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대학원, 인문학계의 위기에 관하여

Critique 2017. 7. 21. 06:47
http://v.media.daum.net/v/20160518143051591

이 짧지만 분명한 기사를 읽으며 중요한 것은 인문학계가 망하리라는 위기감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위기를 만드는지,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시켜야 하는지를 사고하는 일이다. 여기에 필수적인 것은 현재 한국의 평균적인 인문계 대학원이 학생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제공하고 또 제공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새벽에 쓰는 짧은 감상이니만큼 간추려 말한다면, 첫째, 나는 현재 대부분의 한국 인문계 대학원이 그다지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해 한국의 박사과정 중 박사학위취득자에 걸맞은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교육환경을 준비해놓은 곳이 있다는 말은 하기 어렵다. 유감스럽게도 석사과정 또한 별다르지 않은데, (개별 교수나 연구실이 아닌) 학과 단위에서 학생이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학습·훈련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곳도, 교수들 간에 평균적으로 이 정도까지는 가르쳐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자리잡은 곳도 거의 없다. 학문분야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방법론 및 각종 제도적 지원의 활용을 포함해 연구자로서 작업·자기훈련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적인 틀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곳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적인 글쓰기를 꾸준하게 지도하는 곳도 매우 드물다(거의 모든 페이퍼에 대해 길든 짧든 논평과 첨삭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학과에서 공부하다가 다른 학과 대학원생들의 지도실태를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인문학계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공공연하게 공유하는 비밀이 하나 있다면, 학위와 교수직이 누군가의 지적 역량은 물론이고 신뢰할만한 글쓰기 능력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과에서 그런 걸 가르친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둘째, 행정과 제도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의 장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전자학술자료 이용범위부터 학교별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필요한 논문을 다운 받기 위해 "서울대 친구" 하나 쯤은 있어야 한다는 씁쓸한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인문계에 국한되지 않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자면, 놀랍게도 한국 대학들은 대학원에 대한 제대로 된 행정지원 시스템을 거의 꾸려놓지 않았다(인문계 대학원에 국한할 때, 적어도 나의 좁은 시야에서는 학과별로 대학원 행정을 담당하는 조교/직원을 둔다는 개념 자체가 있는 학교를 서울대 말곤 들어보지 못했다). 수도권의 유명 사립대가 개별 학과·단과대가 아닌 전체 대학원 업무를 고작 한 자릿수 인원으로 커버하는 일은 전혀 예외가 아니다. 대학원생들의 커리어를 관리해주는 전문성 있는 교직원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논문심사과정조차 안정적인 규정화가 안 되어 학생들과 교수들이 알음알음 처리하는, 그래서 그에 수반하는 잡무를 학생들이 떠맡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대학원생들이 장학금이나 조교업무 기회를 포함해 학생이자 연구자, 교육(보조)자, 학내 근무자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공평하게 전달받지 못하는 것은 이런 문제의 결과 중 하나다. 수업TA가 단순히 업무보조가 아니라 예비연구·교수자를 위한 훈련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제대로 숙지하는 대학은 드물며, 따라서 (특히 학부수업의 첨삭·글쓰기 지도를 수행하는) 조교들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제도화되어 이뤄지는 일도 좀처럼 없다. 유감스럽게도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이들을 포함해 많은 인문계 교수들은 제도와 행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이러한 무지는 학문후속세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인문학 전공자의 시야 자체를 협소화시키고 있다--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블랙코미디는 언제쯤 사라질까 궁금하다..

