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법: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서평)

Reading 2019. 8. 6. 01:07

아래는 올 9월에 출간될 『학산문학』 105호(2019년 가을호)에 실릴 서평으로, 얼마 전 출간된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년 4월)을 다룬다. 서두에서 명시적으로 밝혔듯 나는 이 책이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비평계의 중요한 주제였던 '문학과 정치' 논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특히 방법론과 수사학적 전략의 차원에서 드러내고자 했다. 나는 이 문제가 다수의 독자들이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 문학비평사를--좀 더 포괄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지적 논쟁을--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꼭 나의 독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제기한 물음이 많은 독자들이 이 흥미롭고 중요한 책을 더욱 풍성하게 읽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특히나 지금 여기에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그렇게 읽히고 논의될 가치가 있다. 책과 서평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는 언제든 환영이다.


[2019년 10월 12일 덧붙임: 출판된 버전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실 수 있겠다(https://bit.ly/31abC7c).]





문학을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법: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년 4월)


2010년대 후반의 한국문학·문화비평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인물이 2016년 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이하 「종말」) 이래의 오혜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1) 2010년대 중반 이래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페미니즘이 한국문학장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면, 오혜진의 「종말」은 그를 위한 선명한 강령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한국문학·비평이 기존의 ‘개저씨’다움과 결별하고 20-30대 여성독자층의 미적·정치적 감각에 부합하는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종말」이 초래한 논쟁과 충격 이후 그는 연구자·비평가로서만이 아니라 기획자·안내자로서도 한국문학·문화장에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공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2) 2013년 가을부터 2019년 초까지 출간 및 집필된 33편의 글을 수록해 출간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하 『취향』) 또한 여러 상세한 인터뷰기사에서 볼 수 있듯 지금 가장 주목받는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의 평론집으로 읽히고 있다. 그리고 본 서평의 목적은 정확히 그러한 시선으로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취향』이 여성주의적 문학·문화비평을 실천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겨냥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떤 저작·저자에 여성주의라는 이름표가 붙을 때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관습적인 구별 자체에 있다. 어떤 학술·담론분야에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이 성장하고 안착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거부당하고 무시되던 여성주의자들이 일단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었을 때, 기존의 주류가 여기에 대처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성주의의 독립된 영역을 인정한 뒤 그것을 일종의 고립되고 폐쇄된 게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토와 (보통은 기존의 주류들로 구성된) 나머지 영역은 그저 공존할 뿐 그 사이에 어떠한 간섭도 교류도 없기에, 설령 어느 한쪽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도 다른 쪽에서 그러한 물음을 통해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이란 명칭이 특히 『취향』과 같이 다양한 논점을 건드리는 텍스트의 맥락을 보다 축소하고 제한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앞질러 차단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가 곳곳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듯, 『취향』의 페미니스트 문학론은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의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었다. 이는 이전의 문학·문화정치적 논변을 이해할 때 저자가 이를 어떠한 방향으로 갱신하고자 했는지를 더욱 잘 알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나는 본 서평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장에서 전개된 ‘문학과 정치’ 관련 논의를 거친 수준에서나마 짚어보고, 이어 그러한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오혜진의 이론적 입장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제시하는 페미니스트·소수자문학론이 전술한 입장을 포함해 다양한 수사적 전략을 어떻게 활용하고 또 그를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읽을 것이다.



1. 문학과 정치, 2006~2013: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시와 정치’ 논쟁까지


가라타니 고진은 2006년 번역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역, 도서출판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역으로 끊임없이 지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짐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종교·도덕에 대하여 ‘시의 옹호’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문학에 맞서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은 현대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종교와 문학’이나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는 문학이 단순한 오락에서 승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도 문학의 옹호는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으로도 보이지만, (제도화된)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보여준다는 식이었습니다. [...]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나는 애당초 문학에서 무리하게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해 문학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근대문학을 만든 소설이라는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어서, 이미 그 역할을 완전히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52-53).


