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전반부 일기: 한계의 피안, 활동, 귀향과 <성>

Comment 2018. 4. 16. 11:21

1. 책임의 피안 (4월 4일 오전 페이스북에 포스팅)


목감기 덕택에 세 시간도 못 자고 깨버렸다. 새벽녘까지는 깊은 잠을 약속하는 장대비 소리는 이제는 이따금씩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이 되어 불규칙한 메트로놈처럼 잠을 방해한다. 내 독서는 그렇다치고 조교로 수업참석도 해야하고 지인의 원고도 읽어야 하는데 스스로의 지적 능력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자신이 없는 하루다. 시작부터 여기저기 안쓰러운 일들을 접한다. 너무 많은 일을 떠맡은 사람이 뒤늦게 자신의 한계를 토로하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를 넘어선 변화로 인해 (그 자체로는 또 그럴 수 있는) 의혹을 받는 광경을 보기도 한다. 당장 의지에 반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 또한 언제고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걱정한다. 그래도 일단은 사람을 최대한 선의에 입각해서 봐야지, 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덧붙이면서 말이다.

며칠 전의 자리에서 질문 하나를 받았다. 공공의 논의장소에서 시비를 가릴 때, 스스로와 견해가 판이하게 다른, 아니 단지 다르다는 걸 넘어 "그르다"라고 확언하게 되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는가? 일단은 최대한 상대방이 나름대로의 선의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다고 믿고 그 선의에 입각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자 한다, 그것이 공적 발언에서 상대방 및 '우리 모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라는 답이 떠올라 그대로 답했다. 물론 그 선의의 범위를 넘어선 사안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한다는, 보다 스스로의 성격에 가까울 원칙을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본래 원만하지 않은 인품에 생각하는 바를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는 때가 잦(았)다. 이런 내가 "최대한 선의를 갖고 보자"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게 된 기이한 결과는 아마도 늘 그렇게 말씀하시는 지도교수님과의 시간 덕택일 것이다. 선생님은 좀처럼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평가도 냉정하게 내리시는 분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의 싫은 언행에 대해 평할 때도 일단은 "최대한 선의를 갖고 보자면", 을 맨 앞에 두고 이어나가신다. 되도록 충돌을 피하는 선생님과 달리 옳다고 믿는 바는 종종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밀고 가는 성격이지만, 이런 대화를 몇 년 간 꼬박하다보니 내게도 그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게 아닌가 싶다. 심신이 흐리멍덩한 상황에서도 일단 그 문구부터 먼저 떠오르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경험들은 사람에게 언제고 자신의 의지를 넘어선 일들이 둑을 무너트리는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넘는 과도한 업무량이라는 물질적 사실은 사람을 무릎꿇리며, 아주 작은 약 몇 알이 성향을 매우 놀라울 정도로 바꿔놓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는 일은 다들 무척 두려워하지만 의외로 쉽게 발생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자신이 해명할 수 없는 장소에서 '사회적 인격'이 규정되어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일도 허다하다(이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말하기 어렵다). 문득 군 복무 중일 때 나에 대해 무척 놀라운 이야기를 은밀한 사실처럼 전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돌아와 그 소문을 듣고는 한동안 나를 향한 시선에 무엇이 묻어있는지 의심과 두려움을 떨칠 수 없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아마 나 자신도 언제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시선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게) 그럴 것이다. 심지어 모두가 분명한 선의에 입각한 경우에서조차도, 오늘 목격한 일들처럼, 우울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계는 선의를 초월하는 일들로 가득하고, 사람이 어디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책임의 한도를 넘어서는 결과 앞에서 우리는 타인을,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까. 사려(prudence)가 미덕으로 꼽히는 것은 종종 답이 없는 문제를 대할 때의 선택인데, 나는 현재까지는 이보다 나은 선택지를 알지 못한다.



