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고통 [130405]

Comment 2014. 3. 18. 14:07

* 2013년 4월 5일 페이스북


쌀쌀맞게 굴어야 할 때 쌀쌀맞아야 한다는 건 알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냉랭함의 적당한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대답하기 어렵다. 과소표현된 밀어내기는 상대에게 충분히 날카로운 상처를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후회를 낳고, 지나치게 강렬한 비판은 상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주었다는 이유로 후회를 낳는다. 특히나 자신의 삶에서 공정함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이에게 공격성의 표출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다. 모든 것을 눌러참는다 해도 그에 따르는 고통이 스스로의 선택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친다. 다수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단순히 침묵으로, 상대에 대한 무시라는 손쉬운 방법을 고르는 까닭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침묵을 따르는 게 옳은지, 자신과 상대에게 충분히 예의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떤 선택지도 얼룩을 남긴다고 한다면, 애초에 이런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 자체에 빠져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는 깨달음일 뿐으로 후회 자체의 쓸모없음만을 상기시킨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한 퇴로가 없는 곳에 놓여졌을 때 그리고 그 시절을 상처투성이로 지나치고 나서 자신의 상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사람은 아주 약간의 성숙이 자신에게도 생겼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진정한 성숙을 가져다주는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것임을, 상처란 자신에게 추가적으로 붙은 덤이 아니라 단지 메워질 수 없는 결여임도 함께 알게 된다.

우리는 고통을 통한 유대를 고통을 이미 겪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예정인 사람에 대해 느끼는 "나도 알아"라는 감정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대가 아니라, 자신이 타인의 지평을 이미 손에 넣었다는 오만과 그로 인한 착각인 경우가 더 많다. 고통을 통한 유대는 고통의 번역불가능성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누군가가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아는 것, 마지막으로 고통받는 이들 곁에 그저 있기라도 해야한다는 것을--설령 같이 있음이 그의 고독을 용인하는 형태로라도--아는 데서 초래한다. 고통의 유대는 우리에게 겸손을 강요한다. 나는 너의 고통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단지 네가 고통스럽다는 것만을 안다. 그렇기에 너의 곁에 있고자 한다.

왜 우리의 달력에 고통받는 자의 날, 약자의 날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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