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경구들 간의 충돌 [130310]

Comment 2014. 3. 18. 14:15

*2013년 3월 10일 페이스북


얼마 전에 삶의 경구/가르침들의 상충에 대해 썼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봤는데, 그 지침들 중 어떠한 것들을 선택하느냐가 진짜 문제가 된다는 진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현명한' 방식이 되겠다. 즉 개인적으로 실용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대신 그러한 상충 자체가 왜 일어나는가, 혹은 그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충인가, 각각의 지침들은 어떠한 가치체계=질서들을 배경에 두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는가(칸트적 비판의 태도라고 갖다붙일 수는 있겠다)를 질문하는 방향이야말로 진정으로 메타적인 차원을 겨냥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간다면, 그러한 지침들이 전제하는 상이한 가치체계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단일평면으로서의 사회'(가라타니가 <탐구>에서 전제한 무한한 평면=구체로서의 이 세계를 상기하라)가 어떻게 자리하는지, 그 안에서 가치체계가 어떠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그 구조에 따른 건축물로서 다시금 가치체계들의 세계를 (예지적인intelligible/intelligibel 차원에서나마) 그려내는 것.
최종적으로 한 발짝을 더 나아간다면, 그러한 세계를 어떠한 방법을 통해 어떠한 모습으로 움직여나가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

- 위와 같은 질문들에서 최소한 네 명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말과 사물>의 푸코, <세계사의 구조>의 가라타니 고진, 칸트, 그리고 여기서 말하지 않을 또 한 명.
- 위와 같은 연상의 끝에서 실천적 전환이라는 주제가 언급되었는데, 분명히 이를 실천과 괴리된 이론적인 공상으로 치부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구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이론적/인식적 차원의 전환과 실천적 차원의 전환이 사실상 동일한 평면 위에서 진행되는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라는 것이다. '배치'라는 주제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지만, 그 도구를 미시적인 소재들만을 겨냥해서 쓸 게 아니라 세계인식의 형태를 바꾸는 틀로 이용하는 것, 즉 세계(사=운동)를 보는 관점 자체를 재구축하는 것, 이것이 가라타니를 푸코와 진짜로 연결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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