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혹은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살아가기: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와 역사, 이론, 실천

Intellectual History 2018. 11. 5. 03:59

아래의 본문은 계간 『학산문학』 101호(2018년 가을)에 게재한 서평 원고를 옮긴 것으로,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를 다루었다. 내가 원고를 제출하던 7월 하순까지 스테드먼 존스의 육중한 책에 대해 성실히 읽고 유용한 논점을 파고드는 리뷰·서평은 (적어도 내 시야 안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찾기 힘들었다. 따라서 나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어떠한 맥락에서 읽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들이 주요하게 읽힐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은 한국에서든 서유럽에서든 인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스테드먼 존스의 책 한국어판도 아직 충분히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진 않은 듯 싶다. 그러나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에 어떠한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만을 위해 집필된 것이 아니며, 지적인 흥미를 가진 보다 다양한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하게 읽힐 수 있다. 내 서평이 그러한 용도를 위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평의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은 역사, 특히 지성사·사상의 역사연구가 어떻게 현실연관성(relevance) 혹은 실천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랜 논쟁을 겨냥하고 있다. 본문에서 밝혔듯 나는 역사적 대상을 보편적인 구조·원칙의 발현물로 간주하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익한 전제를 포기하고 과거의 세계와 우리가 속한 현재의 세계 모두의 고유한 특수성을 토대로 하여 인문학 연구의 실천적 활용가능성을 탐색하는 게 보다 현실적인 입장이라고 믿는다. 현대적인 지성사 연구 및 방법론은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행위자가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 무척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몇 차례 밝혔듯, 나는 현재 한국 인문학 연구자들을 잠식하고 있는 무기력과 자조를 끊어내고 우리 존재의 이유를 정당화하는 길은 이처럼 우리의 연구가 무엇을 위한 어떤 도구인지를 규정하는 데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출발을 위한 고민의 일부분으로서 서평 후반부가 동료 연구자들에게 유의미한 말걸기가 된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서평이 출간된 후 Global Intellectual History 3권 3호(2018)에 약 30여 페이지에 걸쳐 스테드먼 존스의 전기에 대한 4편의 짧은 서평과 저자의 답변이 실렸으니 관심있는 독자는 참고할 수 있겠다: https://www.tandfonline.com/toc/rgih20/3/3?nav=tocList )


출판된 텍스트 및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우창_카를 마르크스 혹은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살아가기[서평](2018).pdf


이우창, 「카를 마르크스 혹은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살아가기: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와 역사, 이론, 실천」, 『학산문학』 101(2018 가을): 325-45.




카를 마르크스 혹은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살아가기: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와 역사, 이론, 실천1)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홍기빈 역, 아르테, 2018.2)


올해 5월 번역출간된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이하 『카를 마르크스』)가 카를 마르크스의 삶과 실천만이 아니라 19세기 서구 지성사에 흥미를 지닌 독자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책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결코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는 책값(정가 8만원)과 역시나 부담스러운 수준의 분량(한국어판 1,112쪽, 원저는 784쪽)에 더해 마르크스(주의)에 관련된 책이라면 늘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비판적인 반응들, 아직 한국의 학술장과 독서공중에 지성사 연구가 낯설다는 사실까지 작용해서인지 충분한 수의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다. 반드시 인문사회분야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수의 성숙한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 책이 그만한 대우를 받기를 희망하며, 본 서평은 먼저 저자를, 다음으로 책 자체를 간략하게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둘러싼 이론적인 논쟁을 검토하는 순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1.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와 지성사 연구