요컨대 근대소설과 같은 문학장르는 “문학보다 더 큰” 윤리·정치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 “근대문학”으로서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었으며, 그러한 과제를 더 이상 짊어지지 않게 된 지금 그 실질적인 의의 또한 끝났다―이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이른바 ‘근대문학 종언론’의 핵심이다. 근대문학 종언론은 가라타니가 1980년대 중반 『탐구』로부터, 그리고 2001년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해온 고유의 정치철학이라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3) 하지만 가라타니의 이론적 논의를 숙독하지 않은 독자라 할지라도 (종종 당황스러운 오독을 통해서라도) 근대문학 종언론으로부터 모종의 충격을 받기는 어렵지 않았던 듯 보인다. 가라타니의 저작은 故 김윤식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표절사건에서도 나타나듯 한국 근현대문학연구에 영향을 끼쳐왔으며, 『근대문학의 종언』이 출간된 시점에 오면 한국 문예비평에 그 핵심적인 언어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실제로 본 서평에서 언급하는 거의 모든 저자들은 직간접적으로 가라타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민족문학론을 위시한 한국의 문학정치론은 애초에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의 골격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의 문학론과 동형의 논리적 구조를 지녔기에 그의 선언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4)만약 가라타니의 주장대로 오늘날 근대문학이 더욱 커다란 정치적·윤리적 과제와 연결될 수 없게 되었다면, 리얼리즘론 등 한국 문학정치론에서 문학에 부여해온 실천적 의의 또한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문학을 사회비판적인 앎 혹은 보다 고차적인 영역으로 정당화해주는 원천과 문학 사이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선언을 한국 문학비평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중 이후의 한국 문학계에서도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게 되는 두 저자의 논의만 간략하게 훑어보자. 『근대문학의 종언』 한국어판 출간과 같은 해 겨울 발표된 「몰락의 에티카―21세기 문학 사용법」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대응방식은 ‘문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외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가라타니의 주장에서 정치와 윤리가 문학을 정당화해준다고 할 때, 신형철은 “그[가라타니]가 말하는 윤리(도덕)는 대문자 정치에 복속된 윤리”에 가까우며, “거시 전장에서 ‘대문자 정치’와 제휴하는 윤리는 더 이상 문학의 몫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미시 전장에서 ‘마이너리티의 욕망’과 암약하는 문학은 여전히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5) 요컨대 기존 근대문학이 추구한 ‘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영역이 있다면, 이제는 거기에 있는 “진실”을 대면하는 ‘윤리적’ 태도가 문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었다. 문화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홍중은 2009년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에서 두 가지 논리를 통해 가라타니를 비판하고자 했다.6) 글의 III-IV절이 근대문학 자체의 구조적 부정성을 규정하는 담론들을 검토하며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IV-V절은 김홍중 본인의 핵심테제인 ‘진정성의 종언론’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이 87년 이후의 한국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진정성의 윤리 자체가 종언을 맞이한 데서 파생되는 현상 중 하나라고 말한다. 첫 번째 반론이 자신이 말하는 “근대문학”이 무엇인지 이미 규정하고 출발하는 가라타니의 주장에 대한 유효한 응답이 되기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김홍중은 사실상 가라타니의 입장과 공명하는 서사를 제출했다고 할 수 있다―“문학과 비판적 지식체계는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말이다(133).

우리는 두 저자의 ‘반론’에서 이후 10년 간 여러 문학평론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짚어야 할 점은 가라타니의 핵심테제는 사실상 반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문학이 과거와 같이 거시적인 정치에서 유의미한 위상을 보유하는 것은 적어도 새로운 세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물론 여전히 문학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의 입장은 시와 정치 논쟁 및 이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수 없었다).7)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곧 정반대의 주장, 문학은 이제 완전히 자율적인 미적·오락적 영역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승인으로 간 것 또한 아니었다(그러한 주장 또한 그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와 정치 논쟁에서 그다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신형철의 경우에서처럼 미시적인 정치로 작용하는 윤리의 담지자로서든, 김홍중의 경우에서처럼 “타인들과의 연대를 상상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주체와 그런 주체들이 구성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치의 역할”로서든,8) (근대)문학의 사회적 의미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외적 준거, 혹은 문학이 사회적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는 당위는 여전히 요구되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상기한 논의가 상당부분 프랑스철학·급진좌파사상에서 발원해 미국 영문학·문화연구·비교문학계 등을 통해 형성·유포된 ‘이론’의 언어로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미국 영문학계의 1990년대-2000년대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주체·타자·윤리·공동체 등의 개념들과 이를 핵심개념으로 삼는 ‘타자의 윤리학’과 같은 서사, 그리고 여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전거로 라캉·레비나스·데리다 등의 고유명을 활용하는 글쓰기가 한국의 문학연구·비평계에서도 하나의 표준적인 틀로―곧이어 지루하고 생기없는 클리셰로―자리 잡아가는 2000년대의 한 광경을 보게 된다.

