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Critique 2018. 3. 18. 23:00
약 일주일 전 매일경제는 "대학의 위기"란 표제 하 한국 5개 대학(연세대, 울산과학기술원UNIST, 중앙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총장들이 참여한 긴급좌담회를 개최하고 이를 간추려 묶은 내용을 기사화했다(링크는 가장 아래에 옮김). "현재 200개에 달하는 국내 4년제 대학 가운데 약 50개는 이미 망했다"는 강력한 경고성 멘트로 시작하는 오프닝기사는 10년째 등록금 동결·학령인구수 급감이라는 두 가지 위기요인을 서두에 건다. 핵심은 표로 제시되는 "대학 발전 발목 잡는 5대 규제"로서, "등록금 동결, 총장 임기 제한·총장 직선제, 입학 정원 규제, 신입생 선발 방법 규제, 교수 임용 관련 규제" 등이 대학의 생존과 발전을 가로막는 주 원인으로 지목된다. 요컨대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규제가 대폭 철폐되고 대학운영의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특히 두 번째 링크의 상세기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단순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의제들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포맷 특성상 발화자들의 본의가 매우 간추린 형태로만 전달되었음을 고려해야겠지만) 총장들의 주장이 오늘날 '대학의 위기'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규제철폐·자율성 확보라는 두 가지 주장 자체는 이미 10여 년 가까이 반복되어 온 구호이며, 이들의 비판점 또한 현실의 복잡함을 매우 단순하게만 요약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율성 존중의 요구는 사립대들이 정부재정지원을 그만큼 적게 받겠다는 의사의 표시인가, 아니면 대학이 돈은 받되 그에 따른 '사회적 고려'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는 본심의 완곡어법인가? 불필요한 행정소요에 대한 수많은 악평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부재정지원이 그만한 책임성 없이 집행될 수 없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 많은 자율성과 현행 수준의 재정지원을 요구할 때, 대학들이 이를 원한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책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없이 결실만을 바라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가령 총장직선제의 비효율성 지적은 간선제 혹은 이사회지배형태에서 발생하는 견제의 난점·비민주성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외면하며--예컨대 혹자가 지적하듯 서울대 성낙인 총장체제가 시흥캠퍼스 밀실추진에 따른 학생소요로 인해 임기 절반도 넘기지 못한 채 레임덕에 빠져든 상황은 이사회중심 지배구조의 난점을 보여주는 사례기도 하다--외국인 학생/교수 유치 문제의 경우 정작 그들의 원활한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준비를 해온 곳이 얼마나 되는지, 애초에 표준적인 외국인 학생/교수 정착 모델이 준비 및 공유되었는지와 같은 반문에 대한 답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당연하지만 '국제화'는 단순히 외국인 및 영어강의의 수라는 양적문제만이 아니라 제도와 생활환경의 구축, 불편수렴창구의 확보와 같은 질적·정책적 문제이기도 하다). 대입에서 대학의 자율성은 원칙적으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현재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어떻게 완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려없이 관철되리라 믿는다면 무척 나이브하다는 평을 피하기 어렵다. 수 년 전부터 전국 대학에서 불거져온 대학 내 인권문제 관련 대학의 개선방안은 논의테이블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4차산업혁명을 준비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본적인 교양교육시스템의 부재와 전근대적 대학원생 교육환경에 대한 지적과 개선방안 같은 필수적인 논의대상은 외면한다. 더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더 많은 돈과 더 합리적인 제도환경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역량의 증명없이 무작정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자율성이 필요하다고만 하는 것은 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 스스로가 인정하듯 "대학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4번째 기사링크).


2.

