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교육학> 간략히 읽고 정리.

Reading 2018. 5. 28. 12:38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교육학>( über Pädagogik)을 가볍게 읽었다(백종현 역, 아카넷, 2018; 원문은 1780년의 강의안을 바탕으로 1803년 출간). 본문 전후의 해제엔 나름 로크와 루소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딱히 로크의 컨텍스트 또는 여러 지성사적 연구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칸트 전공자가 아니라 해도 로크의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루소의 Emile, 그리고 칸트 자신의 역사철학(<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영구평화론>) 및 두 도덕론(<윤리형이상학의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을 읽는 정도만으로도 이 텍스트에서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올 거라 생각한다. 해제 및 기타 내용을 제외한 칸트의 본문 자체는 (1803년 당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신학교수였던) Friedrich Theodor Rink의 짧은 편자 서문을 포함해도 100쪽이 채 못되는 짧은 책이지만(81-179), 교육에 대한 텍스트들이 그렇듯 대략의 큰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세목과 각 세목에 연결된 더 커다란 지적 맥락을 곱씹어가며, 나름의 주석을 달아가며 음미할 필요가 있다.


1.


"인간은 교육해야 할 유일한 피조물이다"(89)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서론에서 칸트는 교육의 핵심을 인간을 미개·야만의 상태에서 사회화·문명화·도덕화된 존재로 이행시키는 것으로 규정한다. 단지 한 인간의 생애에서만이 아니라 세대간·인류 단위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교육과정("인류는 인간성의 전체 자연소질을 그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서서히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야 한다")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인간에게서 야만성을 제거"하고 "인간성의 법칙들에 복속"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90). 자유를 추구하는 야만족의 습성을 고귀한 것으로 평가했던 루소를 언급하되, 칸트는 그와 달리 제어되지 않은 본성적 자유를 "동물이 대체로 인간성을 아직 자기 안에서 발전시키지 못함으로 인한 일종의 미개성"으로 부르며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성의 지시규정에 복속하는 습관"의 습득을 통해 제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칸트에게는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상태의 자유와 이성·법칙에의 복종을 통한 문명화된 또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자유라는 두 개념의 자유가 있다. 여기서 후자가 더 우월한 것이기에 야만성은 훈육을 통해 제거되고 미개한 상태는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그와 함께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대목이 있다면,

1) 기계적인 교육술과 "하나의 연구"이자 학문으로서의 교육학을 대비시키고 후자의 우위를 선언하고(99)

2) 아이들의 교육은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개선 가능한 상태에, 다시 말하여 인간성의 이념에 그리고 인간성의 전 규정[사명]에 부합"해야 하며

3) 이를 위해 군주의 교육과 학교 설치에 있어 군주와 같은 신분들의 사람들보다 "가장 계몽된 전문가"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고(100-02), "실험학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국가 단위의 학교설치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포함시키고(105)

4) 전체교육과정을 "훈육"(야만성의 제어)->"교화[문화화"(숙련성=임의의 목적에 충분한 능력을 갖는 것)->"문명화"(사회에 적응, civilizing)->"도덕화"(선한 목적에 부합) 이라는 네 단계로 설정한다는 것이다(102-03). 

5) 칸트는 사람들이 "훈육화와 교화와 문명화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도덕화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104)고 말하면서, 지금과 같이 성직자가 도덕화를 맡아 가르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6) 마지막으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칸트 도덕철학의 중심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법률적 강제에 대한 복종과 자기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통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나온다(108). "나는 나의 생도가 자기의 자유의 강제를 참아내는 일에 익숙하도록 해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자유를 잘 사용하게끔 그 자신을 이끌어야 한다"; 먼저 아이를 어린 시절부터 "자유롭게" 두되, 동시에 아이가 "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줌으로써만 그 또한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아이에게 그 자신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끌 강제를 부과하는 것이며, [...] 타인의 보살핌에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를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109). 즉 칸트에게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의 개별적인 의지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즉 다른 사회구성원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서만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칸트적 사회성sociability의 역설이 나타난다. 