저자의 이력은 특히 인문·역사 분야의 연구자라면 그 자체로 흥미를 가질만하다. 1942년 생 스테드먼 존스는 60년대 신좌파·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이후 저 유명한 『신좌파 평론』(New Left Review) 활동을 포함, 수십 년 간 19세기 영국노동계급 연구에 진력해왔다. 197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19세기 후반 영국노동계급의 사회사에 관련된 주제로 근대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에서처럼 영국 마르크스주의 사회사 전통에서 학적 경력을 시작한 저자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시 영미권에 점차적으로 수입되고 있던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언어학·사회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1983년 『계급의 언어: 영국노동계급의 역사에 대한 연구, 1832-1982』(Languages of Class: Studies in English Working Class History, 1832-1982)의 출간과 함께 19세기 노동계급·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와 ‘언어적 전회’(the linguistic turn)에 따른 ‘프랑스 이론’의 방법론을 결합시킨다.3) 그러나 그의 지적 여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에 발생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그는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적 활동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학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조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 스스로가 마르크스주의 사회사의 대안으로 선택했던 프랑스 구조주의 식의 언어분석을 포기하고 다시금 케임브리지 지성사 학파의 방법론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이전의 변화가 사회사적 접근에서 (노동계급의) 언어·사상·담론의 연구로 자신의 연구방향을 바꾼 것이었다면, 이후의 변화에서 스테드먼 존스는 그 분석의 방법으로 프랑스 구조주의가 아닌 보다 경험적이고 맥락주의적인 케임브리지 학파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스테드먼 존스는 1997년 케임브리지 학파의 주요 지도자이자 그해 영예로운 케임브리지 대학 근대사 흠정교수(Regius Professor of Modern History)로 임명된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 정치학(Political Science) 교수직을 물려받았으며, 스키너가 2008년 런던대학 퀸 메리 칼리지 역사학과에 석좌교수로 임용되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또 다른 전진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고 두 해 뒤 2010년 같은 학과의 역사학 교수로 이직했다.4) 지성사 연구로 전환한 후 스테드먼 존스의 지적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사실 중 하나는 자신의 지도를 받았던 그레고리 클레이스(Gregory Claeys)와 함께 정치사상사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시리즈 19세기 편(The Cambridge History of Nineteenth-Century Political Thoughti, 2011)의 공동편집을 수행했으며 그중 “청년 헤겔주의자들, 마르크스와 엥겔스”(The Young Hegelians, Marx and Engels)를 주제로 50쪽 가까운 분량에 달하는 제17장을 직접 집필한 것이다. 한국에 지난 반세기 간 영국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지성사·정치사상사 연구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소개되어 왔으며, 19세기 지성사 연구에 대한 관심사는 더욱 낮은 편이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시리즈 중 다른 시대를 다룬 편들에 비해 약 1.5배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는 19세기 편은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무척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스테드먼 존스가 이 분야의 가장 중요한 연구자 중 한 명임을 보여준다. 나는 『카를 마르크스』가 한편으로 그동안 축적된 19세기 유럽지성사의 풍성함을 한국의 독자가 조금이라도 맛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세대 전의 아날·포스트이론 식의 문화사가 여전히 ‘새로운 역사’ 혹은 ‘가장 발전한 역사방법’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재의 지적 풍토를 자극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카를 마르크스』: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마르크스와 격동하는 19세기 유럽세계


책은 매우 박식하고 명료한 지성의 산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들 모두 주의 깊게 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책은 거칠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장은 마르크스의 가족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헤겔주의자들을 둘러싼 지적 논쟁을 상세하게 다루며,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5-9장은 1840년대의 격동기 프랑스와 독일, 런던을 오가는 급진파 정치 저널리스트 마르크스의 언어적 실천들을 당대의 언어적·정치적 맥락을 세세하게 복원해가면서 조명한다. 마지막 9장에서 에필로그까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의 마르크스를 다루면서 『정치경제학 비판』 및 『자본론』에 대한 세세한 문헌학적 검토·평가 및 마르크스의 제1인터내셔널 활동을 주로 살피며 마지막에는 만년의 러시아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엥겔스 등을 통해 (마르크스의 이러한 관심사가 잘려나간) "마르크스주의"가 널리 유통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각 챕터별로 저자는 크게 마르크스 삶에서의 네 가지 층위, 즉 가족 및 가까운 지인들과의 관계, 사유와 언어적 실천, 정치적 급진파 진영의 행위자·조직가로서의 활동, 그리고 19세기 중반기의 사회적·사상적 변화 속에서 그의 위치―물론 이것들은 상호연관되어 있다―를 오가며 인물의 삶과 사유를 조명한다.5) 마르크스에 대한 모든 책들이 그러하듯 스테드먼 존스의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이나 평가는 분명 논쟁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상세한 문헌연구 및 2차 문헌에 기초함을 고려할 때, 저자의 입장에 대한 논쟁과 별도로 적어도 역사적으로 이 저작의 기여를 크게 논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6) 여러 독자들에겐 한국어로 일찍부터 번역된 탓에, 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필자가 보유한 저명함 덕에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의 서평이 많이 거론되지만, 솔직히 말해 캘리니코스의 서평은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지적으로 저급한 서평이기에 전혀 읽지 않아도 좋다.7)

