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기생충>: 80년대를 기억하는 우화

Reading 2019. 6. 1. 01:21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았다.

 

[당연히 영화 줄거리 언급 및 강한 주관이 들어가 있다]

 

2시간 10분 동안 지루함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는 매끄럽고 깔끔한 영화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마더>의 봉준호를 기대하는 감상자라면--나는 봉준호의 작업들을 고작 몇 가지 보았을 뿐이지만, <마더>를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한다--다소 다른 작품을 보게 될 것이다.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질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우연히 신분을 속이고 부유층의 가정에서 과외교사를 하게 된 김기우(최우식 분)를 시발점으로 김 씨 일가 전체가 차츰차츰 해당 가정에 침투·기생하는 과정을 담은 코미디다. 여기서 김 씨 일가는 매우 급작스럽게 무척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기생 대상이 되는 부유한 박동익(이선균 분), 연교(조여정 분) 가족이 신분에 기대되는 판단력을 결여한 속 빈 강정 같은 이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이런 장르에서 일반적인 구도다. 영화의 성격은 김 씨 일가가 저택 지하 비상대피소 및 그곳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이 집에 기생하고 있던 문광 부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바뀐다. <기생충>의 진짜 이야기 혹은 이 영화가 한국의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후반부를 뜯어볼 필요가 있다.

 

후반부의 <기생충>은 그 핵심에서, <설국열차><옥자>가 그러했듯이, 우화다. 겹겹이 축적된 디테일들이 서사적 골자의 단순함을 덮어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생충>이 사회적 현실을 섬세하게 파고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골자는 다음과 같다. 극복불가능한 불평등이 있고, 부자에 기생하고 또 그를 숭배하는 빈자들은 연대하는 대신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빈자들은 광기와 분노에 의해 부자들의 삶 한 가운데에서 끔찍한 파국으로 폭발하고--비슷한 모티브는 여럿 있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P. B. 셸리의 <풀려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 1820)에 나오는 데모고르곤(Demogorgon)이다--이후 그들은 서로를 애도하면서 상징적으로나마 연대감과 해방을 꿈꾼다. 간단히 말해 영화의 핵심적인 줄거리는 '민중주의적' 역사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봉준호는 (한국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여전히 '80년대의 자장' 속에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조금 심술궂게 말한다면, 80년대의 근원적인 거대서사를 반복하는 일은 어쩌면 세계적인 영화인들에게 '거장'으로 공인받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만약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세대별 분포 및 그들의 정치-미학적 감수성이 어떠한 시공간으로부터 기원하는지 정리할 수 있다면 꽤 재밌는 작업이 될 것이다; ()좌파의 마지막 보루는 영화제인가?).

 

물론 <기생충>'민중주의적 전통'과 맺는 관계는, 오로지 디테일로만 남아있긴 하지만, 조금 더 파고들어가볼 지점이 있다. 김 씨 일가 이전의 원조 기생충이라 할 수 있는 문광 부부는 처음에는 단순히 빈민처럼 묘사되다가 결국엔 80년대 운동권 이미지를 기묘하게 뒤틀어 놓은 것임이 드러난다. 급작스럽게 조선중앙TV 아나운서의 성대모사를 하는 문광이나(그의 마지막 대사는 "충성"이다), 지하 비상대피처의 서가에 법학서들을 꽂아놓고 있는, 그리고 죽음 직전 박 사장을 대면하고 기괴하게 "리스펙트"를 외치는 그 남편에서 80년대에 대한 애증어린 기억양식을 읽어낸다면--나는 87 직후의 세대, 특히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학번대 ()운동권들이 80년대를 기억하는 방식은 정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과도한 독해일까?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장치는 물론 산수경석이다. 처음에는 성공과 출세의 의미로 소개되었던, 잠시 동안이라도 김기우를 발자크의 라스티냐크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이 소품은 폭우와 침수 속에서 자신들이 짓밟았던 같은 '기생충'들을 향한 죄의식을 담아낸다. 감상성과 도식성이 급격히 치솟는 이 전환점 이후 수석은 다시 빈자들의 광기와 분노의 파국을 촉발하는 도구가 되며, 마지막에는 (영화에서 유일한 '진짜 자연'이라 할 수 있는) 냇물 바닥으로 귀향하면서--이는 당연히 김기택(송강호 분)이 문광을 묻어준 것과 겹쳐진다--'민중적 연대'는 상징적으로 되돌아온다(이러한 연대와 계급갈등[?]의 서사에서 여성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이야기는 남자들만의 것이 된다; 이것조차도 80년대 민중주의의 전형인가?). 자연과 민중의 결합을 매개하는 이미지로서, 산수경석은 민중주의적 전통, 혹은 그것으로의 (상상적) 귀향을 거의 순수하게 드러낸다.