물론 내 생각에는 이때 사회성에 기초한 자기제약이 보편적 이성·법칙에의 복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다소 고민의 여지가 있다. 양자 모두에서 스스로의 본성적 자유를 제약하는 과제는 필수적이지만,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과 도덕적 존재로서의 삶이 매순간 동일한 지향점을 갖는지는, 비록 칸트가 종종 양자가 포개어질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듯 보이지만, 불분명하며 앞서 살펴보았듯 교화·문명화와 도덕화는 구별된 단계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분명 칸트의 교육론은 (비록 유년기의 사회화 이전의 단계가 있음을 상정하지만) 자연상태가 아닌 civil society 속의 인간을 당연한 전제로 두되 동시에 그것보다 좀 더 높은 영역이 있음을 명시한다. 다만 이는 프로테스탄트적 전통에서의 은총과 유사한 초월성을 가진다기보다는(ex: 키에르케고르), 현세 내에서의 더 높은 상태라는 점에서 세속화된 세계에서의 "진보"의 이념에 가까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현세 내의 도덕적 삶의 담론이었던 18세기의 도덕감정론들과 비교해 볼 때, 칸트는 도덕감정에 따른 사회성의 실현이라는 논리를--물론 우리는 모든 경우에 감정·정념이 신성한 것·구원과 별개였다고 말할 수 없다--법칙·의무와 그에 대한 자율적 복종을 통한 사회성·도덕성의 실현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법칙·의무·복종으로 감정·정념을 대체하는 논의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꼽아보자.


먼저 "자유"를 둘러싼 논의를 떠올린다면, 정념론에 기초한 18세기의 골치아픈 딜레마, 즉 정념이 설령 때로 인간을 선한 결과로 이끌지라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남으며, 따라서 정념의 불안정성이 대두할 때 인간의 도덕성 또한 땅에 처박힐 수 있다는 불안감을 칸트의 논리는 일견 다시 잠재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스스로 법칙을 설정하고, 이 법칙에 자율적으로 따른다고 할 때, 이성에 기반한 법칙은 한편으로 유동하는 정념보다 더 굳건한 토대를 제공하되, 동시에 인간은 그 법칙에 자율적으로 복종하니만큼--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능동적'인지는 별개로 하더라도--항상 '정념에 따라 휘둘리는 인간'의 수동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정념론보다 더 강력한 '능동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컨대 '법칙'과 자율성에 기초한 칸트의 논리는 18세기 정념론에 기반한 도덕론에 비교할 때 도덕성의 안정성 및 고전시대 이래의 도덕적 패러다임의 중요한 축이었던 능동-수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18세기 정념론의 딜레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 중 하나로는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참고, 본 블로그에도 실린 나의 논문 「도리포스의 '감정교육': 『단순한 이야기』와 열정적 사랑의 문제」를 함께 보라: http://begray.tistory.com/353 ).


더불어 로크의 교육론에서 내포되었던 문제, 즉 "남성다운 덕성"(manly virtue)에 기초한 고전적인 자유 개념이 시민사회의 일원에게 부여된 요구와 쉽게 조화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었다면, 칸트의 입장은 ('객관적' 성격이 더 강한) '법칙'의 항목에 무게중심을 실어주면서 인간의 자기절제·자기통치의 목표를 국가와 시민사회의 요구에 더욱 강력하게 붙들어맨다. 푸코가 대항품행(counter-conduct) 논의에서 암시한 바 있듯, 자기통치의 덕성에서부터 시민-통치자로서의 덕성·자격을 끌어내는 고전적 시민론 및 공화주의적 도덕언어는 누군가 더 강력한 덕성을 보유했음을 입증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어느 누군가의 덕성이 지나치게 추구될 경우 그것이 기존의 정치체·사회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한다. 처음부터 지배계급으로서의 신사를 교육하는 데 목표를 둔 로크의 텍스트에서는 이 문제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이후 루소를 포함해 보다 넓은 계층을 목표로 한 교육론에서 그러한 '엘리트주의적' 논의는 문제적일 수 있다. 칸트의 논의는, 물론 그가 '이성' 개념을 통해 계몽된 전문가·학자의 자율성, 나아가 우월성을 선포하는 수사적 전략을 보여주었듯(<속설에 관하여>, <교육학>) 그와 같은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칙과 "복종"을 강조하면서 자율성과 국가적·사회적 의무를 보다 근접시킨다. 인간의 정신을 정념들 간의 투쟁으로 묘사하던 정념론의 전통과 대비할 때, 법칙과 복종이라는--아마도 보다 기독교적인?--축의 침투에는 확실히 수직적인 계기가 있다.