앞서 『카를 마르크스』를 다소 중첩되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자의적으로 나눈 것은 각 대목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지점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1-5장에서 주목할 지점은 지성사 연구에 합류한 스테드먼 존스가 18-19세기 사상적 논쟁의 맥락을 보다 섬세하게 발굴해낸다는 데 있다. 그는 한편으로 특히나 프랑스 혁명 이후 시기 독일의 철학적-정치적 논쟁에서 기독교 신학의 교리를 어떤 식으로 수용할 것인지가 얼마나 또 왜 중요했는가를,8) 그리고 그것이 헤겔철학 및 관련 논쟁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간결하지만 놓칠 수 없게 지적하며, 다른 한편으로 17세기 영국혁명,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혁명을 거쳐 확산된 공화주의적 전통이 헤겔주의와 마르크스에 끼친 영향 또한 강조한다. 가령 지성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고(故) 이스트반 혼트(Istvan Hont)에의 빚을 언급한 스테드먼 존스가 『강요』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을 설명하면서 사회성(sociability)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대목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책 여기저기서 암시되듯 17-18세기 자연법·상업사회·신학적 논의에서 사용된 여러 언어·논리의 영향은 19세기 전반부에 지적인 훈련을 받은 마르크스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축적된 17-18세기 지성사 연구를 바탕으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마르크스의 언어를 풍성하게 읽는 작업에 필수적인 바, 『카를 마르크스』의 전반부는 그러한 과제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만으로도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 18세기 영국지성사 연구를 따라가는 연구자로서 나의 솔직한 아쉬움은 오히려 스테드먼 존스가, 물론 책 전체 기획을 고려할 때 비난할 지점은 아니지만, 그러한 영향을 종종 이미 관련 연구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만 알아보도록 서술한다는 것이다.

5-9장에서는 보다 미시적인 층위에서 마르크스의 정치적 저널리즘을 세세하게 조명한다. 즉 민주주의자·공산주의자 등 여러 형태의 급진파가 서서히 대두하는 1840년대 독일의 역동적인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가 ‘언어를 통한 정치행위’를 어떤 식으로 수행했는지 훨씬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1790년대의 프랑스 혁명을 근본도식으로 삼아 자기가 속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자 했으며―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여러 차례 명백한 오판을 저질렀는데, 이러한 실수는 1860년대의 변화를 1840년대의 변화를 통해 이해하려던 시도에서도 반복되었다―그러한 정세판단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급진파 정치의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러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그리고 실패했다). 중반부 서술에서 특히 매력적인 지점은 단순히 마르크스가 노동계급 중심의 공산주의를 외쳤고 다른 보다 폭넓은 지분을 보유한 ‘민주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과 갈라졌다는 통상적인 설명에 만족하는 대신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적들, 가령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등이 마르크스의 예측을 뛰어넘는 전략적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사실 등을 포함해 당시의 정치적-담론적 전장(戰場)의 면모를 여러 세력·행위자들의 움직임을 좇으면서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분명 스테드먼 존스는 마르크스의 판단과 정치적 선택에서 발생한 여러 착오와 실수들을 냉정하게 지적하지만, 그는 (이 책에 종종 가해지는 잘못된 비판과 달리) 마르크스를 단순한 의미에서의 19세기인으로 폄하하는 대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그려낸다. 이것은 한 명의 “이론가” 혹은 “경전”으로서 마르크스(저작)의 완전함 또는 가치를 암묵적으로 추인하는 경향이 있는 여러 독해와 대비할 때 맥락주의적 접근이 갖는 매우 강력한 장점이다.

