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 학위논문 작업 시작

Comment 2020. 8. 6. 22:00

[8월 4일 페이스북에 쓴 글]


지난 주부터 박사학위논문 초고를 정말로 쓰기 시작했다. 1부 1장 1절을--전체 구상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2부 8장 정도로 계획 중이며, 1부 1장은 총 3개의 절로 구성될 것 같다--5/8 정도 썼는데 벌써 A4 20쪽째라, 늘 그렇듯 처음 구상보다 꽤 긴 글이 되겠다는 것만 예상하고 있다. 맨 처음 부분의 분량이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첫째는 1절이 1670년대 잉글랜드에서 나온 네 편의 텍스트를 요약정리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러한 텍스트들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게 1부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하게 말하자면, 1부의 목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여성 및 남성을 위한 규범의 언어가 어떻게 나타나며 또 재구성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두 성에 관련된 담론에 나타난 변화의 크기는 같은 시기 영국이 맞이한 거대한 정치적·사회적 격변들에 그렇게 모자라지 않는 것이었다. 부분적으로는 17세기 중반 이래 두 차례 내전으로 촉발된 혼란에 마주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프랑스·이탈리아로부터 번역된 다양한 지침서·교육서의 유통과 맞물려, 그리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이 야만적인 '중세'와는 다른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예컨대, 특히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저작에서 언급되듯, 여성의 지위가 곧 문명의 발전 척도를 보여준다는--믿음에 의하여 잉글랜드의 여러 저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습속(manners)과 도덕(morals)에 대대적인 개혁(Reform)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그러한 주장은 여성·남성의 개혁에 요구되는 덕성과 품행을 제법 상세히 검토하고 제시하는 저작들을 낳았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 품행과 도덕을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풍부한 고찰의 영역으로 공간화했다.


근대적인 클리셰의 함정을 피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논변들이 단순히 더 많은 억압과 금지를 부과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직시할 수 있다. 푸코의 후기 저작에서 종종 언급되듯, 누군가를 도덕적 주체로 다루기 위해서는 해당 주체가 어떤 (도덕적인·사회적인) 역량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와 대면해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이 남성과 (적어도 과거보다는 더) 평등한 위상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여성이 지금까지의 억압과 학대를 풀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잠재성을 전면적으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는 그저 사회의 도덕과 안녕을 다시 확보하는 길을 찾고자 했고, 누군가는 만연한 여성폄하적 담론에 반격하고자 했다--각자의 입장이 무엇이었든,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여러 저자들은 (적어도 신사계급 이상에 속한) 여성이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교육받아야 하며 지금 주어진 것보다 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을 규정해온 기존의 담론을 논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에게 기존에 주어진 언어적 자원을 (경우에 따라서는 그 한계지점까지) 활용해야만 했으며, 자신들이 속한 시대에 공유되는 전제들에 (심지어 기존의 다른 전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기대야만 했다. 서로의 논리를 참조하고 필요하다면 앞뒤의 유기적인 연결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이는, 적어도 지금까지 보기에는 여성의 규범을 재구축하는 과제보다는 수월한 일이었던 것 같지만, '남자다움'(manliness)의 재구축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었던 사실이다.


오늘날의 기준에 맞춰 과거의 저자들이 얼마나 여성주의적이었는지(혹은 성평등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태도는 물론 그러한 언어와 논쟁의 결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지금 우리와 이용할 수 있는 언어적 자원이 너무나도 달랐던 세계의 사람을 상이한 기준에 맞춰 평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당연히도 거의 대부분의 문헌에서 기독교, 특히 잉글랜드국교회의 언어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한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과거인들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왜, 무엇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지,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마지막으로는 1740-50년대 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 중 한 명인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들이 그러한 언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혹은 그러한 언어적 전통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었는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게 내가 박사논문을 통해 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왜 논문의 시작지점에서부터 텍스트를 하나하나 풀어보면서 그것들이 무슨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어떠한 문제의식에서 쓰였는지를 드러내는 글을 길게 쓰고 있는--물론 그중 논문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대목이 몇이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이유다.


방법론적으로 나는 스스로의 작업을 언어맥락주의 지성사와 젠더 연구, 문학 연구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고자 한다. 내가 모델로 생각하는 연구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미셸 푸코의 작업, 특히 <성의 역사> 2-4권에서 푸코가 수행했던 역사적인 연구다(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성의 역사> 1권이 중요하게 읽히지만, 1권은 진지하게 역사연구의 모델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성해방 담론의 역사서술과 대결하는 논쟁적인 팸플릿이라고 보는 게 정확한 평가일 것이며, 푸코의 작업 중에서 학문적인 역사연구의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성의 역사> 2-4권이다). 고전 그리스 시대부터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시기까지를 다루는 이 저작들에서 푸코는 과거의 텍스트들을 파고들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도덕과 성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바로 그 시대의 언어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그런 점에서 해당 저작들은 (푸코 자신은 거의 인지하지 못했던) 지성사 연구와 아주 많은 지점이 겹친다. 다른 하나는 J. G. A. 포콕의 작업이다.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와 <야만과 종교>에서 포콕은 단순히 한 명의 저자, 하나의 저작이 어떤 언어적 맥락에 있었는지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여러 저작/저자가 공유했던, 혹은 특정한 언어장르의 실천과 쟁점이 무엇이었으며,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갔는가를 추적한다.


위 저작들을 대략이라도 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흐릿하게나마 와닿을 것이다. 1부는 초기 계몽주의가 꽃피웠던 수십 년 간 잉글랜드의 여성·남성 담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 그것들이 어떤 논쟁과 언어적 실천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를 (내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나마) 추적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2부는 리처드슨의 소설들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들을 가능한 섬세하게 뜯어보면서, 그러한 언어들이 앞서 1부에서 복원한 여성·남성 담론의 전통들을 어떻게 되풀이하고, 바꾸고, 선택하는지를, 나아가 그러한 선택들로부터 리처드슨의 소설 쓰기라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아주 궁극적으로, 나는 이 작업이 스스로에게, 아주 운이 좋다면 다른 연구자들에게, 단지 과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대에 성을 둘러싼 인식과 담론을 좀 더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연구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미국에서 만들어진 몇몇 '이론'을, 그 이론의 방법론적 토대조차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로, 성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실천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는 더 정확하고 상세한 연구의 시도를 해야 한다.


물론 앞으로 완성된 초고를 만들 기한으로 스스로가 설정해놓은 약 10개월 가까운 시간 속에서 실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가 봐야만 한다. 아직 찾아놓기만 하고 읽지 못한 문헌들도 많고, '어디에 무엇이 있겠지'란 막연한 감만을 가진 채 마주하지조차 못한--따라서 내 논지를 예기치 못하게 뒤바꾸기를 강요할--문헌들은 더 많다. 무엇보다 나의 기획이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포함해) 원고를 읽을 독자들에게 충분한 흥미와 설득력을 지닌 글이 될 수 있을지는 오로지 실제로 읽고 써낸 결과물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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