확실한 사실은, 특히 2008년도 이래 이명박정권 하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 속에서, 문학이 ‘정치’를 다시 전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의 문제제기로 출발한 ‘시와 정치’ 논쟁은 이러한 요구를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문학 종언론이 열어놓은 자장의 맥락 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많은 논자들이 참여한 당시의 논쟁을 개괄하는 대신 그 중심부에 있던 진은영의 요점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9)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면, 즉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한편으로는 예술 혹은 미적인 활동이 단순히 기존 사회참여의 양식을 그대로 반복할 수 없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와 전적으로 무관한 자율적인 영역에 놓이는 것에서 만족할 수도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10) 대립되는 두 명제 사이에서 진은영이 제시한 돌파구는 예술 고유의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정의하는 길이었다. 그는 자크 랑시에르의 구도를 가져와 “우리가 통념적으로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은 [...] 치안의 활동”으로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행위일 뿐, 진정한 “정치는 이러한 합의 체제 안에서 권력을 점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합의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분배의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미학의 정치는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이 감각적 영역 전체에 작동하는 기존의 분배 방식에 대하여 불일치의 견해를 제기하고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구별에 따르자면 가라타니가 제기했던 문학(혹은 예술)과 대문자 정치와의 결별은 그저 (진정한 정치가 아닌) “치안”과의 분리일 따름이기에 예술은 ‘진정한’ 정치와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정치’를 이론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을 통해 문학·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되살리자는 진은영의 제안은 그 세부사항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한국 비평계에 무척 매력적인 선택지였으며, 실제로 여러 평자들은 각자 정치의 개념을 선험적으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12) 이러한 시도의 이론적 함의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이론적 원천으로 동원된 서구 사상가들이 어떤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시와 정치 논쟁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이론가들, 대표적으로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은 모두 서유럽의 좌파 급진주의 정치철학자로 이해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퇴조 이후 좌파 급진주의자들은 대문자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으며, 그에 따라 이들의 사상적 경로는 보다 급진적이고 추상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기존의 정치적 영역을 “치안”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공식적인 정치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고 매우 추상적으로 묘사되는) ‘진정한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랑시에르의 구도는 정확히 그러한 사례에 부합한다. 민중주의적 전통의 무력화와 함께 대문자 정치와의 연관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한국의 문학정치론이 서구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궤도를 참조하게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론적 정당화 작업에 최소한 두 가지 난점이 따른다는 사실만 짚어두자. 먼저 기존의 정치와 구별되는 문학·예술 고유의 (진정한) 정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후자를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나 이를 통한 공동체의 (재)구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지나치게 모호하다.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자체는 모든 텍스트가 제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는 밀도 있는 문학정치적 논변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 더욱 문제적인 것으로 치안과 구별되는 ‘진정한’ 정치를 설정하고자 하는 (급진주의적 사유 특유의) 암묵적인 규범적 욕망은 반대로 정치를 지나치게 협소한 개념으로 만들어 정작 개별 텍스트에 내포된 여러 정치적 측면을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이는 역설적으로 ‘정치’를 현재의 사회·체제 바깥으로 탈출한 은거자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2009년의 어느 좌담에서 신형철이 “문학의 정치”가 도대체 어떤 정치냐고 질문했을 때, 정치 개념의 규정이 문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미 분명히 인지되고 있었으며 이 상황은 논쟁의 끝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듯 보인다.13) 시와 정치 논쟁은 문학에 고유한 정치적 범주를 만들고자 했으나, 그러한 범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또 그로부터 어떠한 비평적 모델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2. 취향, 시민, 공동체: 오혜진의 문학정치론