2. 4월 11일 밤 페이스북에 포스팅

이틀간 열심히 떠들고 돌아왔다.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는지 지친다. 지금부터 금요일까지는 다시 세미나 리딩, 내일은 빨래를 빼고 나면 하루 종일 책과 논문만 읽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주말에는 잠시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 관련 사안을 다루고 오면 이제 4월도 절반을 지난다. 문제는 그 다음에도 처리할 일들이 더 남아있다는 것. 4월은 끝까지 강행군일 예정이다(4월 말까지 기고해야 할 서평도 하나 있다). 그 뒤에는 정리할 거 정리하고 B&R 세미나 포함 드디어 논문 밑그림 작업부터 시작.

*4월 10일 국회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미투운동 피해사례 성토대회 및 문제점 진단 토론회: Me Too 에서 With You로>(유은혜의원실·전국대학원생노조 주관) 자료집: https://bit.ly/2JzLISV

*4월 11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촉구 간담회>(노웅래의원실·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준) 주관) 자료집: https://goo.gl/eFimDN

4월 내에 포스팅하고 싶으나 목록을 작성하다보니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리스트:

-<성의 역사> 4권 출간 기념, 1980년대 푸코 관련 리딩 리스트(뼈대 다 만들어놓고 문헌설명을 안 붙이고 있...)
-위 내용에 덧붙여 Peter Brown, _The Body and Society_에 대한 짧은 독서노트
-홉스 세미나 리딩 리스트&간단한 주제 해설
-<은하영웅전설> OVA 정주행 기념 짧은 노트(고백하자면 방학동안 논자시 준비하다가 스트레스 풀겸 OVA를 보기 시작해서 외전까지 거의 다 봐 간다...)
-이번 미투 관련 토론회&간담회 참여하면서 작성한 문헌을 보충/정리한 내용
-위 내용에 덧붙여 대학원 인권/교육연구환경 활동 관련 지금까지 썼던 발표문 일부를 정리해서 모은 글
-개신교 우파와 현 정부여당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기사를 모으고 코멘트한 글. 마침 오늘 행사에서도 여기에 관한 질문이 나왔는데, 정부여당과 개신교 그룹의 관계를 고려할 때 현 정권 하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유의미한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역시 뼈대는 다 만들어놓고 언제 쓸지 모르는 글.
-이번 행사 후기. 교육부&교문위를 모아놓은 대화 테이블이 만들어진 일은 물론 기념비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곧바로 제도적 진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활동을 해야만 하는가, 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다.




3. 귀향과 <성> (4월 14-15일 자정 페이스북에 포스팅)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직 투표권을 유지하고 있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난 몇 주 간의 피로는 이미 눈꺼풀 위로 기어올라와 층간소음을 만들어 내는 아이들처럼 이따금씩 발모둠을 쿵쿵 뛰고 있던 터, 채 서울을 떠나기도 전에 망막이라는 이름의 극장은 일찌감치 커튼을 내렸다. 의식의 스위치를 몇 번 끄고 켠 뒤 이제 눈을 감는다고 잠들지는 않는 때가 되어 좌석등을 밝혔다. 조교를 맡은 수업에서 읽어야 할 카프카의 <성>을 꺼내어 한 장(章)을 읽고 자고 다시 일어나 또 한 장, 을 반복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범우사 판으로 읽은 뒤 거의 15여 년 만에 펼친 것은 창비 판이다. 친절한 주석과--창비 판 역자는 유대교적 맥락을 암시하는 주석을 곳곳에 달아놓았다--한결 더 가독성 있는 텍스트 속에는 여전히 낯선, 오로지 그 낯설음이 여전하다는 점에서만 친숙한 세계가 있다.

1)