셋째, 가장 슬픈 사실은 한국에서 각각의 인문학 전공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른바 제도권 인문학계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게 된 채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우리 인문학자들은 사회, 국가·공동체,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또 맺을 수 있는가? 기존에 존재해오던 크게 세 가지 입장은 제각각 나름의 이유로 위태롭다. 특정한 학적 지식의 (재)생산을 필요한 전문적인 역량을 제공한다는 답변은 애초에 해당 지식영역의 존재이유raison d'etre가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승인될 때에만 유효하며(인문학 전공자들은 "기초학문"이라는 바리케이드로 후퇴했고, 이 전략은 소수의 '명문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원의 생존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도 첫 번째 항목에서 지적했듯 대부분의 대학원은 제대로 된 역량습득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민중의 자기실현을 위해 복무한다는 80년대의 패러다임은--그러나 민중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80년대에도 불안정한 것이었다--87년 이후 서서히 쇠락했고, 이제 민중 개념에 기초한 사회(변혁)이론의 영향력 자체가 몇몇 소수파의 게토 내로 축소된 지금 더 이상 다른 사회구성원은 물론 대학원생들에게조차 설득력을 상실했다. 남은 선택지는 다소 초월적인 '인문학적 감수성' '인문학의 풍성한 삶' 같은 슬로건인데, 이는 이미 (그 자신의 운명도 불확실한) 대중인문학에 점유당했으며 학계가 되찾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 결과는 오늘날 젊은 인문학 전공자들이 일종의 "찌질함"을 동반한 자조적 언어나 자기만족적인 낭만주의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게 된 집단적 도덕적 질식이다. 젊은 예비연구자들의 자기비하적 언어와 좁아진 스코프에 (보통은 정규직 일자리와 연금을 이미 확보한) 선배 연구자들이 이를 경멸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본인들 또한 스스로의 작업이 갖는 사회적 정당성을 제시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사회적으로 더 이상 설득력을 상실한 신화에 매달리기나 하는--그래서 다른 필드 연구자들에게 공공연한 조롱의 대상이 되는--상태에서 그다지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우리 인문학 연구자들이 자기 자신의 작업의 정당성 및 이를 가능하게 해줄 대안적 서사를 사회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한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가 극복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좀 더 냉정히 말하자면 이러한 위기를 담론과 서사의 차원에서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분야가 사회에 자신의 영역을 요구할 자격은 없다(그리고 나는 우리가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제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약하자. 한국 인문계 대학원 진학을 검토하는 학생에게, 한국의 인문계 대학원은 대체로 그 학위과정에 기대되는 적절한 교육·훈련도, 예비연구자의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한 행정적·제도적 환경도, 좀 더 심각하게는 인문학 전공의 의의와 역할을 설득력 있게 정당화할 수 있는 서사조차도 제공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좋은” 교육연구환경을 제공하는 인문계 대학원은 손에 꼽을 만큼 적으며, 교육연구환경에 대한 투자와 고민은 생략한 채 단지 더 많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곳은 너무나 많다. 달리 말하자면, 인문계 대학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정말로 심각하게 위기감을 느낀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대학원, 대학원다운 대학원을 구상하고 이를 위해 현재의 환경을 개선하는 작업부터 실시해야 한다. 입학한 학생에겐 제대로 구축된 커리큘럼에 따른 훈련이 제공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학생으로서의 기본권 보장이 포함된다--‘똑똑한 학생’이 비인격적인 대우를 감내하며 많은 자원소모와 낮은 보상이 약속된 과정에 뛰어들려는 멍청한 짓을 왜 하겠는가? 더불어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다른 영역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음이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학위의 인플레이션이 그 사회적 가치를 유의미한 값 이하로 하락시키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거기에 해당 영역의 선택이 갖는 사회적 의미도 불투명하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학문후속세대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다. 갓 학위를 받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학적 교류의 기회는커녕 등재지 유지업무를 비롯해 업무 떠넘기기와 훈수만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학회문화 또한 마찬가지로 개선되어야 한다(요즘 서로 다른 필드에 있는 선배 연구자들로부터 동일한 문제제기를 듣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에 필요한 것은 이제 순진한 낭만주의에 기초한 헌신의 착취가 아니라 대학원이 대학원답게, 학계가 학계답게 작동할 수 있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구축이다. 제도 개선의 노력이 결여된 채 지속되는 불황과 과열된 생존경쟁, 사회의 ‘비인간적 풍토’만을 탓한다면, 그리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자는 합리적인 요구 앞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춰질 수는 없다" "우리 때는 어떻게든 알아서 했다" “학문은 배고픈 거다” 식의 답변만이 이어진다면...2017년에도 이따위 대답 밖에 나오지 않는 필드라면 그냥 망하는 게 낫다. 87년 이후 지난 30년간 한국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바뀌었고, 사회 제반 영역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자체로 역사의 특수한 산물인 인문학계 또한 예외는 아니며 우리는 더 이상 30년 전과 같은 기준, 같은 답변, 같은 노력이 통할 거라 예상할 수 없다. 개별 교수, 학과, 대학, 학계,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 개선이 필요한 최소한의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이제는 의지와 책임감의 문제다. 인문학계가, 인문학 대학원이, 인문학 연구자가 사멸해가는 무능, 무용, 구태, 시대착오의 상징처럼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하는 7월 21일 밤에 추가로 쓴 내용)