물론 나의 목적은 총장들의 문제제기를 비난하는 데 있지만은 않다. 솔직히 말해 나는 학령인구수에 따른 대학구조조정 문제는 물론, 대학의 재정문제, 교원확보문제, 대학의 합리적 운용을 위한 제도적 환경의 구축과 같은 의제들이 이른바 '진보적' 진영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2010년대 한국 고등교육에 대한 진보진영의 주요 관심사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논의를 다소 단순화하는 게 허용된다면, "학벌" 혹은 지역간·학교간 서열 철폐, 대입에서의 학생·학부모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입무상교육을 지향하는) 대학등록금 부담 경감 등이 그것이다--실제로 대학 내 인권·성폭력 문제 같은 경우에도 극히 최근까지 전통적인 진보정치에서는 거의 조명받지 못했으며, 2010년대 중반 주요 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의 고등교육 관련 공약을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확하다. 물론 진보진영의 고등교육의제가 갖는 고유한 가치가 무시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학벌철폐, 대입부담완화, 등록금부담완화와 같이 고전적인 평등·복지 개념에 기초한 의제들이 과연 오늘날의 대학운영에 어디까지 들어맞는지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중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과 함께 한국 고등교육환경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친 등록금 경감 의제를 가볍게 검토해보자. 이 운동은 90년대 말부터 엄청난 속도로 상승한 등록금 증가폭을 억누르고 학부생·학부모들의 부채 증가를 둔화시켰다는 점에서--적어도 그렇게 생각된다는 점에서--분명 나름의 의의가 있다. 문제는 다수 대학의 운영이 등록금에 기초하고 있는 한국 대학의 조건에서 이러한 압력이 대학 운영비, 특히 인건비의 추가 지출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2010년대에 걸쳐 전공별 정원재조정과 함께 강의전담교수 등의 비정년트랙이 대대적으로 대학에 도입된 걸 볼 수 있다. 이후 명확한 조사가 있어야겠지만, 사적인 인터뷰에 기초할 때 대략 다음과 같은 흐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대학들은 처음에는 정규직 교원임용 대신 시간강사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후 정부기구로부터 정규교원에 의한 강의비율을 높이라는 압력이 주어지자 시간강사를 줄이고 비정년트랙을 늘리거나 혹은 정규교원의 수업·실적부담을 대폭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대학(원)의 연구·교육에서 질적 측면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이름있는 수도권 사립대조차도 정규교원에서 매우 많은 양의 강의·실적을 요구한다는 것이 수업 및 연구성과의 질을 크게 하락시키는 것, 결과적으로 수업을 듣는 학부생과 논문을 읽을 다른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크게 하락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수많은 대학원생들의 졸업 후 직업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해외의 높은 몸값을 요구하는 뛰어난 연구자의 유치, 혹은 미래의 연구자 네트워크를 양성하기 위한--학술장을 주의깊게 관찰해보면, 오늘날 뛰어난 연구성과는 골방에서의 시간 이상으로 다른 탁월한 연구자들과의 깊은 교류에 빚지는 바가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각종 비용지원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신진연구자·학문후속세대의 잠재력을 고학력 실업으로 매몰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불어 교원 1인당 학생 수를 끌어내리는 것과 같이 고등교육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의 인건비·연구환경 투자액을 보강하는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이 문제는 결국 대학의 재정운영을 어떻게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대학의 재정을 어떻게 더 보강할 것인지에 대한 직시를 하지 않고는 답하는 게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전면적인 등록금 자율화를, 다른 누군가는 전면적인 국가재정 투입을, 혹자는 사립대 등록금 자율화 및 국립대 재정지원 집중을 이야기하지만, 아직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건 진보적 고등교육연구자·단체들이 재정문제 및 이와 결부된 고등교육혁신문제를 계속해서 외면하다간 궁극적으로 고등교육 문제에 대한 주도권 자체를 상실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재단적립금 축적·불필요한 건물증축·(인하대 전 총장 사례 등의)잘못된 투자 등이 반론으로 제기되지만, 깊게 파고들면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을 이 세 가지 사항이 실제로 '현재 한국 대학들이 등록금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대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반론을 뒷받침하는지는 의문이다. 가령 적립금이 대학의 더 많은 재정확보를 목표로 각종 사업·증권투자에 사용된 경우, 재단적립금 축적은 오히려 대학등록금 동결로 인해 대학운영비의 확보가 제약된 상황에서 재정을 확충하려 한 (유감스럽게도 종종 아름답지 못한 수익률을 낳은) 노력의 예정된 귀결이라는 재반론까지도 가능하다. 다만 이제 재단적립금액이 얼마나 높은지를 지적하는 것만으로 논의가 진전될 수는 없음을 지적해두고 싶다.]