마지막 파트는 기본적으로 가운데 파트의 서술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자본론』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에 대한 문헌학적·맥락주의적 해석을 시도한다. 스테드먼 존스의 『자본론』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헤겔 학파의 논리구조에서 사유를 시작했고, 이는 『자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특히 독일에서 1840년대에는 문제없이 통용되었을 그러한 사고틀이 급격한 사회변화와 함께 사상적 패러다임 또한 격변한 1860년대의 독일에서는 그다지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스테드먼 존스의 전기는 마르크스가 매 시기 무엇을 읽고 고민했는가를 계속해서 언급하는데, 이에서도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는 실천적 저널리스트답게 동시대의 학적 담론 및 독자들의 반응을 절대 등한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저작이 헤겔철학에 무관심한 당시의 분위기에 휘말려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여러 초고와의 대비를 통해 강조되듯 자신의 저작에서 헤겔철학적 요소를 적어도 겉으로나마 최소화하기를 원했다. 문제는, 시시각각 유동하는 정치적 변화로 인한 영향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사유의 근본요소들을 묻어두면서 당대까지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복잡한 이론을 수립하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사실상 목표하던 과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말년의 원고를 포함해 『자본론』 기획의 난점을 돌파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본론』의 당대 맥락에서의 강점은 마르크스가 영국 망명에 따라 생계를 위해 미국의 언론 『트리뷴』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흡수한 엄청난 양의 영국 문헌들(『이코노미스트』 등의 기사, 정부보고서, 학술서 등등)을 기반으로 자본의 역사적인 발전이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토대로 한다는 주장을 실감나게 내놓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 연구자도, 문헌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스테드먼 존스의 주장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그럴 의향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테드먼 존스의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싶다면 단지 마르크스의 몇몇 문헌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혹은 스테드먼 존스가 마르크스의 총체적 이론·유산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식의 공격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저자의 주장에 의구심을 품는 독자라도 해도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이 책을 평가절하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마도 『카를 마르크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강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특히 저작의 중후반부에서 잘 나타나듯 저자가 19세기 (서)유럽의 놀라운 사회변화와 그에 수반한 학문적·담론적 변모를 상세하게 짚어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단지 한 명의 일생과 언어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던 당시의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좁게는 수개월에 걸쳐, 크게는 매 10년마다 19세기의 물질적·언어적 변화가 요동치는 상황을 포착하고 그 변화 속에 마르크스를 위치시키는 저자의 감각은 확실히 오랜 기간 19세기의 노동계급과 그 언어를 연구해온 역사가로서의 숙련만이 허락하는 탁월함이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가 그러한 변화를 예견하거나 선구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 발짝씩 늦거나 종종 자기 자신의 이론적 틀에 얽매여 사태의 전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선거권을 획득하려는 투쟁의 의미, 선거권 확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정치의 등장과 같은 주제를 마르크스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점은 반복해서 지적된다(물론 사려 깊은 독자라면 19세기의 엄청난 변화속도를 고려할 때 마르크스가 매순간 이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점이 딱히 힐난의 대상까지는 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저자 스스로가 다분히 의식했겠지만, 마르크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 책의 판단은 오늘날 선거·대의제 등의 ‘주류적’ 정치에의 참여 및 개선시도에 대한 급진주의 좌파의 거부감과 몰이해를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보다 중도적인 입장과 상당부분 겹쳐지는 걸로 보인다.

저작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하는 지점 두어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젊은 마르크스의 철학적 논의에 대한 해석에 비할 때 후기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논의가 동시대의 다른 논의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카를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노동운동·급진주의 그룹에서 다른 입장들과 어떤 지점에서 대립각을 세웠는지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볼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한 세대 앞의 데이비드 리카도를 제외한) 당대의 다른 정치경제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마르크스의 냉소적인 코멘트에 대한 소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가령 앞서 언급한 『케임브리지 19세기 정치사상사』에 수록된 에마 로스차일드(Emma Rothschild)의 매우 박식한 설명이 보여주듯(22장 “Political Economy,” 748-79) 19세기 동안 정치경제학은 대중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패러다임과 논쟁도 수차례 바뀌었다. 정치경제학사의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의 저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누락되어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해석자들의 도전을 이 책이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둘째, 예컨대 마지막 부분에서 19세기 후반에 원시적 공동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사가 급증했다는 식의 지적은 분명 탁월하지만, 특히 19세기 중반에 걸쳐 당시 유럽(특히 독일)의 철학적·학문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코멘트는 충분히 나와 있지 않다. 바로 이 문제가 저자의 『자본론』에 대한 해석에서 핵심적인 토대임을 고려할 때 단순히 당시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담론적 변화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양자의 서신을 통해 보여주는 것 이상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19세기의 사상적·담론적 변화는 그 폭과 넓이 모두에서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은 분명하고,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종합적인 개괄은 아직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19세기 중반 이후 헤겔철학의 몰락과 함께 (특히 영국 다윈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전에 직면한) 독일철학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한국어로도 번역된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 이후』(After Hegel)를 포함해 아직까지 영어권에서 많은 연구를 요구하는 질문이며,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분야를 다루지 못했다고 저자를 비난하는 건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19세기 유럽사상사 연구의 진척에 따라 스테드먼 존스의 해석이 도전받을 지점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방대한 시공간을 무척 깊이 있게 다루는 매우 두꺼운 저작임을 고려할 때 한국어판 번역의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는 명확하기에,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무리 없이 잘 읽히도록 옮겨놓은 역자의 노고는 인정받을 만하다. 모든 경우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 번역어 선정에 대한 꼼꼼한 역주는 확실히 역자가 여러 고민을 했음을 알게 하며, 고유명사나 개념어는 많은 경우 원문병기가 되어 있어서 역자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원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고유명사 번역의 경우 읽는데 큰 문제는 없는 편이지만 19세기 영국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오역을 종종 찾아낼 수 있으며 2쇄를 찍게 된다면―이 책은 그럴 가치가 있다!―박식한 편집자의 충분한 교정을 거쳐 수정되기를 희망한다. 한국어판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논쟁적인 역자 서문이 맨 앞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담론장이 마르크스주의의 신성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역자 서문이 애초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사가 급격히 쇠퇴한 지금의 한국에서 얼마나 시의성이 있을지는 미심쩍으며, 오히려 역자 서문으로 인해 괜히 겁을 집어먹거나 책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사례가 눈에 띤다. 스테드먼 존스의 서술은 방대하고 종종 18-19세기 유럽지성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만 짚어낼 수 있는 포인트를 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평이하게 집필되었고 (심지어 주석도 매우 친절하게 연구자가 아닌 독자들을 위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한국어 번역의 경우도 학술장 바깥에 있는 독자들이 읽는 데 무리가 없는,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역자서문을 뒤로 돌리고 독자들이 바로 스테드먼 존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변경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며, 독자들에게도 역자서문은 책 본문을 다 읽은 뒤 선택적으로 보는 편을 권하고 싶다.9)