『취향』에 수록된 거의 모든 글에서 오혜진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는 특정한 문학·비평담론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별화되어 있는지, 혹은 어떠한 성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지적하는 데 있다. 여전히 많은 발화자들이 스스로의 “정상성”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할 때, 즉 자신들의 담론에 특정한 방식의 관습화된 성적 위계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 자체를 성찰하지 않고 있다고 할 때, 이러한 상황을 지적하고 또 그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는 ‘맹목’을 겨냥하는 ‘비판’이라는 여성주의자들의 고전적인 수사 전략을 택한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설령 그가 퀴어·소수자 정치라는 지향점을 명확히 노정하고 있음을 덧붙인다 할지라도, 이미 페미니스트·젠더비평적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들이라면―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독자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오혜진의 글에서 별다르게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관건은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때로는 그 이상으로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 오혜진의 글을 주의깊게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 꼽는다면, 내 생각에 이는 그가 여성주의적 읽기에 공감하는 독자들 혹은 그에 반대하는 독자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의들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모두가 자신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페미니스트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활용하는 사유의 모델과 방법에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시와 정치’ 논쟁에서 (정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회전”을 되풀이했던 지점, 즉 (문학의) 정치를 어떻게 추상적 이념에서 머무르지 않는 구체적인 현실로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오혜진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4) 먼저 주의할 점으로, 「‘그날’ 이후의 서정시와 ‘망막적인 것’」과 같은 글에서처럼 ‘시와 정치’ 논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취향』 477), 『취향』은 해당 논쟁에 답하는 이론적인 논변을 직접적으로 수행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문학정치론을 곧바로 물을 필요가 있다.

『취향』의 서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문학적) “취향”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흥미롭게도 또는 당혹스럽게도 저자는 책 어디에서도 자신이 해당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신의 문학적 취향이] 다른 많은 ‘문학적 취향’들과의 치열한 경합 및 각축을 통해 이루어졌고, 내 ‘취향’ 역시 다시 한 번 그 경합의 장에 놓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단어가 특정한 이론적 건축물을 염두에 둔 개념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12). 「종말」의 보다 상세한 진술을 보자.


“특정 주체에 의해 관리·통제되는 이념적 실체로서의 단일하고 동질적인 한국문학을 부정하는 것과, 한국문학의 존재방식, 즉 한국문학이 처한 물적 토대 및 공공의 사회적 담론양식으로 기능해온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는 ‘국민성’이라는 것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나라 국민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은 엄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문학/비평은 바로 그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그것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공통감각을 창출·갱신해나가는 사회담론의 한 양식이다”(『취향』 96-97).


“문학이 일종의 ‘취향공동체’로, 비평은 ‘취향의 정당화’ 문제로 수렴된 것이 벌써 오래전이다. 어쩌면 “나”와 “판이한 판단”의 주체들은 서로의 비평을 ‘주례사비평’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은 답이 없는 싸움. 이들은 오직 ‘취향’의 영역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독서 취향과 감식안, 공동체에 대한 비전인지를 겨뤄볼 수 있을 뿐이다. [...] 그러나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각자의 취향을 형성하고, 타인의 취향과 다툰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만은 아니다. ‘취향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세계관을 높은 강도로 부딪쳐야 하고, 무엇보다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계몽 또는 운동으로서의 문학’과 같은 지난날의 문학관과 비평적 자원들도 모두 학습·활용해야 한다. [...] 21세기의 비평은 ‘취향’을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로 사유하고, 이곳에서 포스트-포스트모던의 문학주체들이 펼치는 문화정치와 인식 및 교양의 갱신을 면밀히 주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같은 책 99-100).