'성숙한' 독서에의 의무감 혹은 도전욕으로 충만하되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줄거리와 활달하고 기운찬 인물을 좋아하던 15년 전의 독자에게 K의 이야기는 무척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세계는 너무나 심각하게 엉켜있어 불가해한 덩어리 같은 느낌을 주는 실뭉치와 같았으며, 그 앞의 인간은 세계를 한 가닥씩 차분히 풀어내어 마침내 그 끝의 진실을 밝히는 여정을 밟아 나가기에는 의지도 끈기도 지성도 부족함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 인물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오락가락하며 잠들지 말아야 할 바로 그 순간에 고개를 떨구고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기가 일쑤라, 명백히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되풀이되는 꼴을 보던 10대의 독자가 "제기랄, 이 답답한 멍청이가 똑바로 좀 하지!"라고 짜증을 내도록 만들곤 했다. 역자 후기에서 막스 브로트가 제시한 소설의 결말을 읽고나서야 답답함이 아주 약간 가시는 걸 느꼈던 그때의 나는 차라리 한스 카스토르프가 세템브리니의 장광설을 듣다가 입대해버리는 꼴이 좀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대학에서의 전공을 생각하면 매우 의외의 일이지만, 고등학생까지의 내게 모름지기 고전소설이란 것은 조이스 정도를 제외하면 오로지 독일인들의 작품 뿐이었다. 처음 영문학을 선택한 것도 섬나라의 흙냄새 나는 영국인들이 아닌--사실 18-19세기 영국소설은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미국의 거대한 장르소설 시장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30대 초중반의 박사수료생이 아직 물기가 남은 길위로 달리는 한밤의 버스에서 읽는 카프카는 물론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제 나는 K의 '남자답지 못한' 면모를 좀 더 흥미롭게 읽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 위에서 온통 피로해져 낯선 집을 두드릴 때, 성에서 온 호리호리한 남자들에게 미묘한 이끌림을 느낄 때, 바르나바스와 팔짱을 끼고, 아니 그의 팔에 매달리고자 할 때, 프리다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정작 그녀와의 성적인 접촉에 몇 시간을 허비할 때, 탁자 밑에 숨은 그의 가슴을 프리다가 계속 발로 밟아댈 때, 불과 하루이틀 전까지 알지도 못하던 프리다와 마치 결혼이라도 마음먹은 양 이런저런 말들을 뱉어낼 때...

이 세계도 좀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법 앞에서>가 잘 요약하듯 오직 한 가지, 즉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삶의 목적으로 주어져 있으면서도 다름아닌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금지된 카프카적 세계의 기괴함은 여전하다. 그러나 나는 <성>의 세계가 (<실종자>나 <소송>과 달리) 명백히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좀 더 신경 쓴다. (주로 군대·공무원 조직과 접한 경험을 떠올리며) 성으로부터 내려오는 관료시스템이 내뱉는 결과물이 그 바깥의 세계에서 해독할 수 없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귀중하고 신성한 무언가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단지 추상적인 불가해함이 아닌 일상적으로 존재가능한 경험적 사실로 이해한다. 그리고 어느날 관료제의 일원이 우연히 '바깥'의 세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끌어안은 갖가지 서류뭉치와 기념물을 마주하게 되면 별 생각없이, 어쩌면 약간은 한심하다는 태도로 그게 어디에든 널려있는 허섭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주고 다시 자기 일을 하러 가버릴 것이다. K의 기나긴 모험 혹은 투쟁이 그저 사소한 '행정적 착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약간 귀찮아하며 말해주듯 말이다.

2)

만약 관료제의 안팎에 서본 일이 있는 독자라면, <성>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는 현실의 세계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흔한 일에서 구체적인 디테일을 좀 잘라내고 단지 그 패턴을 조금 길고 복잡하게 꼬아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소설에 붙은 수많은 연구와 주석들이 마치 자신에게 발생한 '행정착오'의 사소함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이 스스로의 운명에 엄청난 의미를 (잘못)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조소할 수도 있다(마치 본인이 벌점으로 인해 외박이 취소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병사가 엄청난 불행과 부조리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 사실 그건 중대 행정반 컴퓨터에서 숫자를 하나 잘못 입력한 계원의 어설픈 일처리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행정관료기구의 내부에서 보면 그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처리에 불과한 것이 기구 바깥의 '통보대상자'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말씀처럼 절대적인 명령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현대의 일상과 거의 신학적인--주로 욥기를 연상케하는--섭리론이 너무나 쉽게 포개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로 읽을 수도 있다. 그 일상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독자에게 이 모든 과정은 한편의 기괴한 블랙코미디임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블랙코미디의 작동이 누군가에게 삶의 목적 혹은 그 이상으로 세계의 운행과 섭리에 대해 고뇌하도록 만들 정도임을, 마치 주변 빛의 운동방향까지 휘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중력을 행사하기도 함 또한 분명하다. 가장 세속화된 세계는 곧 가장 마법화된 세계이다. 세계는 사소하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이 초래하는 불합리성 때문에 신성한 것이 될 수 있다.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것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세속화의 결과물이 곧 신성함의 토대가 된다. 카프카가 의도하고 떠올린 바가 무엇이든, 그가 이러한 아이러니를 몰랐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의 대화들이 (아마 행정·법적인 논리에서의 '사실관계 확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인지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와닿을) 기괴한 유머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유효한 것만이 유효한 사실이며, 유효하지 않은 것들은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 사실이 아니다. 법과 행정은 세계의 복잡성을 단순하게 확정하기 때문에 유용하다. 그러나 소거되는 대상에게 그 유용함은 행복과 완전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3)