2.


서론에서 중요한 요점을 거의 짚었으니 본론에서는 흥미로운 대목만 몇 가지를 짚는다; 로크와 루소를 읽은 분이라면 이외에도 바로 비교/대조되는 부분들이 많을텐데 일일이 언급하진 않는다.


1) 특히나 초기의 교육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단지 훼방 놓지 말"아야 하는데(117), 이는 칸트의 교육 개념에는 분명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후에서 13번의 인용대목에서 언급하듯 칸트가 전적으로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나, "자연스러운 숙련성이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28).


2) "[코르셋, 신체교정수단 등] 모든 인위적인 장치들은 유기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자에게는 자연의 목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므로 그만큼 해로운 것이다. 자연의 목적대로 이성적인 존재자에게는 자기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자유가 여전히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교육을 할 때 아이들이 연약해지는 것만은 마땅히 막아야 한다. 그런데 단련은 연약함의 반대이다"(123): 이성적 존재자-"자기의 힘을 사용하는 법"-자유-단련의 개념적 연쇄가 드러나는 대목.


3) "아이들의 신체 능력을 교화할 때도 사회성을 육성해야 한다[...루소를 인용한 후 '강요된 우아함'과 야만성 모두 배격되어야 하며 사회 속에서의 독립성을 갖추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아이는 사회생활 중에 단지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짓 또한 하지 않아야 한다. [...] 이렇게 하기 위한 수단은, 오직 아이의 자연본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일이다"(132). : 사회성 안에서의 독립성의 추구, 그와 자연본성의 관계.


4) "어린아이들이 노동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노동을 해야만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아담과 이브를 언급한 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집중할 정도로 눈앞에 두고 있는 목적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인간에게 최선의 휴식은 노동 후의 휴식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노동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노동으로의 경향성이 교화되어야 하겠는가? 학교는 강제적인 교화이다. 만약 아이가 모든 것을 놀이로 보게끔 습관을 들이면, 이것은 극히 해로운 것이다. [...] 비록 아이가 이러한 강제가 무엇에 유용한지를 곧바로 통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이는 장차 이러한 것이 매우 유용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135-36). 교육, 노동, 강제-복종에 준수, 놀이와 노동(강제)의 구별.


5) "지성이 일차로 감각인상들을 따르고, 기억이 이 인상들을 보존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만사는 그렇게 되어 있다."(138) "역사는 판정하는 일에서 지성을 훈련시키는 탁월한 수단이다"(139). "가장 해로운 것은 아이들의 소설 읽기이다. 소설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읽는 순간에 오락거리가 되는 것 외에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 읽기는 기억을 약화시킨다. [...] 그래서 아이들의 손에 일체의 소설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은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소설을 지으면서, 스스로 상황을 다르게 만들어내고, 이리저리 공상 속을 헤매며 생각 없이 지낸다."(139). : 계몽의 인간학--기억이라는 역능faculty, 역사의 역할, 소설.


6) "아이들의 상상력은 조절되어 규칙들 아래서 사용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을 [너무 옥죄어서] 전혀 활동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143): 규칙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 무언가를 완전히 억압하거나 제어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제어하면서도 활용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과제.


