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한국어판 번역출간을 앞두고.

Intellectual History 2020. 3. 21. 22:27

오늘 아침 7시, 《지성사란 무엇인가?》의 (희망컨대) 마지막 수정원고를 보냈다. 분명 남아있는 오탈자나 표기오류가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조금 더 수정할 필요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용의 차원에서는 실질적으로 마지막 수정이 끝났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표지도, 부제도 정해진만큼 이번 4월 전반기 중 책이 실제로 출간될 때까지 내가 할 큰 작업은 거의 끝났다(물론 이제부터 열심히 홍보를 해야한다!). 지난 몇 주간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모든 일정이 취소된 김에 페이스북도 블로그도 쉬고 번역원고를 수정보완하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앞으로 지성사 연구 출판에 흥미를 갖는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좋은 연구는 정말 산처럼 많다) 출판사들이 나타날만큼은 팔릴 것인지는, 최근 인문출판계의 불황을 생각해보면 그닥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정말 지적으로 풍성하고 유익한, 잘 만든 책이 될 거라는 점에서만큼은 아주 확고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1.


나의 목표는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을 이미 지성사·(정치)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넘어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학구열이 있는 대학 학부생들까지도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재이자 입문서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능한 한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에게 번역원고를 보내고 의견을 청취하는, 다시 말해 번역과정을 일종의 집단적 작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당초 기대치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분들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기대 이상으로 성실한 코멘트를 보내주셨다. 


20명이 넘는, 2교 및 3교 수정과정에 국한해도 10명이 넘는 리뷰어들이 상당한 분량의 지적과 수정제안을 보내오면서 (놀랍게도 그 코멘트들은 거의 겹치지 않았다) 이미 2교 시점에서부터 '무리 없이 잘 읽힌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번역원고의 수정 폭은 나와 편집자가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예를 들면 조판본 본문이 200쪽 정도 분량이었던 3교에 달린 수정주석을 세어보면 1500개가 넘으며, 그걸 반영한 4교 조판본을 다시 고친 대목이 400군데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좋은 한국어로 옮겼는지 자신이 없는 대목은 있고, 고친 부분의 한국어 문장이 더 불분명한 느낌을 주는 듯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번역문이 이전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듬어졌음은 명확하다. 꽤 엄격한 기준을 가진 리뷰어들에게도 합격점을 받을 정도니까, 첫 번역서, 그것도 (비록 입문서라고 해도) 학술번역서를 내는 역자의 작업치고는 분명 꽤나 괜찮은 결과물일 거라 믿고 있다. 그냥 번역서로 그럭저럭 읽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어 학술행위로서 그 자체로 제법 괜찮은 결과물 말이다.



2.


두 번째로, 역시나 재밌고 유익한 교재·입문서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원저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친절한 책이 되었다. 분량만 따져봐도 한국어판은 한국어판 저자 서문을 포함해 원저의 약 4/3 정도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 원저는 이미 친절하고 재미있는 책이지만, 기본적으로 역사학에 훨씬 친숙한 영국의 학생들을 독자로 상정한 만큼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내용을 당연히 전제하고 넘어가는 대목이 있다. 한국어판 역자해제는 이런 부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개념부터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조금 더 쉬운 가이드 역할을 한다. (사실 역자 해제를 살짝 고쳐서 독립적인 학술논문으로 출판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교수급 리뷰어들에게만 세 번 정도 받았는데, 4월 초 정도까지 책을 내려는 일정 상 불가능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올 법한 예상질문들을, 그리고 실제로 리뷰 과정에서 나왔던 반론이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쓴 만큼 본문과 해제를 읽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5개가 넘는 본문 역주는--리뷰어들이 '이런 부분에 설명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제안한 대목은 거의 다 역주를 붙였다--왓모어가 사례로 드는 역사적·사상적·이론적 논의를 독자들이 대략이나마 하지만 정확하게 요점을 이해하며 따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자 했다. 그중에서는 연구자들이 지성사학계의 큰 흐름을 곧바로 붙잡을 수 있을만큼의 정리를 제공하는 것들도 제법 있다. 마지막으로 케임브리지(및 서섹스)학파의 주요 지성사가 여섯 명, J. G. A. 포콕, 퀜틴 스키너, 존 던, 이슈트반 혼트, 도널드 윈치, 리처드 턱에 관해 주요 이력과 연구사에서의 위치, 주저를 소개하는 각각 1쪽 정도 분량의 약전도 덧붙였다. 역자해제, 역주, 지성사가 소개에 담긴 내용 중 상당수는 (애초에 《지성사란 무엇인가?》 본문에 소개되는 내용 대부분도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바 내에서는 한국어로 제대로 소개가 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해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방법론의 안내에서든, 18세기 및 근대 지성사 연구 안내에 있어서든 적어도 앞으로 수 년 간 한국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3.


이 부분은 출판사 오월의봄 및 편집에 맡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야 할 대목이지만,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은 내용 외 책의 물질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적어도 비판적인 사고와 지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표지 디자인 컨셉을 제안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20대 및 학부생들이 일상적으로 들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만큼 예쁘고 세련된 표지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만 답했다. 내 의견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어차피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문맹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니 고려되지 않아도 크게 문제는 없다--내 상상력의 범위를 뛰어넘어 정말 멋진 표지가 나온 것은 분명하다. 원저의 밋밋한 표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수준이며, 표지 후보를 본 여러 사람들 모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 말해둔다(개인적으로는 최종 결정에서 탈락한 표지 또한 따로 프린트해서 보관하고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교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의도한 책이니만큼 가격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낮추고자 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소위 '학술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어차피 소수의 독자들만 사볼 가능성이 높기에 일정 범위 이상의 가격을 매기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을 느끼면서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우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지성사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게 한국의 학술장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에도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믿는다. 물론 역주 및 (역시 한국어판에 새롭게 수록될) 일러스트가 어느 정도 분량을 늘릴지에 따라 변동이 있겠지만, 어느 리뷰어의 표현을 옮기면, "이 정도 부피와 수고가 들어간 책이라면" 절대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범위 내에서 가격이 정해질 예정이다.



4.


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번역수정 후반부 작업에 몰입하는 동안 쉬는 시간에 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변광배, 김중현 역, 그린비, 2019)를 읽었다. 직접적으로 데리다의 언어와 사상을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 데리다가 매 시기 누구와 어떤 지적·인간적인 교류를 주고 받았으며 무슨 맥락을 염두에 두었는지를 상세하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데리다가 살았던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무척 재밌게 읽힌다(확실한 건 20세기 중후반 '프랑스철학'이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떨칠 때조차도 그것은 전혀 동질적인, 단일한 공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매우 사적인 감상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 번역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종종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제 박사논문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내게, 약간의 농담어린 과장을 섞는 게 허용된다면, 굳이 말하자면 20세기 중반 프랑스대학의 인문학 박사들이 써야했던 부논문에 가까운 느낌이다. 실제로 나는 나 자신의 명확한 문제의식을 갖고 이 책을 번역했고, 제법 상세한 주석과 해설도 덧붙였다.


모든 지적인 활동이 아직도 기나긴 겨울에 묶여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2020년 4월, 《지성사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뿐히 다가오는 봄과 같이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종종 홍보를 하면서) 박사논문작업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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