인용한 내용의 논리를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문학/비평은 한국사회의 “공통감각”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재)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과거에는 이 과정이 소수의 지도적인 문인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권위를 독점하는 주체가 없는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주체들의 “독서 취향, 감식안,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포함하는 취향 투쟁을 통해 진행된다. 이때 취향 투쟁은 한편으로 “서로의 세계관을 높은 강도로 부딪쳐야 하는” 일이자 과거의 비평적 자원들, 다른 문학주체들의 “인식 및 교양”까지도 살피고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노력을 요구하는 행위다. 비평은 이처럼 특정한 사유와 감각이 공통감각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한 행위이며 취향은 그것의 핵심적인 매체다. 그것들은 공통의 인식과 규범을 설정하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또 (『취향』 서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가 목표로 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발명”하기 위해 요구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12).

내가 오혜진이 주장하는 취향의 정치론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그의 논의가 시민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사회이론적 모델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종말」 출간 직후의 대담에서 그는 자신의 논의가 “‘민중·국민·대중·군중’ 같은, 과도하게 이데올로기화되거나 탈정치화된 표상으로 환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시민’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으며, 이때 시민은 “공통의 사회적·역사적 자원을 활용해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공동체의 비전을 형성·갱신해나가는 주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15) 여기서 그의 정치론이 의식적으로 과거 좌우파가 상정한 민중주의·국가주의 등의 논리를 피해 보다 공동체주의적·공화주의적 입장에 가까운 사회모델을 채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는 전통을 공유하는 동등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서로 다르지만 동등한 시민들은 다시 서로 간의 의사소통·논쟁을 통해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변형시켜 나간다. 시민들 간의 의사소통에 기초한 공통감각·규범의 형성이라는 면에서 문학/비평의 영역은 일종의 공론장으로 사고된다(물론 여기에 하버마스적인 합리성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1절의 마지막에서 언급했듯, 근대문학 종언론의 충격 이후 문학과 정치를 다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은 ‘시와 정치’ 논쟁에서 문학·예술을 통해 수행되는 고유한 영역의 정치 개념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유럽좌파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전유를 통해 시도되었던 ‘정치’의 개념규정은 특정한 문학적 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분석으로 나아가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협소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오혜진의 문학정치론은,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전의 문학과 정치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돌파할 수 있다. 먼저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민사회의 담론투쟁 모델에 기초한 취향 투쟁의 문학정치론은 문학·비평작업을 구성하는 담론들이 다른 담론들과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기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문학의 정치를 실제로 논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다음으로, 대문자 정치 혹은 체제유지적인 행위와 그 바깥에 있는 진정한 정치의 구별에 따라 정치를 체제 바깥의 것으로 표상하고 또 그에 규범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급진주의적 모델과 달리, 보다 가치중립적인―적어도 가치중립성을 지향하는―개념들의 채택은 정치 개념에 선험적인 규범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체제 내외부의 구별에 따르는 불필요한 곤란함을 피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오혜진의 비평모델은 역사학·사회학에서 요구되는 학문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문학의 정치를 보다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행위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한다. 이와 같은 문학정치론의 이론적 갱신이 저자 자신의 취향 투쟁을 위해 어떤 전략들을 가능하게 해주는지는 다음 절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3. 페미니스트 취향 투쟁의 수사와 서사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은 투쟁의 상대가 누구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취향』의 첫 번째 평론으로 위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제 “천명관과 정유정에 대한 비평이 말해주는 몇 가지 것들”에서 곧바로 알 수 있듯, 글이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두 소설가의 작품 자체라기보다는 해당 텍스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특정한 관점 자체에 있다. 먼저 “장편소설론”(의 욕망)에 입각한 2000년대의 한국비평계가 천명관과 정유정을 “이야기꾼”으로 호명했던 정황을 지적한 뒤(28) 오혜진은 한국문학에서 “이야기꾼”을 사용해온 용법에 어떠한 문화정치적 감각이 내재해 있는가를 설명한다. “이야기꾼”은 한편으로 “근대화·산업화·신자유주의화로 치닫는 역사 진행 속에서 [...] 아직 훼손되지 않은 공동체를 상기시키는 아련한 표상”이지만, 동시에 “‘상스러운’ 말투와 유머들”을 통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어떤 구애도 받지 않은 채 여성·성소수자·장애인·저학력자·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비하, 조롱 등을 무람없이 할 수 있었던 ‘민주화 이전’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31). 덧붙여 이들에게 “1980년대 리얼리즘 미학”에 복무하라는 요구가 함께 주어졌음을 지적하면서(35) 요점은 분명해진다: 2000년대 한국비평계의 지배적인 ‘문학적 취향’은 여전히 1980년대의 (남성중심적) 민중주의 미학을 희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취향이 1990년대부터의 ‘여성적’ 문학 취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서사화하는지를 짚는다(우리는 이 책에서 ‘취향’의 탐색이 단순한 선호의 인식을 넘어 특정한 선호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역사적 서사화에 대한 검토까지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문학계에서 ‘여성적’ 가치라고 젠더화된 요소들”인 “‘내면성’과 ‘고백의 양식’ 등으로 지칭되는 ‘1990년대 문학’의 특징들을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이야기꾼’적 감각이 “지극히 평범한 전통”에 속한다는 천명관의 주장과(38), 정유정의 스토리텔링과 대비하면서 “자기고백”에 빠진 한국소설의 “결핍”, 즉 “‘여성적인 것’으로 젠더화된 ‘1990년대 문학’과 그 후예인 ‘2000년대 문학’”을 폄하하는 비평적 평가에 대한 검토를 보자(45). 이를 통해 오혜진은 1980년대적인 것을 정상규범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단순히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이후의 취향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취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16)

