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리우. <언어횡단적 실천>

Reading 2014. 3. 23. 15:32

리디아 리우의 <언어횡단적 실천> 국역본을 한번 읽었다(내가 읽은 소명출판사의 책들은 항상 책 자체는 좋으면서도 편집이나 고유명사 통합, 각주 처리 등에서 심각한 불성실함을 보여주곤 한다...). 원서의 서지사항은 Liu, Lidya H. _Translingual Practice: Literature, National Culture, and Translated Modernity--China, 1900~1937_. Stanford: Stanford UP, 1995. 중문과에 있는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10년전쯤에는 굉장히 각광받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는 연구서라고 한다. 어쨌든 중문학의 맥락 안에 있지 않은 나로서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게 있다. 지금까지의 식민주의/포스트식민주의 언어이론과 번역에 대한 논쟁들과의 기나긴 대화가 이뤄지는 1장 서론에서 리우가 이야기하는 '언어횡단적 실천'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의 및 목표는 다음과 같다(기본적으로 벤야민의 번역관에 적잖이 동감하는 나로서는 리우가 표명하는 입장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책이 출간되고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리고 특히 동아시아 국가에서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리우의 입장이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나는 '번역의 정황'에 대한 연구 그리고 최초 언어간 접촉에 뒤따르는 담론적 실천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는 이론적 문제에 관심이 있다. 넓게 정의하자면, 언어횡단적 실천에 관한 연구는 손님언어guest language와의 접촉/충돌에 의해, 혹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주인언어host language 내부에서 새로운 단어·의미·담론·재현 양식이 생성되고 유포되며 합법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조사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손님언어에서 주인언어로 옮아갈 때 그 의미는 '변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인언어의 현지 환경 속에서 창안/발견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번역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경쟁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 사건일 수 없다. 번역은 바로 그러한 투쟁이 진행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손님언어는 주인언어와 조우하도록 강제되며, 이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 사이에 대결이 이루어지고, 권위가 불러들여지거나 도전받으며, 애매성이 해소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주인언어 자체에 새로운 단어와 의미가 부상한다. 나는 언어횡단적 실천이라는 개념이 종국에 단어·범주·담론·재현 양식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안·번역·소개·현지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적 어휘, 나아가 주인언어의 권력구조 내의 전이·조작·배치·지배의 양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적 어휘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나의 목표는 유럽 식민모국의 언어를 출발점으로 삼는 오늘날 언어 이론의 익숙한 전제에 의해 공표되지 않은 새로운 관계의 범주를 통해 '언어' 문제를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일부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주인언어 쪽의 번역자나 다른 식의 중개자가 손님언어로부터 단어와 텍스트를 도입·선택·조합·재창안함으로써 언어적 상호작용이 시작되는 것이고, 나아가 번역자와 그/그녀의 청중이 손님언어에서 가져온 텍스트의 의미(즉, 유용성)를 함께 협상하여 결정짓는 것이 만약 어느 경우에나 사실이라면, 전통적으로 번역이론가들이 번역에 관계된 언어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원천'source과 '목표'target/'수용'receptor과 같은 용어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원천언어라는 관념은 종종 권위·기원·영향 등과 같은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 해묵은 번역 가능성/번역 불가능성의 문제를 논의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게 되는 단점이 있다. 한편, 목표언어라는 개념은 목적론적 목표, 의미의 충만함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야 할 거리를 상정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등가성의 비유가 주인언어에서 상상되는 방식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그것의 작용을 부차적인 것으로 끌어내린다. 원천과 목표라고 명명함으로써 존속되는 형이상학적 관심에 계속해서 이끌리는 대신, 나는 이 책에서 '주인언어'와 '손님언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이 용어들의 중국어 동의어인 주팡위얜主方語言과 커팡위얜客方語言은 원본과 번역본 사이의 관계를 더욱 철저히 변경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에 비해 훨씬 더 주인언어를 강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바, 탈랄 아사드가 그토록 명쾌하게 묘사하는 지식/권력 양자 관계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설명은 비서구 주인언어가 번역의 과정에서 손님언어에 의해 변형되거나 그것과 공모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 손님언어의 권위를 침해하고 치환하며 찬탈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서구와의 역사적 접촉 과정에서의 이러한 복잡한 매개의 형식들이 바로 이 책의 개별 장들의 주요 관심사들이다." (60-62)


