와 마주치기 전의 행동패턴을 마찬가지로 유지한다. 어떤 면에서 (스스로가 평가하는 것보다 무척이나 순진한) 우리의 인식과 믿음은 우리의 일상적 실천/행위들이라는 고정점에 덧붙여진 종이 날개와도 같다. 바람이 불어와 종이 날개들이 제 아무리 흔들려도 고정점이 움직이지 않는 한 실제로 체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학적 공론장은 그렇다면 이 이중적인 영역, 곧 칸트-하버마스적인 이성적 논의의 축적이라는 앞면과 현실적인 권력관계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해 또한 지나치게 진부하고 단조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동전의 양면을 보아야 할 게 아니라 (이 비유는 동전이 마치 양면으로만 구성된 것처럼 우리를 기만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동전 자체를 보아야 한다. 결국에 우리가 목도하는 동전의 양면은 더 포괄적인 단위로서의 동전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것을 (아도르노를 따라) 역사라고 부르든, 사회라고 부르든, 세계 자체라고 부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럿의 이질적인 영역들이 충돌하고 뒤얽히는 '장', 즉 세계가 존재한다는 '방법상의 합의'만 할 수 있다면. 어쨌든, 특히나 역사적인 퍼스펙티브를 갖고 있는 연구자라면, 자신의 시야를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영역에 적용할 때 그것들 자체가 다른 영역들과 어떤 형태로든 상호작용하는 한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강렬한 민족/주의에 대한 요구 및 그러한 단위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없었다면 각 민족국가별 어문학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보다 정교한 학문/과학에의 요구가 없었다면, 과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없었다면 20세기 중후반에 특히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중심으로 몰아친 이론이 수용이 빠지고 지금과 굉장히 다른 어문학이 존재했을 것이다(냉정하게 말한다면, 방법적 개선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특히 영문학은 지금과 같은 위세를 절대로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영문학이 그 자체로 다른 어문학보다 특별히 뛰어날 이유도 없고, 특별히 사회적 위신이 높을 이유도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영문학에 주어졌던 독특한 사회적 위치에 기반한 것이다--뒤집어 말하면 그런 '우연적인' 맥락이 사라졌을 때, 예컨대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부터 영문학의 위상은 명백하게 하강할 것이다). 우리가 '현실적인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부분들 또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금 더 유효한 진술은 학문의 양지와 음지, 의식과 무의식(으로 간주되는 부분), 학적 공론장과 학적 공론장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장이 맺고 있는 독특한--한편으로 상호의존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상호 냉소적인--관계 자체가 특정한 역사적 형성물로서 분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그러나 학문적 논쟁과 학과 내의 투쟁 중 과연 어느 쪽이 공적인 것인가? 여기에는 특히나 헤겔 식의 변증법적 전도가 작동한다)...그러나 나는 일반적 모티프의 나열에만 만족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동전 일반을 보기 전에 일단 구체적인 동전 그 자체(그 자체라니, 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말인가!)를 보고 싶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역사를 풀어낸다는 것은 확실히 고유성, 단독성의 발견과 이어진다. 이 동전의 독특한 모양을 보면서, 그것이 달리 될 수 없음을 알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에 접근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것에, 일반적인 것에 접근하기 위해 단독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단독적인 대상의 제 아무리 사소한 지점까지라도 놓치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이행, 단독적인 것을 구성해 온 역사적-이질적인 흐름들이 어떤 층위를 그리며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흐름들에 대한 일반화된 진술이 다시 가능해진다. 만약에 우리가 (사실 여전히 우리 자신을 주체로 부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타자에 대한 윤리를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지침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성심을 다해 받아들이고 읽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에는 우리 자신의 연구대상, 우리 자신들과 같은 연구자, 우리가 속해 있는 학적 세계의 움직임, 학적 세계를 구성해온 세계 및 그것들의 흐름들이 포함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연구대상, 이웃(동료 연구자), 이웃(일과 무관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최대한 성의껏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세계는 단독적이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그것이 달리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부터 어떻게 그것이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일단 오늘은 너무 졸려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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