3. 역사, 이론, 실천: 지성사 연구는 실천적일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카를 마르크스』 출간 이후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한 가지 중요한 이론적 쟁점을 다루고 싶다. 그것은 역사(학), 특히 정치사상사·지성사 연구와 정치적 실천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스테드먼 존스의 저작에 대해 영어권의 여러 평자들, 그리고 한국의 진보적 독자들이 보여준 가장 흔한 반응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를 19세기의 정치적·지적 맥락 내에 위치시키려는 저자의 시도는 마르크스를 과거에 가둬버리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그의 사상을 현재적으로 독해하여 실천적인 함의를 이끌어내는 걸 가로막음으로써 사상의 실천적인 생명력을 고갈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따르면 과거의 사상을 그것이 등장한 세계의 고유한 맥락에 비추어 이해하는 지성사적 접근법은 역사 연구로서의 정합성은 있을지언정 실천적 성격을 결여한 과거에의 탐닉이며, 과거의 것으로부터 현재의 관심사·필요에 맞거나 또는 보편적인 요소를 새롭게 읽어내는 접근법이야말로 현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한 뒤 정확히 반대의 주장, 즉 우리가 과거의 사상 텍스트를 활용함에 있어 오직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할 때만 유의미하게 실천적일 수 있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제시하고자 한다.10)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자들이 거의 참고하지 않고 있지만, 스테드먼 존스의 저작에 대한 비판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논의들이 20세기 후반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학파가 주도한 정치철학·사상사의 방법론적 논쟁에서 이미 매우 복잡한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짚어두자. ‘보편적’ 주제 혹은 거대한 역사적 내러티브에 입각하여 과거의 정치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던 20세기 중반의 정치철학·사상사 연구의 주된 경향에―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 스트라우스주의 등―대항하여,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존 던(John Dunn), J. G. A. 포콕(Pocock)을 중심으로 하는 ‘케임브리지 학파’는 텍스트와 저자가 속해 있던 언어적 맥락을 복원하고 그 안에서 저자의 언어적 실천이 어떤 의도,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이른바 ‘맥락주의적’(contextualist) 접근법을 제창했다.11) 사상가의 텍스트에서 과거의 맥락과 저자의 의도를 초월하는 현대의 관심사를 투사하는 ‘시대착오적’ 연구에 대한 케임브리지 학파, 특히 스키너의 강력한 비판은 다양한 형태의 반비판과 조우했다. 그중 이들의 진로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맥락주의적 독해가 과거의 사상을 현재의 실천적 관심사로부터 단절시킨다는 주장이었다. 과거로부터 유용한 역사적 지식을 곧바로 생산할 수 없다면 도대체 과거의 사상을 연구하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12)

1988년 『의미와 콘텍스트』에서 스키너의 답변은 주로 과거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13) 그러나 특히 스스로가 영국의 통치엘리트를 육성하고 그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지닌 케임브리지 학파에게 (정치)사상사가 현재의 정치적 문제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14) 이후 수십 년 간 영미와 유럽의 학술장에서 눈부신 확장세를 보여주며 사실상의 판정승을 거둔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시도를 통해 자신들의 작업이 현재의 정치적 의제에 기여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아직까지 정치사상사 연구와 현재적 실천의 관계에 대한 만족할 만한 방법론적 모델은 정립되지 않았으나, 니체와 푸코의 “계보학”(genealogy)의 언어를 빌려와 “자유”(liberty) 및 “국가”(state) 개념을 둘러싼 정치이론적 논쟁에 개입하고자 했던 스키너,15) 18세기의 정치사상을 검토하며 현대 정치학의 국내정치와 국제통상의 관계, 인민주권과 대표 민주주의 논의에 비판적 개입을 하고자 했던 혼트와 리처드 턱(Richard Tuck)을 포함해 케임브리지 학파의 시도는 분명 여러 생산적인 결과물을 낳았다.16)

