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읽기 전 소개.

Intellectual History 2018. 4. 28. 13:29
번역 중인지도 몰랐던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Gareth Stedman Jones)의 책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_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_, Penguin[영국] / Belknap Press[Harvard UP, 미국], 2016)가 한국어로 번역출간되었다. 국역본이 1112쪽, 8만원인데 원저 자체가 768쪽임을 감안하면 이해할만한 범위다. 링크한 인터뷰(http://hankookilbo.com/v/6ed010e3ea214b56b910b71a3a490f0c)는 선정적인^^; 제목과 별도로 역자 홍기빈 선생이 한국에서의 논쟁을 의식한 측면이 있고 페이스북에서도 그에 관한 반응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나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한국에서 매우 협소한 통로로만 소개되어 왔던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학파, 그리고 그중에서도 더더욱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19세기 지성사 연구가 한국어로 처음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이 번역서의 출간을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홍기빈 선생의 입장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별개로) 신뢰할 만한 역자에 의해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반갑고 운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여름 쯤에 짧게나마 리뷰를 쓸 기회가 오기를 빌어보자--대신 이 책을 둘러싼 맥락 일부만 언급하겠다.

먼저 저자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이력은 특히 인문·역사 분야의 연구자라면 그 자체로 흥미를 가질만하다. 1942년 생 스테드먼 존스는 60년대 신좌파·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이후 수십년 간 (<뉴레프트 리뷰> 활동을 포함해) 19세기 영국노동계급 연구에 진력한다. 197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_Some Social Aspects of the Casual Labour Problem in London, 1860-90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the East End)_란 제목의 논문으로 근대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영국 맑스주의 사회사 전통에서 학적 경력을 시작했다. 테런스 레노드(Terence Renaud)의 리뷰에 따르면, 스테드먼 존스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당시 영미권에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있던 프랑스 구조주의(인류학·언어학) 및 사회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983년 _Languages of Class: Studies in English Working Class History, 1832-1982_의 출간과 함께 19세기 노동계급·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사와 '언어적 전회'(the linguistic turn)에 따른 방법론을 결합시키게 된다. 스테드먼 존스의 지적 여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편으로 좌파 맑스주의 운동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학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조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이전에 맑스주의 사회사의 대안으로 선택했던 프랑스 구조주의 식의 언어분석을 포기하고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학파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즉 언어·사상·담론 분석방법론에서 구조주의를 거부하고 보다 경험적·맥락주의적인 케임브리지 학파를 선택하는 쪽으로 간 것이다.
(Renaud의 리뷰는 https://networks.h-net.org/node/6873/reviews/1566298/renaud-stedman-jones-karl-marx-greatness-and-illusion 에서 읽어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비슷한 연배의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를 포함한 케임브리지 학파의 구성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스테드먼 존스의 '지성사적 전환'에 관해 적어도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스테드먼 존스는 1997년 스키너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 정치학(Political Science) 교수직을 물려받았고, 스키너가 2008년 런던 퀸 메리 칼리지 역사학과에 석좌교수로 임용되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또 다른 전진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자 두 해 뒤 2010년부터 같은 학과의 역사학 교수로 이직했다.
(스테드먼 존스의 CV는 http://www.histecon.magd.cam.ac.uk/gareth_stedman-jones.htm#CV 를 참조.)

둘째, 스테드먼 존스는 정치사상사학계의 가장 권위있는 책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시리즈 19세기 편의 공동편집을 맡았으며 50쪽 가까운 분량의 17장 "청년 헤겔주의자들, 마르크스와 엥겔스"(The Young Hegelians, Marx and Engels)를 썼다. 실제로 해당 책을 읽어본 분은 아시겠지만(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다른 시대 시리즈에 비해 1.5배쯤 되는 두께다!), 한편으로 한국에 지난 수십 여년 간의 지성사·정치사상사가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유럽정치사상사가 18세기 유럽지성사에서 J. G. A. 포콕·이스테반 혼트 등이 제출한 바 같은 몇 가지 거대서사grand narrative로 요약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너무나 많은 변화들이 있기에 19세기 정치사상사 연구가 한국에서는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으나 지금도 이 시기에 관해 수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스테드먼 존스도 그 일원에 들어간 걸로 보인다.

셋째, <카를 마르크스>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적인 논평들에서 지적하듯, 또 그에 대해 스테드먼 존스가 짧게 응답한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이 책 또한 18-19세기 유럽의 지적·정치적 논쟁의 맥락을 복원하고 마르크스의 삶과 텍스트를 당대의 언어적·사상적 맥락 속에 매우 구체화된 형태로 위치시키고자 했음은, 다시 말해 케임브리지 학파의 방법론을 상당부분 수용했음은 분명해보인다. 실제 한국어판 목차를 훑어보면 저자가 당대의 정치적 맥락만이 아니라 그동안 진행된 18세기 지성사연구 또한 일정 부분 시야에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나 자신은 혁명기 전후에 발생한 수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정치언어 상당부분이 18세기적인 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논평들이 맑스 텍스트의 해석이나 저자의 입장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맑스/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논란을 피하기란 극히 어렵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저자의 역사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유의미한 반론이 등장한 것 같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비판적인 논평은 한국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다: https://wspaper.org/article/20347 . 2018년 2월 _Global Intellectual History_에 게재된 스테드먼 존스의 짧은 반론은 https://doi.org/10.1080/23801883.2018.1433452 를 참조: 한국어판 목차를 볼 때 이 글이 수록된 것 같지는 않다.)

내 또래 이하 세대의 연구자들에게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 마르크스에 대한 흥미가 상당히 감소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시대적 조건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특히 지적인 관심사를 갖춘 독자들에게 주의깊게 읽힐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축적된 19세기 유럽지성사의 궤적을 가늠해보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아날·포스트이론 식의 문화사가 '새로운 역사' 혹은 '가장 발전한 역사방법'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재의 풍토에서 그것과 다른 방식의 접근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대하기를 바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책을 공들여 번역해 준 역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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