7) "준칙들은 인간 자신에서 생겨나야만 한다. [...] 도덕성을 기초 지으려 한다면, 벌로써 해서는 안 된다. 도덕성은 신성하고 숭고한 것이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격하시켜 훈육과 동렬상에 놓아서는 안 된다. 도덕 교육에서의 첫째 노력은 품성[Charakter]의 기초를 놓는 일이다. 품성은 준칙들에 따라 행위하는 숙련을 말하는 것이다. [...] 아이들의 품성을 교양하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은, 아이들에게 사안마다 아주 정확하게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계획, 일정한 법칙들을 유념하도록 하게 하는 일이다. [...] 그들이 스스로 일단 법칙으로 정한 것은 나중에도 언제나 준수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150-51). : 준칙·법칙의 자율성; 자율적으로 생성한 법칙에의 복종.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역량으로서의 품성character; 19세기의 도덕적 언어에서 character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할 것.


8) "어린아이의, 특히 학생의 품성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복종심이 필요하다 [...] 복종은 강제적으로 끌려 나올 수도 있는 것으로, 그런 경우 복종은 절대적인 것이고, 또는 신뢰로 인해 끌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 그런 복종은 유가 다른 것이다. 후자의 자유의지적인 복종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복종도 매우 필요한 것인데, 그것은 어린 아이로 하여금 그가 장차 시민으로서, 법칙들이 설령 그에게 적의하지 않더라도, 이행해야만 할 그런 법칙들의 이행을 준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아이들은 일정한 필연성의 법칙 아래 종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법칙은 보편적인 것이어야 하며, 특히 학교에서는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151-52) : 법칙과 복종. 복종심-진정성-사회성이 학생의 품성에서 강조되어야 할 3요소로 제시.


9) 실천적 교육의 세 요소로는 숙련성-세간지-윤리성. 이중 세간지(Klugheit, 1900년 영어판에서는 discretion으로 번역)란 "[다른] 인간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 "아이는 자신을 감추고 자기의 의중은 들춰볼 수 없게 만들되, 타인의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는 그의 품성에 관해서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된다. 외양을 꾸미는 기술이 예의범절이다. [...] 가식, 다시 말해 자신의 결점을 은폐하고 저러한 외양을 꾸미는 일이 필수적이다. 가식이 언제나 가장은 아니며, 때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불순성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은폐는 어쩔 수 없는 수단이다. 사람들이 자기 성질대로 곧바로 행하지 않는 것은 세간지에 속한다"(159). : 르네상스 궁정 수신서book of courtier의 sprezzatura를 곧바로 연상하게 하는 대목. 이렇게 노골적으로 은폐·꾸미기를 강조하는 입장이 로크와 루소에게는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부정적으로 언급된다는 걸 상기한다면, 칸트가 과거 궁정인의 수신서에서나 통용되던 개념을 연상시키는 대목을 썼음은 무척 흥미롭다.


10) 윤리성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훌륭한 품성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먼저 욕정들을 제거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경향성에 관해 그것이 욕정으로 되지 않게끔, 그리고 오히려 어떤 것이 그에게 거절되면, 그것 없이도 지내는 법을 배우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인내하라'함은 '참아라, 그리고 견뎌내는 데 익숙해져라!'를 말하는 것이다"(160).


11) "사람들은 아이들의 심정을 유약하게 만들어 타인의 운명에 쉽게 영향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강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심정은 감정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의무의 이념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166) : 도덕감정보다 의무에 대한 복종을 강조. 18세기 영국·스코틀랜드 도덕철학과 대조할 것.


12) "기독교는 겸허를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비하를 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그대로 좇으면 인간은 자신을 완전성의 최고의 모범에 견주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인간이 타인에 비추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 그는 자신을 타인들 위로 높여 세우거나 타인들의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애쓸 것이다. 그런데 이 후자는 질투이다"(167). : 타인과의 비교를 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과 의무를 보도록. 사회 속의 존재이지만, 사회적 감정보다는 이성과 의무, 법칙을 통한 사회성의 준수라는 점에서 11번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영국 도덕담론과 견주어 읽을 대목.