1980년대적인 것과 다른, ‘2010년대적인’ 것으로서의 페미니스트 문학 취향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가? 『취향』의 3부와 4부가 각각 여성서사와 퀴어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앞의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면, 1부의 「종말」 및 「혐오의 시대, 한국문학의 행방」은 새로운 문학적·비평적 취향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글로 이해될 수 있다. 「종말」은 신경숙 사태로 인해 다시 제기된 문학권력론이 실제로는 1980년대적인 것을 복권하려는 취향에 따라 “1990~2000년대 문학사의 젠더화와 타자화를 통해 586세대의 노스탤지어와 정통성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는 비판으로 시작한다(91). 1980년대적 취향의 귀환에 대항해 오혜진이 먼저 제시하는 수사적 전략은 “현재 상황은 [1980년대적인 문학비평이 여전히 자임하는] 계몽주의가 시대정신으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해온 과거와 그 사회적·문화적 조건이 전혀 다르다”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 과거와 현재의 시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 즉 역사적 조건이라는 항목을 논쟁에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각각의 시대가 가진 조건 및 그에 부합하는 전략이 서로 다르기에 한 시대에 통용되었던 규범이 다른 시대에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다른 오늘날은 어떠한 시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오혜진의 답변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듯싶다. 하나, 문학장은 비평가의 권위가 대중을 계도하는 수직적 구조에서 (적어도 누군가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주장할 수는 없는) 동등한 취향들이 공존하는 수평적 구조로 바뀌었다(96-100). 둘, 고유의 “정치적·문화적 교양”을 지닌 “20~30대 여성독자들”이 문학장의 주 소비집단임이 명확해졌다(특히 109쪽의 표). 셋, 웹툰·웹소설의 대두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문학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장르들의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오혜진은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를 지각하지 못한 “‘이성애자-선주민-비장애-남성-지식인’들의 문학(사)은 이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산적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유물이거나 시대착오적 양식”으로 전락했으며, “현재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비평을 기각한 이유”가 여전히 그러한 1980년대적인 취향이 한국문학장의 우세종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04).

