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 수용에 관한 단상

Comment 2019. 3. 3. 21:41
*2018년 12월 27일 페이스북에 먼저 올렸던 글을 약간 수정해 올린다.




얼마 전 프로그래밍을 하는 지인, 사회과학에서 양방을 하는 친구를 각각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방금 다른 지인이 보내준 엉성한 수준의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 DH) 연구 논문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인문학 연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학문분과의 영향관계로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아 보인다: 먼저 사회과학 쪽의 연구자들이 컴퓨터공학/데이터과학 등등 자연과학/공학계열 논의를 선별적으로 흡수하면서 이것저것 방법론적 시도를 하고, 그걸 다시 인문학 연구자들이 취사선택해서 적용해본다. 즉 20세기 학문분야에서 관찰되는 두 가지 경향, '사회과학의 자연과학화'와 '인문학의 사회과학화'가 이제 대규모 데이터 처리의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상기한 구도가 맞다는 전제 하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자료처리 기술발전X자료의 양적확대'가 그 자체로 연구자의 재현/해석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시점이 오기 전엔, 사용하는 도구 및 자료가 아무리 바뀐다고 해도 결국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여 독자들에게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적 서사를 창출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사회과학에서 그게 얼마나 잘 되고 있냐는 논외로 하고, 인문분야, 특히 내가 속한 분야에서는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방법론적 이해 없이 단순히 '이게 요즘 미국에서 많이들 하는 거니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최신기술이니까' 식으로 연구를 정당화하는 건 당연히 곤란한 태도다.

실제로 스탠포드에서 DH를 활용한 연구자들이 한다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다보면... 대체로는 역사학/문학사회학에서 수십 년 전부터 하던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 그걸 좀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서 큰 스케일로 한다, 혹은 예전에 사람이 노가다로 하던 걸 컴퓨터가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정도의 인상이랄까(물론 자료 갖고 이런저런 노가다를 많이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업무량을 줄여주는 기술은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사회학이나 사회사/문화사/서책사(Book History)/출판사 등등 반 세기 동안 축적된 연구 흐름을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과학 쪽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딱히 별 감흥이 없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솔직히 우리끼리는 딱 보면 약 파는 거 바로 알죠, 그런 연구가 제대로 되려면 ~~한 게 필요한 데 그게 없잖아요"--있다. 모르니까 신기하고, 알면 '언제가 좋은 게 나오겠지만' 아직은 유보적인 태도로 정리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 애초에 사회사, 문화사, 문학사회학 계열 연구들은 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방법론적 논의를 받아들이며 생겼다. 가령 정기간행물/문화연구/문학사회학의 고전적인 저작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나긴 혁명>은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문학과 역사와 사회과학의 거친 혼합물 덩어리다. 즉 '디지털 연구'가 애초에 기존 사회과학적 연구모델의 틀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연구모델을 가져온 인문학 분과의 '디지털 연구' 또한 기존 연구모델의 범위 안에서 주된 연구성과가 나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는 바꿔말하면 '디지털 연구'의 발전이 사회과학적 연구모델 자체를 갱신하기 전에는 '디지털 인문학' 또한 그렇게까지 혁신적인 연구를 내놓기는 힘들다는 뜻이 된다. 이건 인문학 연구자들이 원래 보수적이거나 기술적 함의를 잘 몰라서, 혹은 실리콘밸리 물을 못 먹어서(...) 라기보다는 그냥 기술발전이 그 자체로 새로운 연구모델/연구서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며 기존에 유효했던 연구패러다임이 유지되는 한 기술발전 또한 기존 연구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좀 더 타당한 해석일 듯싶다.

-물론 현실에서는 학문분과 간 시공간 상의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지인이 말해준 사례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자A는 미국의 매우 좋은 탑스쿨에서 디지털 연구 쪽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가 속한 한국의 학계B는 최근의 방법론적 논의는커녕 서양학문과 영어(...) 자체가 낯선 필드다. 연구자A의 연구는 솔직히 말해 기존 학술장에서 문헌연구를 통해 나오던 이야기를 디지털 인문학의 옷을 입혀 내놓은 수준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학계의 논의를 진전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방법론적 논의에 좀 더 익숙한 (특히 사회과학 베이스가 있는) 다른 필드 연구자들이 어느날 연구자A의 논문을 우연히 찾아 읽고나서 비웃고 지나가는 예들도 부지기수다.

-오늘 대화의 자의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다(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실상 여러 지인들의 논점이 섞인 걸로 봐주면 좋겠다--나는 이런 이야기를 오리지널하게 할 역량이 없다).

늘 그렇듯, 학문은 도구이기 때문에 좋은 방법론 자체가 아니라 그 방법론으로 무슨 유의미한 연구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DH의 마스터라고 해도 내놓는 연구물에 함의가 없으면 좋은 연구자가 아니다. 기술의 휘황찬란한 색채에 눈이 멀지 말고 연구를 보자. 잘 모르겠으면 그냥 데이터 관련 전공자를 불러 물어보자. (본인 밥줄이 걸려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이게 진짜로 쓸모가 있는지 아닌지를 훨씬 더 명쾌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디지털 인문학이 실제로 우리의 연구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을지는 아직은 두고봐야 한다. 물론 나는 프로그래밍으로 노가다를 줄이고 대규모 전자 아카이브를 확충하는 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한국의 부자 교회가 조금만 돈 투자하면 고중세부터 성경 전자 아카이브 만들어서 전세계 연구자들의 찬양을 받을텐데 그런 건 안 하겠지...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엔 15-16세기 5개 언어 성경이 먼지 속에 굴러다니는데 스캔도 안 되어 있다ㅠㅠ). 텍스트 디지털화에 기초해 대량의 문헌을 훨씬 수월하게 분석할 수 있는 문헌학적 접근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으며, 현재까지 디지털 인문학이 가능하게 한 가장 건실한 연구 또한 이쪽으로 보인다.

디지털 인문학이 앞으로 연구 패러다임을 바꿀 가능성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먼저 사회과학 연구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찾아올 것이다. 즉 디지털 인문학이 진짜 뭘 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일단 사회과학 쪽에서 무슨 연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쫓아가보는 게--적어도 그걸 꿰는 지인을 만들어두는 게--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사회과학 연구논문을 읽고 방법론적 함의를 거칠게라도 캐치하지 못하는 디지털 인문학 연구자가 새로운 연구모델의 등장을 빠르게 쫓아갈 일은 별로 높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앞으로 장래성이 있는 디지털 인문학 연구 전공자를 감별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인문사회과학 분야 방법론과 연구모델의 구성을 메타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 앞으로 좋은 미국학교에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중 디지털 인문학 연구를 자신의 강점으로 걸어놓은 사람은 계속해서 쏟아질텐데, 어차피 현시점에서 디지털 인문학을 했다고 해봐야, 특히 원래 데이터와 프로그래밍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게 아니라 유학 가서 그걸 해보게 된 케이스라고 하면, 당장 뭐 대단한 연구를 내놓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아직 정리가 안 된 대규모 자료 아카이브를 하나 끼고 있다면 모를까...). 결국 디지털 인문학 연구자에 대한 선택과 투자는 지금 당장의 효용보다는 장래성을 볼 수 밖에 없고, 그 장래성은 한편으로는 최근의 기술발전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성실성,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발전이 연구모델에 가져다주는 함의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적 훈련에 달려있다. 둘 다 없는 사람이라면... 몇 년 지나도 그냥 자기 박사 때 하던 거나 계속 반복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고 시간이 지날수록 최근 연구와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걸 투자 실패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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