본문에서 저자는 (일본-서구와의 관계 속에서) 번역과 개념의 도입이라는 포커스에 맞추어 민족문제, 맑시즘, 정신분석, 서술기법분석, 비평 및 정전의 문학장 문제와 같은 주제들을 통해 20세기 초반부의 중국 문학계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목차를 훑어보면서 작년에 읽은 천정환/권보드래 선생의 <1960년을 묻다>를 떠오르는데, 리우의 텍스트가 조금 더 이론적인 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문학텍스트의 분석에 보다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 독자가 아주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여튼 개별적인 텍스트 비평을 초과하는 문학연구가 역사라는 차원으로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나는 루쉰에 관한 몇몇 진술들은 흥미롭게 읽었고, 특히 <복을 비는 제사>가 최초로 여성형 3인칭 대명사를 도입한 작품 중 하나라는 사실은 기억하고 싶다. 이외에는 나 자신이 중국근대문학에 아주 문외한인 관계로 그냥 모르는 분야를 읽는다고 생각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나처럼 비전공자가 읽어도 지루하지 않게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점은 분명 미덕이다(단 내가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남들과도 같은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6장 "일인칭 글쓰기의 지시 기능"에서 굴절어인 유럽어와 비굴절어인 중국어/한국어의 주어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다(저자의 박사논문이 1인칭 글쓰기를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도 언급해두자). 영어권 글쓰기의 사고방식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나 또한 문장을 쓸 때마다 주어의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쓰기와 사유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바로 그 언어가 속해있는 '특수한' 지점--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언어관은 우리가 국민언어의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준다--을 비판하는 것의 무게는 정말로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에밀 방베니스트를 빌어오면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좋았는데, 다만 그 뒤의 구체적인 분석이 이론제기에 값하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의 이론적 야심을 밝히는 서론과 본문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이 부분도 최초의 흥미진진한 문제제기에 비해 뒤이어 언급하는 내용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상식적인 진술로 느껴진다. 6장에서 저자는 지시대명사의 문제를 젠더, 특히 여성적 글쓰기의 문제로 이어가는데, 나로서는 여성'개인'주체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저항과 고민을 풀어내는 작업으로만 이 문제를 덮는 것은 최초의 이론적 야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젠더의 문제는 확실히 강력한 이론적/윤리적 함의를 갖지만, 그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될 때 문제제기의 잠재력을 역으로 깎아먹는다; 계급분석이 성차의 문제를 아주 부분적으로밖에 다룰 수 없듯이, 젠더가 언어형식의 분석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번역, 글쓰기/글쓰기 스타일의 창조, 근대문학과 같은 주제로부터 나는 일본인 저자들이 쓴 텍스트 두 권을 떠올린다. 마루야마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가 생각나는 건 당연한 것이고, 가라타니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그것이다. 특히나 후자와 함께 리우의 책은 나와 같은 서구근대문학 연구자들이 망각하기 쉬운 근대문학의 특정한 계기들을, 다른 무엇보다도 '특정한' 언어와 글쓰기ecriture의 탄생/발명을 떠올리게 만든다. 내가 Wordsworth의 "Preface"를 읽으면서 그 텍스트를 근대문학발명의 한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가라타니를 읽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단순히 동아시아권에 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근대문학연구자들은 동아시아의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를 섭취할 필요가 있다; 번역을 통한 근대, 다른 무엇보다 '압축된 근대'의 해부를 통해서 비로소 선명해지는 근대문학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선의 날카로움과 이론적 생명력에 있어서는 솔직히 가라타니의 텍스트가 갖는 힘이 리우의 것보다 좀 더 크다(후자는 다만 거의 20년 뒤의 텍스트이니만큼 문학연구에 폭넓게 수용된 다양한 분야들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전자에 우위를 갖는다). 이는 부분적으로 리우가 역사가로서의 문학연구자란 위치에 있다면 가라타니는 역사의 비평가로서 그 책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추상의 날카로움, 근대적 시선의 범주 자체를 문제삼는 힘은 적어도 리우의 95년 연구서에서는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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