케임브리지 학파의 노력이 주로 정치사상사적 연구와 정치이론적 의제를 잇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내가 여기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바는 맥락주의적 사상사 연구와 정치적 실천 사이의 관계를 보다 메타적인 차원에서 재검토하는 데 있다. 우선 나는 현대의 정치적 행위자가 과거의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네 가지 명제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라고 전제한다. 첫째, 과거의 발화(자)는 해당 시공간에 존재하는 특수한 언어적 자원들에 기초한다. 과거의 사상가는 지적인 무균실에서 출발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보유한 언어·논리·문법·지식체계 등을 통해 현상을 인식·분석·사유하고 (경우에 따라)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는 누군가의 사상적·언어적 실천이 어떤 본질적인 구조에 의해 결정지어져 있다는 진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심지어 기존의 사유가 말하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우리 자신이 기존에 보유한 언어와 사유를 일종의 가용자원으로 활용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 과거의 발화(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상황과 문제 속에 존재한다. 이 진술은 이중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 과거의 언어적 실천은 발화자가 문제 혹은 자신의 언어적 실천을 요구한다고 이해하는 특정한 맥락을 겨냥하여 발화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발화는 많은 경우 그것이 존재하는 맥락과 정세에 따라 (종종 발화자의 예측과 기대를 빗나가는)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 즉 발화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또 발화가 어떻게 수용되었고 어떤 결과를 어떻게 불러일으켰는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화자가 이해한 당시의 상황과 맥락, 그리고 경우에 따라 발화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복잡하고 유동적인 맥락까지도 분석범위 내에 포함시켜야 한다.

셋째, 상기한 사항은 현재의 행위자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데, 우리가 과거의 텍스트를 읽고 해석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여러 언어·지식·전제 또한 우리 자신이 속한 특정한 언어적·지적 맥락의 산물이다. 현재의 해석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이 ‘과거의 각종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 또한 결코 언어적 무중력상태에 있지 않다. 특히나 복잡한 텍스트를 해석 및 사유하고자 할 때 기존에 보유한 지적·사상적 맥락은 우리 자신의 독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넷째, 우리가 과거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현실에 대한 지적·언어적 실천을 수행하고자 할 경우, 이러한 실천은 현재의 발화(자)인 우리가 속해 있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겨냥하며 또 그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가령 한국 정치에 대해 언어적 실천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동일한 내용의 발화가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 대통령 탄핵과정의 전에, 또는 후에 놓일 때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사상적·언어적 실천이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낳는다는 명백한 진리에서 현대의 행위자도 예외가 아니다.

네 가지 명제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과거의 사상에서 무언가 지식을 도출할 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지식으로부터 현재의 정치적 실천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 이 두 과정 모두에서 우리는 과거 또는 현재의 특수한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접속해야 한다. ①과거의 사상으로부터 현재의 정치적 실천을 위한 사상적 자원을 끌어오고자 하는 행위자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참고하는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자원을 활용하는지, 어떠한 맥락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텍스트로부터 과거의 맥락을 보지 않은 채로 즉각적으로 어떤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면, 자의적인 오독의 위험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특정한 시공간에서 통용되었던 사유와 논리를 그러한 조건이 더 이상 공유되지 않는 지금 여기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②해석자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언어적 자원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해석자는 자신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생각해온 바를 텍스트 해석에 투사하여 기존의 ‘거대 서사’를 반복하기 위해 과거의 사상을 하나의 반짝이지만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소모할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말해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이 서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특수성을 가진 세계임을 망각할 때 우리는 두 종류의 시대착오, 즉 과거의 논리에 현재를 끼워 맞추거나 현재의 상식과 이해관계라는 틀에 과거의 사유를 억지로 꿰어 맞추어 결과적으로 주어진 서사를 반복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이는 특히 서구 근대 혹은 그 이전 동아시아의 전통으로부터 성급하게 현재의 지침을 끌어내려는 경향이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가 그대로 보고 배울 수 있는 의미에서의 거울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속한 세계가 얼마나 특수한 곳인지를 인지하게 해주기에 유용하다.