바로 다음에 배치된 「혐오의 시대, 한국문학의 행방」은 「종말」의 문제의식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조건에 부합하는 문학/비평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되었던 사항 중 두 가지, 즉 20~30대 여성독자층의 중요성 및 새로운 (디지털)미디어의 확산을 짚은 뒤에 저자는 이제 한국문학이 “타자화 없이 가능한 재현의 윤리와 문법을 계발하려는 노력”을 수행해야 하며, 여기에는 “기존의 변혁적인 문학실험 전통의 리뉴얼 혹은 재활성화와 함께, 지금까지 충분히 시도되지 못한 ‘시민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소수자’를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적 실험”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7). 앞서 말했듯 오혜진의 문학정치론이 시민-공동체를 핵심적인 축으로 하는 사회모델에 기반하고 있다면, 새로운 시대의 문학정치에는 기존에 ‘정상적인’ 시민=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던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에게 시민권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재구축할 책임이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17)이러한 입장은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와 소수자 정치가 공존하는 지점 어딘가에 있으며, 따라서 저자가 2부의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에서 페미니즘 문학과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비문학적인 요구로 간주하며 새로운 페미니즘 소설/비평의 문제제기를 거부하려는 ‘문학주의자’들을 비판하고자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올바름·정체성 정치를 물신화한다는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양방향의 움직임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로 흥미로운 이유는 다름 아닌 저자 본인이 정치적 올바름과 새로운 문학의 관계에 관해 아직 충분히 명료한 입장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는 균열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공동체와 시민의 범위를 확장하고 소수자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다원주의적 문화정치에서 중요한 전술로 활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다원주의를 자유주의적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라고 규탄하는 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적 전통 또한 여성주의·퀴어 정치론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이 더 깊게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작 『미지의 세계』를 다룬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의 미러링: 이자혜의 <미지의 세계>(레진코믹스, 2014~2016)」와 같은 글들은 후자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텍스트 읽기를 통해 적용해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다만 나는 이 텍스트에서 “급진적 주체화 가능성”[358]을 탐색하려는 시도에는 다소 회의적이다).18) 양자 사이의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저자가 어떠한 입장을 채택할 것인지, 또 어떠한 수사적 자원을 발굴해낼 것인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



4. 맺음말


본 서평은 『취향』이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장 내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두고 제기되어 온 중요한 논쟁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저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둘 때 더 풍부하고 생산적인 읽기가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페미니즘의 렌즈를 통해 기존의 한국문학을 비판/비난하고자 한다’는 식의 요약은, 설령 그 자체는 틀리지 않다고 할지라도, 『취향』이 저자 본인이 여러 차례 강조하듯 단순히 이전의 전통의 시대착오적 지점을 짚어내는 일을 넘어 과거에 제기되었던 중요한 물음들을 숙고하고 여기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는 페미니스트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오혜진은 200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문학과 정치 논의를 문학비평의 방법과 사회·정치의 이론적 모델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형태로 다시 벼리고자 했으며, 그러한 방법에 기초할 때 보다 정교하고 실천적인 비평적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저자 스스로가 본인이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고 소개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책 앞날개, 강조는 인용자). 책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따라서 꼼꼼한 독서를 요구하는 1부와 2부의 글들은 추상적인 ‘이론’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텍스트와 담론의 움직임을 맥락화할 때 더 깊이 곱씹을만한 비평적 사유가 전개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19) 어쨌든 지난 10년 간 풍성했던 ‘이론’에 대한 요구에 반비례하듯이 ‘방법’에 대한 엄밀한 숙고는 빈약했음이 사실이기에, 나는 한국문학연구·비평계가 이 책의 교훈을 좀 더 주의 깊게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이는 『취향』의 독자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페미니스트 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1)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85(2016): 83-105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80-117에 재수록). 당시의 반응·논평 중 일부로는 박인성·오혜진·이우창·황현경·강동호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2016년 가을): 46-101 을 참조.


2) 그러한 기획의 결과물 중 하나로는 오혜진 기획, 권보드래 등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을 보라. 이 책에 대한 나의 논평으로는 이우창,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쓰기(들): 『대한민국 독서사』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학산문학』 102(2018): 292-317 에서 특히 3절을 보라.