13) "과연 인간은 자연본성상 도덕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본성상으로는 전혀 도덕적 존재자가 아니니 말이다. 인간은 그의 이성이 의무와 법칙의 개념에까지 고양될 때에만 도덕적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모든 패악으로의 자극[충동]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인간은 비록 이성이 그 반대 방향으로 추동하기는 하지만, 그를 자극하는 경향성과 본능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이 자극[충동]이 없다면 순결무구할 수 있을지라도, 인간은 덕을 통하여, 그러므로 자기강제에 의해서 오직 도덕적으로 선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168).


14) "종교는 우리 안에 있는 법칙이거니와, 그 법칙이 우리 위에 있는 하나의 입법자 겸 심판자에 의해 강력한 힘을 갖는 한에서 그렇다. 종교는 신의 인식에 적용된 하나의 도덕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도덕성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종교는 한낱 은혜 간구[은총 지원]이 될 것이다"(171). "그러나 [종교 교육을] 신학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순전히 신학 위에 구축되어 있는 종교는 결코 어떤 도덕적인 것을 함유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러한 종교에서는 한편으로는 단지 공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상을 갈구하는 의도와 마음씨를 가질 뿐이며, 그렇게 되면 이는 순전히 미신적인 예배 의식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이 앞서가야 하고, 신학은 이를 뒤따라가야 하며, 이것을 일러 종교라 하는 것이다"(172). "신과 의무의 개념을 하나로 결합하여 설명하면 아이는 그만큼 더 잘 신의 피조물에 대한 배려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그를 배움으로써 아이는 파괴와 잔혹으로의 성벽--아주 다양하게 작은 동물들을 함부로 대하는 데서 표출되는 바--에서 보호된다"(173). : 종교, 신학, 도덕의 관계. 단순한 은총의 추구 및 "미신"에 대한 거부, 도덕성의 우위. 신은 사실상 의무-도덕의 한 도구로?


15) 마지막은 성교육과 평등론. "자기 자신과 하는 것과 이성과 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가 낫다. 전자의 경우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소년이 성년이 되자마자 성인으로서, 자기의 종을 번식시킬 사명을 주었다. 그러나 개화된 국가에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는 필요요구들은 그가 언제나 자기의 아이들을 낳아서 교육시킬 수는 없게 만든다."(177): 자위보다 섹스. 자연의 요구와 시민적 요구의 대립, 후자의 우위.


16) "어떤 행위가 나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그 행위가 나의 경향성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행위를 함으로써 나의 의무를 이행하기 때문이다"(178).


17) "어린이아이가 이 같은[신분의 차이와 인간의] 불평등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 자신이 가복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177). "시민사회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청소년에게 차츰차츰 가르칠 수 있다"(178). "청소년에게 타인에 대한 인간애, 그리고 세계시민의 마음씨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 안에는 무엇인가, 1) 우리 자신에 대해서, 2) 우리와 함께 성장하는 타인들에 대해서 갖는 관심이 들어 있으며, 또한 3) 세계최선[세계복지]에 대한 관심도 틀림없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이러한 관심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하거니와, 아이들의 영혼은 이에서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세계최선[세계복지]이 설령 그들의 조국에 유리하지 않고 그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에서 기끔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179). : 인간의 평등과 세계시민적 교육목표의 강조로; 조국을 넘어선 도덕성의 지향.


18) "청소년이 생의 흥겨움을 향락함에는 미미한 가치만을 두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죽음에 대한 유치한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끝으로 매일매일 자기 자신과의 결산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생의 종국에서 자기 생의 가치에 관해 개산해볼 수 있을 것이다"(179). : 고전적인 자기수양·정신수양 전통을 상기(cf. 피에르 아도Pierre Hadot의 저작, 가령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및 Philosophy as a Way of Life. Spiritual Exercises from Socrates to Foucault 등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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