③사상의 탐구를 통해 창출한 지식을 언어화된 정치적 행위로 옮기고자 하는 이는 그것이 현재 자신이 속한 맥락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를 예측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강연자가 청중이 누구이며 어떤 상태인지 고려하듯, 우리는 과거의 사상적 실천이 당시의 맥락에서 수용된 양상과 함께 현재의 특수한 맥락을 가능한 정교한 수준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각각의 시공간에 속한 언어적 실천이 그 자체로 매우 특수한 것이며 따라서 무언가 보편적인 것을 통한 상호 환원은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를 따른다면, 설령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앎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경우에도―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존중한다―그것이 현실에서의 정치적 실천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시금 시간 속의 특수한 맥락과 접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사상적 지식과 정치적 실천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합리적이고 진정성 있는) 시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특수한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보편성은 상상될 수 있지만 역사적 세계 속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보편성을 경유해 특수한 맥락으로부터 이탈한 정치적 선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정치적 실천에서는 유의미하게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정치사상의 연구에 불가능한 보편성을 강요하는 대신 정치적 실천 자체의 맥락적 성격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모든 정치적 실천은 시간 속에, 역사 세계 속에 존재하며 다양한 맥락의 구속을 받는다. 아주 오래된 언어적 관습,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 다른 사상과의 경쟁, 혹은 어느 개인의 생물학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요소가 정치적 실천의 운명에 작용한다(마찬가지로 해당 실천 또한 다른 실천들의 작동에 개입하는 맥락이 된다).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행위자라면 언어적 실천을 포함한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그러한 점에서 역사적 맥락 내에 존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어떤 종류의 실천이 효과적일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실천이 역사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고자 할 것이다. 지성사 연구가 실천적 목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지성사 연구자들은 시간 속에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상과 그 구성요소들이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로서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탐구한다.

요컨대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사상(가)는 그 자체로 시간 속에서 운동하고 변모하는 존재며, 지성사 연구는 단지 과거의 특정한 정치적 개념·논리를 복원하고 이해하는 걸 넘어 그것을 시간 속의 존재로 다룬다는 의미에서 실천적일 수 있다(따라서 나의 입장은 과거로부터 현재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비교적 단순화된 형태의 ‘계보학’과는 다르다). 사상은 의도 이상의 성공을 거둘 때도 있지만,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하고 망각되거나 때로는 의도치 않은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성사 연구는 다양한 사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낳는지, 다시 말해 언어적 실천이 역사 세계 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탐구한 사례연구의 집합이다. 이러한 사례연구를 참조하는 행위자들은 역사 속의 행위자들이 어떠한 언어적 전략을 채택했고 또 그 전략이 어떤 결과를 거두었는지를 주의 깊게 학습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전략을 수립하고 보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축구팀의 구성원들이, 격투기 선수·코치가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경기영상을 찾아 꼼꼼히 분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나 정치적 언어처럼 맥락의존성이 강한 영역에서 우리는 어떤 실천 혹은 전략이 특수한 조건 내에서 어떤 효과를 내고 또 변모하는가를 탐구하면서 실천적인 효용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를 19세기의 복잡한 맥락 속에 위치시킨 스테드먼 존스의 저작이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지 논의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한국의 진보적 인문학계는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온 실천적 성격을 다시 획득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1) 서평 작성과정에 도움을 주신 김민철, 오석주, 이송희 님께 감사드린다. 더불어 서평 초안이 부분적으로 나의 블로그(begray.tistory.com) 및 SNS계정에 게시되었을 때 생산적인 코멘트를 해준 여러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 원저는 Gareth Stedman Jones, 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 Cambridge(M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3) https://networks.h-net.org/node/6873/reviews/1566298/renaud-stedman-jones-karl-marx-greatness-and-illusion 에서 읽어볼 수 있는 Terence Renaud의 리뷰 참조.

4) 스테드먼 존스의 이력은 http://www.histecon.magd.cam.ac.uk/gareth_stedman-jones.htm#CV 를 참조.

5)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 「『공산당 선언』 서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권화현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0. 7-194 (주석은 273-324)는, 불행히도 『카를 마르크스』만큼 잘 읽히는 한국어는 아니지만, 저자의 논지를 보다 짧은 분량에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함께 볼 가치가 있다.