밤 10시가 되기 전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20분 정도다. 많은 지방소도시가 그렇듯, 이 시간 대로변에는 10대 아니면 4-50대 이상들 만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닌다. 그나마도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눈에 띄질 않는다. 쉭쉭거리며 오가는 승용차들만이 인간이 떠난 도시를 점거한 짐승들처럼 거리의 생기를 돋운다. 몇 시간 전에 비가 그친 듯 바닥은 얼룩덜룩하다. 이따금 벚꽃잎이 물기를 머금고 바닥에 무리지어 들러붙었다. 그 위엔 빗줄기에 꽃봉오리들만을 드러낸 벚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낮에는 벚꽃이 졌다는 아쉬움만을 남길 나무들은 밤의 어둠 속에서 붉게 피어난다. 큰 사거리에 오면 이곳에서는 제법 높은 축에 속하는 빌딩이 나오는데, 그 건물에서 빛을 발하는 건 오로지 층지어 달린 간판 글씨들 뿐이다. 멀찍이 휘청이며 걸어오던 한 두명의 행인은 잠깐 눈을 뗐다가 돌아보면 온간 데 없이 사라졌고 빈 자리는 어느 가게의 시끄러운 노래만이 채웠다. 음악은 그 자체보다 텅 빈 길거리의 울림으로서만 더 크게 존재한다.

어둔 골목으로 발길을 내던졌다만, 띄엄띄엄 박힌 가로등의 불빛은 좀처럼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아서 골목은 어둡다고 할 수가 없다. 곳곳에 패인 도로의 틈새는 습기를 머금어 거미줄보다도 복잡하고 또 무질서한 그물망을 만들었다. 언덕을 올라가며 아파트 뒤의 쪽문으로 향한다. 아직 옛날 식의 가난한 단층집들이 남아있는 쪽문길엔 진흙더미가 여기저기 남아있다. 어느덧 느껴지는 바람은 시원한 것보다는 차갑지만 춥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쪽문에 들어서기 전 언덕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본다. 그 위에 가벼운 잿빛의 먹구름이 온통 이 땅을 덮어놓았다. 상자 속의 존재에게 상자가 세계의 전부이자 끝이듯, 하늘은 빈틈없이 뒤덮은 구름층은 이곳이 무한한 우주의 일부분이 아니며 여기가 네가 나갈 수 있는 세계의 끝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아파트 꼭대기와 맞닿을 듯하게 내려와있는 운해(雲海)는 우리의 세계가 심지어 천궁도의 구체(球體)보다도 작으며, 이 작고 좁은 세계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삶의 목표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압박감을 준다. 저 멀리 건물들 사이의 지평선을 보면 구름이 없는 검은 공간이 보이지만, 그것이 구름 경계선 또한 끝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곳 또한 구름 아래의 세계이며 단지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밤의 그늘이 드리운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쪽문 안쪽에 들어섰다. 진흙밭 위에 누군가 벽돌 두 개를 올려놓아 신발을 더럽히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는 서늘하면서도 무겁다. 인적없는 놀이터를 지나치니 빈 자리가 없는 주차장이 나온다. 자동차들은 밤의 외양간에서 고요히 숨소리만을 내뿜다 가끔 뒤척거리는 소떼들처럼 가만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저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한번도 내게 익숙하지 않았던 양 자리한 공간을 너무 황급히 떠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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