3) 대표적으로 근대문학이 근대국가의 국민(nation) 형성과정이나 다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상상력처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상황은 그의 ‘교환양식론’에서 호수제=국민형성의 원리와 X=어소시에이션이즘의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까다로운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개정 정본판, 박유하 역, 도서출판b, 2010에 수록된 여러 후기들은 가라타니 본인의 이론체계가 정립되어 가면서 그가 근대문학에 부여하는 의의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4) 민족문학론의 정치사상적 논리에 관한 간략한 요약으로는 이우창,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 민족문학론에서 반민주주의론까지, 1989-2017」, 『코기토』 83(2017): 58-116, 특히 64-69 를 참고.


5)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7-18.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글로 같은 책의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특히 163 을 보라. 오늘날 『몰락의 에티카』를 다시 읽어본다면,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한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급진좌파 철학이 미국을 거치며 ‘이론’이 되어 한국 비평계에 유입되고 있는 2000년대 중후반의 흥미로운 광경을 발견하게 된다.


6) 김홍중,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05-33.


7)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87년 군부독재정권의 명시적인 종말 이후 점차 거시정치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도덕주의적 서사로 규정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이 정치를 다루어온 가장 전통적이고 강력한 문법이 도덕의 언어라면, 정치가 도덕적 언어를 통해 해석되기 어려워질수록 그러한 문법의 활용 역시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가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근대정치’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정치로부터 도덕주의적 언어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가령 이우창, 「도덕정치의 수사 혹은 반정치적 맹목: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조기숙, 『왕따의 정치학』」, 『학산문학』 97(2017 가을): 337-54 을 보라.


8) 김홍중,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129.


9) 논쟁의 구도에 대한 대략적인 개괄로는 이찬, 「2000년대 한국문학 비평의 첨예한 성좌들: “미래파”와 “정치시”를 중심으로」, 『실천문학』 98(2010년 여름): 346-68 을 보라. 논쟁에 참여한 주요 문건의 목록으로는 정한아,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시와 정치’ 논쟁에 대한 프래그머틱한 부기(附記)」,      『상허학보』 35(2012): 177-209 중 182-84 의 각주 8과 9를 참조.


10)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원문은 2008년 출판).


11)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 같은 책, 75-77(원문은 2009년).


12) 앞서 언급한 정한아의 글 이외에 몇 가지 예로,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 비평』 147(2010년 봄): 369-86; 백지은, 「“문학과 정치” 담론의 행방: 2000년대 중후반의 비평 담론을 중심으로」, 『비평문학』 36(2010): 103-27 등을 보라. 백지은의 글은 명시적으로 가라타니의 문제제기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13) 심보선·서동욱·김행숙·신형철,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동네』 58(2009 봄): 363-94, 특히 386-90.


14) 정한아가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운동’과 대비되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캠페인’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확히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


15) 박인성·오혜진·이우창·황현경·강동호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96.


16) 『취향』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글로는 대표적으로 2부의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신자유주의시대 이후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문법과 정치적 임계」 및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와 ‘형제들’의 혁명」, 3부의 「집 떠난 뒤, ‘고독의 시간’을 지내는 방법: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동네, 2014)」 등을 보라.


17) 물론 오혜진이 추구하는 소수자 정치는 앞서 언급한 신형철의 ‘문학의 윤리’와 유사한 지향점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양자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18) 내가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에 갖는 불만 중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다루면서 후지이 다케시와 정희진이라는 상당히 불충분한 레퍼런스를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데 있다. 내 생각에 저자와 같이 시민, 공동체, 다원주의 문제를 더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대륙철학에 기반한 급진주의 정치철학의 전통보다는 차라리 20세기 후반 영미권에서 자유주의를 두고 전개된 정치철학·지성사 논의가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쪽 분야에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으로는 비록 전혀 충분하지 않지만 나카마사 마사키, 『현대 미국 사상: 자유주의의 모험』, 송태욱 역, 을유문화사, 2012 및 이우창, 「서구 근대 자유주의의 중세 기독교적 기원?: 래리 시덴톱, 『개인의 탄생: 양심과 자유, 책임은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학산문학』 96(2017년 여름): 302-18 을 참고.


19)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내게는 김미정의 『움직이는 별자리: 잠재성·운동·사건·삶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시론』(갈무리, 2019)에서도 3부가 가장 흥미롭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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