 

<기생충>은 사실주의적 탐구도,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유머러스한 디테일들이 곳곳에 깔려있지만, 이 영화는 부자와 빈자의 삶이나--발자크 이래 사실주의 미학의 오랜 꿈이었던--사회의 구조를 파헤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기생충'들 속에 도사리는 암흑을 냉정한 태도로 짚어내보거나 하지도 않는다(그러기엔 어느 시점부터 영화는 김 씨 일가에 서서히 온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차라리 <기생충>, 같은 감독의 <괴물>--특히 후배를 밀고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팔뚝질을 꺼낸 전직 운동권의 모습에서--그랬던 바와 마찬가지로, 80년대와 민중주의적 전통에 대한 복잡한 기억에 가깝다. 영화는 한편으로 지하의 대피처로 잠수한 문광의 남편이나, 부와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산수경석으로 축소된 자연처럼 과거의 정치-미학적 전통들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일그러지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망각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줄거리 자체를 통해 민중주의적 서사 전통을 반복한다.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다면, 이 영화는 기태와 기우가 문광 부부를 만나서, 다시 말해 비판적 의식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은 오늘날의 빈민들이 망각된 운동권의 일그러진 전통과 다시 만나서 그 덕성을 다시 회복하는 (어떤 면에서 대놓고 낭만주의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문광 남편이, 기택이, 기우가 세대를 건너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로서 보이스카웃의 모스 부호가 선택된 건 우연이 아니다. 물론 기택의 '해방의 날'은 오로지 기우가 '부자가 되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마지막 멘트는 아주 약간의 체념과 거리두기를 담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지점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세 가지 개인적인 코멘트를 덧붙이는 걸로 글을 마무리하는 걸 허락해주길 바란다. 첫째, <기생충>은 상당히 뚜렷하게 '영화제에서 거장으로 통용되기 위한' 영화의 전형을 되풀이한다. 좌파적 전통의 거대한 역사철학이 '촌스러운' 사실주의가 아닌 우아하고 매끈한 우화의 형태로 제시되며, 파국의 장면에서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피와 폭력을 분출하는 대목도 할애되어 있다(가끔 나는 이러한 영화가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형성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했듯, 민중주의가 해외영화제를 겨냥하는 유용한 전략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굉장한 아이러니가 있다. 둘째, <기생충>, 철저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천재적인 힘이 엿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는 김기덕의 (감독의 성폭력 혐의는 물론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피에타>에 나타나는 기계와 짓이겨지는 육신이 결합한 섬뜩한 이미지의 모티프와 같은, 혹은 봉준호 본인의 <마더>의 마지막 관광버스 신과 같은 충격은 없다. 누군가가 <기생충>의 봉준호를 거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나는 '거장들이 영화를 찍는 법을 잘 수행했다는 점에서'만 그에 동의할 수 있다. 셋째, <기생충>은 과거를 돌아보는 특정한 세대가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다음 세대에게--곧 민중주의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한 세대에게--은근히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때 민중주의를 바라보는 봉준호를, 오늘날의 젊은 감상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봉준호의 시도는 마치 동학"혁명"부터 3.1."혁명"을 거쳐 2016-17년 촛불"혁명"의 일관된 정통성을 구축하려는 386들의 노력처럼 20대의 냉소와 무관심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화가 희망하는 바처럼 '모스 부호를 통해' 과거와, 이전 세대와 소통하는 자식들을 찾아낼 것인가? 나는 여기에 비관적이지만, 스스로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만큼은 회의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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