한국 인문학 대학원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그러니까 무조건 탈조선&미국행이 답"이란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성평등적인 문화 및 보다 선진화된 학계 체제를 비롯해 분명 우리가 영미권 대학원에서 참고해야 할 지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유학이 일반화된 분야에 다년간 있으면서 적지 않은 수의 유학경험자를 접한 사람이라면, 특히 이러한 경험이 없이 "미국 명문대 진학"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순진한 언급을 볼 때마다 다소의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개인의 차원에서 살펴보자. 영미의 좋은 학교들이 한국에 비해 대체로 나은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수 년 간의 유학은 동시에 한국에서 한 명의 시민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상당히 축소시키는 대가를 요구한다. 더 이상 낭만적 순진함을 고수하지 않을만큼 여러 명의 유학경험자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한국에 있었더라면 친구와 가족의 지지를 토대로 멀쩡하게 살았을 사람이 타향에서의 뿌리뽑힌 삶, 토대없는groundless 삶 속에서 이상하게 뒤틀려 돌아오는--혹은 심지어 돌아오지조차 못하는--사례가 생각보다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돌아오고 난 뒤의 근거없는 우월감이나 보상심리가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코미디들은 보통 은밀한 가십거리가 되어 대학원생들에게 일시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어떻게든 박사를 받고 돌아온다 해도 좋은 학교의 학위가 연구자로서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운좋게 일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지금 미국 학계의 유행이 무엇인가"만을 체크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새로이 유학을 다녀온, 그래서 따끈따끈한--한 2-3년 정도 수명의--최신 유행을 바로 수입해온 후학들을 보며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더 이상의 지적 생산을 중단하는 사례는 유학 붐 이후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을 겪은 여러 인문사회학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생의 정점이 명문대 입학"인 사람들은 학부에만 있는 게 아니며, 연구자의 가치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지 학석박 출신이 어디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역시나 이미 한 세대 이전에 유학경험이 보편화한 필드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말해보자면, 한국에서 더 뛰어난 학생이 반드시 미국의 더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며, 미국의 더 좋은 학벌이 한국에 돌아온 뒤의 더 좋은 퍼포먼스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학교/전공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속한 학과의 선생님들은 유학 경험 유무에 비해 유학을 다녀온 학교 랭킹을 그다지 중요한 평가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게 이후 퍼포먼스의 퀄리티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합의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도·환경적인 측면이다. 필드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대학 교원의 미국박사의 비중은 눈에 띄게 증가해왔다. "다들 탈조선하면 뭔가 바뀌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유학 붐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뒤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대학원 연구환경이라는 아주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지난 30년 간 한국이 겪은 엄청난 변화에 대학(원)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학술장, 특히 인문계열 대학원 및 학계의 모습은 영미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 생각에 그 주된 까닭은 개개인이 서구의 학술장을 경험하고 그곳의 행동양식을 익혀서 돌아오는 것과 그 개개인들이 한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환경이 변화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없다는 데 있다. 애초에 매우 독특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배태한 (그리고 지금도 그에 따라 변모하고 있는) 미국의 연구환경이 한국에 그대로 이식될 수 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착각이지만, 그러한 연구환경을 구성하는 각각의 비/제도적 요소가 무엇인지,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실천이 어떠한 환경·전통 내에서 효과적으로 도출되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그러한 제도적 환경이 단지 다수 개인의 서구 경험만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건 멍청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순진한 사고다.

실제로 여러 케이스에서 유학경험이 대학원 내 인권침해나 학자에게 요구되는 각종 규범의 침해를 근본적으로 막아주는 방패막이 될 수 없음이 명확히 드러났듯이, 미국에서 탑클래스의 연구실적을 쌓았다 한들 한국에서 연구자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비/제도적 환경과 그 규칙에 맞추어 행위해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잠정적으로나마 설정할 수 있는 진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한국 인문학계 연구자들은 제도를 분석할 줄도, 제도적으로 행위할 줄도, 제도적 환경을 개선할 줄도 모른다(이공계의 주요 연구자들이 뒤의 두 가지에서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역설적인 사실이다). 연구실적 평가시스템을 포함해 인문학 연구자들이 상습적으로 불평하는 갖가지 '비인문학적' 제도들이 처음 출현했을 때, 한국의 인문학계는 좀 더 잘 기능할 수 있는 대안적 제도를 탐색하고 반영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유감스럽게도 우리 인문학 연구자 대부분은, 나아가 인문학계는 구조맹이다(이건 맑스나 푸코를 읽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리고 유학경험자의 증가가 그 자체로 이 문제를 개선하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처한 조건 자체가 강하게 웅변하고 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유학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부분의 인문학계 연구자들에게 영미권의 좋은 학교로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지적으로든 실용적인 이유로든 대체로 더 좋은 선택지가 될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구성원의 다양성이 매우 낮은 일부 학과들--주로 "동양"이나 "국"자가 붙는--은 확실히 영미의 대학원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를 지금보다 좀 더 진지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인문학계 및 인문학 대학원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미국 유학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건 유학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냥 이 질문에 맞는 종류의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원의 교육환경, 한국 대학원의 제도적·행정적 지원체계, 한국 인문학계의 자기정당화 서사의 상실--이 셋 중 어느 것에도 유학은 답이 될 수 없다. 이것들은 결국 본질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조건을 바꾸는 경로를 통해서만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악습을 고수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듯, 더 발전하고 융성한 시공간의 경험 또한 신앙과 기도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문제에 맞는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고방식 그 자체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공부하든, 한국에 쓸모있는 것을 하고 싶다면 한국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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