3.

87년 이후 30년 간 한국의 대학은 그 물질적·제도적 여건과 사회적 역할 모두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30년 전 한국의 대학생은 사회 전체에서는 소수의 엘리트였고,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현저히 부족한 지식·교육수준으로도 졸업 후에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다. 학문분야마다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이후 30년 뒤에도 큰 문제없이 통용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전문성을 축적한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정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많은 변화가 급격히 초래된 지난 30년 간 사태는 심각하게 바뀌었다. 이제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공부하고 졸업한 학부생들이 자신의 견해를 자신있게 밝혀도 존중받을 수 있는 분야는 매우 제한적이다. 대학원생의 수가 30만명을 돌파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며, 지식의 전문성은 하나의 박사학위가 아니라 수 명 수십 명의 박사들이 군집한 학계에서나 간신히 담보된다는 걸 이해하는 교육받은 독자들의 수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요컨대 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지식의 폭, 양, 깊이 모두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대학(원)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졸업생들을 더 깊이 교육시키고 더 유용한 지식을 더 많이 생산해야 하는 의무를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고등교육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를 학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아직 충분히 등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국 대학의 위기에 관해서는 입장만 다를 뿐 무척 관성화된 형태로 반복되는 주장들, 반대로 개별적인 학생, 직원, 교수 등의 국지적 관찰에서 비롯된 응답없는 외침만이 주어져 있다. 대학원생 연구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서 대학(원)교육을 연구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한국의 고등교육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연구성과의 추천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아직 한국에서 고등교육환경·제도 등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후 언론·입법부와 행정부를 매우 좁은 창구로나마 들여다보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렸다--교문위 의원실들 중 장기적인 안목에서 대학(원) 연구환경에 대한 인식을 가진 곳은 (그나마 최근 두드러진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애초에 대학원 담당부서가 부재한 교육부는 대입을 제외하고 대학교육에 대한 이해도를 갖추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국 언론의 전문성 결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 덧붙이지 않겠다. 연구의 차원에서든, 행정·제도적 의사결정의 차원에서든, 한국에서든 아직 고등교육과 대학(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행위자·기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은 자명하다. 한국의 대학은 인문사회 분야에서든 과학기술의 분야에서든 오늘날의 복잡하고 고도화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충실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제도적·재정적·인적 미비함만이 아니라 애초에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인식하고 대학의 목표와 제도를 새롭게 설정하며 그에 필요한 고등교육문제를 규정·분석할 수 있는 시선 자체가 부재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회는 문제를 분석하지 않고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문제를 파악하지 않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현재 국회에서 대학구조조정 문제를 둘러싸고 진전없는 논의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대학(원)에 요구되는 책임의 무게는, 그 책임이 실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국가·사회가 떠안을 부담의 무게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한 교문위 의원실 구성원은 대학 교육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갖고 있냐는 나의 질문에 "급변하는 오늘날 장기적 전망을 갖는 건 불필요하다"고 답했다. 그 말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영미의 이른바 '좋은' 대학과 한국 대학의 교육연구환경의 차이를 가늠해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유학없이 제대로 연구자를 양성할 수 있는 한국 대학원 학과가 얼마나 되는지 답없는 질문을 던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연구자들 없이 뛰어난 지식이 생산될 수 없으며 뛰어난 지식없이 사회가 순조롭게 발전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대학을 현대화하는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매일경제 "대학의 위기" 기사링크묶음>

1) "대학의 위기: 5개대학총장 긴급좌담회" 오프닝기사
http://m.mk.co.kr/news/headline/2018/158963

2) 좌담회 상세기사
http://m.mk.co.kr/news/headline/2018/158966

3) 교육부 입시통제 비판
http://m.mk.co.kr/news/headline/2018/158967

4) 현재 대학의 대응: 4차 산업혁명 대비?
http://m.mk.co.kr/news/headline/2018/158968

5) 작은 재정에 따라 교수유치 경쟁에서 밀린다
http://m.mk.co.kr/news/headline/2018/158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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