6) 가령 Peter Ghosh, “Constructing Marx in the History of Ideas,” Global Intellectual History 2.2(2017): 124-68 의 경우 스테드먼 존스 저작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저작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인 전기”(intellectual biography, 126)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이어지는 본인의 논지가 비판대상이 그려놓은 마르크스의 상을 실질적으로 얼마나 수정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

7) 캘리니코스 서평 한국어판은 https://wspaper.org/article/20347 참고. 그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스테드먼 존스의 배신(?)에 대한 원한과 함께 이 역사가의 본업에 충실한 전기가 마르크스의 성인전(hagiography)이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 감정적이 된 걸로 보이며,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 상당수는 원저의 맥락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거나 중요성 자체가 떨어지는 것들이다.

8)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관련문헌으로 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 철학』, 이신철 역, 도서출판b, 2018을 보라. 이 책에 대한 리뷰는 나의 http://begray.tistory.com/448 참조.

9) 만약 역서의 2판을 내게 될 경우 나의 제안을 반영하는 걸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답변한 역자의 친절함에 감사드린다.

10) 물론 지성사 혹은 정치사상사가 우리의 앎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매우 다양하나, 여기서는 지성사가 정치적 행위자들을 위한 실천적인 관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의 물음에 국한해서 논의를 전개하겠다. 이 주제에 대한 매우 유용하고 폭넓은 개괄로는 John Dunn, “The History of Political Theory,” The History of Political Theory and Other Essay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1-38을 추천한다.

11) 대표적으로 제임스 탈리 편, 『의미와 콘텍스트: 퀜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사 방법론과 비판』, 유종선 역, 아르케, 1999[원저는 1988년 출간]에 실린 글들을 보라. 스키너와 조금 다른 결의 포콕의 관심사에 대한 최근의 논의로는 Samuel James, “J. G. A. Pocock and the Idea of the ‘Cambridge School’ in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History of European Ideas (2018), DOI: 10.1080/01916599.2018.1498011을 보라.

12) 『의미와 콘텍스트』에서 조지프 페미아, 「사상사 연구의 ‘수정주의적’ 방법에 대한 한 역사주의자의 비판」, 310-46; 케네스 미노그, 「지식사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 347-80; 존 키인, 「역사철학의 남은 테제들」, 401-26 등을 보라.

13) 스키너의 답변은 같은 책의 「나의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451-574을 참고. 특히 현재의 실천과 과거의 역사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568-73을 보라. 스키너와 비판자들을 둘러싼 논쟁의 효율적인 정리로는 Peter L. Janssen, “Political Thought as Traditionary Action: The Critical Response to Skinner and Pocock,” History and Theory 24.2 (1985): 115-46을 참고.

14) 케임브리지 역사학과 및 정치사상사 연구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Robert Wokler, “The Professoriate of Political Thought in England since 1914: a Tale of Three Chairs,”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in National Context, eds. Dario Castiglione&Iain Hampsher-Monk, Cambridge: Cambridge UP, 2001, 134-58 및 James Alexander, “The Cambridge School, c. 1875-1975”,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37.2(2016): 360-86 등을 보라.

15) 스키너의 “계보학적” 전환에 대해서는 Melissa Lane, “Doing Our Own Thinking for Ourselves: On Quentin Skinner's Genealogical Tur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73.1 (2012): 71-82을 보라. 이를 보여주는 스키너의 주요 저작으로는 퀜틴 스키너,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조승래 옮김, 푸른역사, 2007[원저는 1995년 출간]; 퀜틴 스키너, 『역사를 읽는 방법 :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 황정아·김수용 역, 돌베개, 2012[원저는 2002년 출간]; Quentin Skinner, “A Genealogy of the Modern State,”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162 (2009): 325–70 등을 참고. “계보학”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 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9, 123-161; Michel Foucault, “Nietzsche, Genealogy, History,”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Volume Two: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ed. James D. Faubion, trans. Robert Hurley at al, NY: The New Press, 1998, 369-91; Mark Bevir, “What is Genealogy?”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History 2(2008): 263-75 등을 보라.

16) Istvan Hont, Jealousy of Trade: International Competition and the Nation-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 Cambridge(MA): Harvard UP, 2005 및 Richard Tuck, The Sleeping Sovereign: The Invention of Modern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P, 2016. 사상사 연구와 정치적 의제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은 Richard Tuck, “History,” A Companion to Contemporary Political Philosophy, 2nd. ed., eds. Robert E. Goodin, Philip Pettit and Thomas Poggle, Malden: 2007, 69-87; Richard Whatmore, ch. 5 “The Relevance of Intellectual History,”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Cambridge: Polity, 2015, 67-84; Richard Bourke, “Revising the Cambridge School: Republicanism Revisited,” Political Theory 46.3 (2018): 467-77 등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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