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일기, 지나간 빗소리를 생각하는 밤

Comment 2021. 5. 6. 00:51

늦은 밤 책을 읽다가 전날의 빗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날은 새벽부터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부실한 잠을 잠시 깨었다가 실한 빗방울이 산산이 부서지는 타음 속에서 이윽고 좀 더 깊고 아늑한 영역으로 내딛듯 무너졌던 기억이 난다.

 

고맙게도 비는 오후, 저녁 때 또 왔다. 그러나 나는 오직 비가 내렸다는 사실만을 기계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충분히 단호하지도, 생산적이지도, 성실하지도 못했던 몇 달을 지나고 봄과 여름을 깨금발로 오가는 날씨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제 정말로 하루에 수백 쪽 씩 자료를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잠시 재정을 걱정하고, 밀린 일을 조금 처리하고, 이후 오랜만에 한참동안 문헌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뇌와 뒷목이 뻣뻣하게 부풀어올라도 모른 체 하다가 이제 구역질이 나서 더는 못 읽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문득 전날 고스란히 흘려버린 비의 풍경이 간절해졌던 것이다.

 

불을 끄고 조용히 밖을 바라본다. 집 앞의 대로변에서 먼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희뿌연한 물안개가 덩어리지어 떠 있다. 구름과 맞닿아 있는 능선 한 가운데는 산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솟아있는 것 같다.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유머를 섞어 그려낸 허공을 횡행하는 거대한 초자연적인 존재의 웃는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집 뒤켠으로 눈길을 돌린다. 창문을 크게 열었다. 아직 빗방울이 방충망 곳곳에 매달려 있다. 바람이 오가는 소리 위를 어두운 자줏빛의 구름이 채우고, 구름에서 아스라한 빛이기도 그림자이기도 한 것이 창틀에 은은하게 내려앉을 때 점차 언덕배기 위에 우거진 수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 사이로 저 멀리 고층빌딩에서 형형색색의 반짝거림을 통과시키던 나무들은 이제 두툼한 이파리를 한껏 매단 채 좌우로 키 큰 몸을 흔든다. 이따금씩 이파리가 머금고 있던 물방울이 작게 후두둑 소리를 내며 지면의 풀과 흙으로 쏟아진다. 밤의 숲이다. 이제는 지나가버린 비의 기억을 조금씩 주워보았다.

 

바람이 매만지는 서늘한 손길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딱 선선할 정도의 기운 찬 습기가 실려있다. 부풀고 굳은 몸과 머리를 풀기 위해 운동을 했다. 힘들다는 감각이 올라올 것 같으면 타원형으로 힘차게 회전하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가지의, 잎뭉치의, 이파리의 윤곽을 점점 더 정확하게 응시하고자 한다. 어떤 가지는 정말로 지척에 있는 듯이 뻗어온다. 잎사귀가 죽어 떨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손길에, 손길이었던 것에 비로소 닿을 수 있다. 그저 검은 빛깔이었던 숲이 어느덧 물기를 머금은 진한 녹빛을 내뿜어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을 때쯤 몸도 땀에 젖었다. 주저앉아 헉헉거리는 숨소리, 심장박동의 쿵쾅대는 소리 사이로 비가 지나간 숲의 밤에 고유하게 속한 소리들이 점차 고개를 든다. 밤의 숲 위에 가득한 구름은 여전히 말없이 빛도 그림자도 아닌 무언가를 흩뿌리고 있다.

 

내일 빗소리와 마주하기를 바란다. 정작 비가 오더라도 나는 고개를 책에 처박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웃으며 지나가버린 비를 늦은 밤이 되면 스스로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또 깨달을 것임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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