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7 연말연시 일기. 과제.

Comment 2017. 1. 3. 23:04
1. 2016년 12월 31일

이제 내가 12월 31일과 1월 1일에도 페이퍼를 쓰고 있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리딩은 요 2주간 적지는 않게 했는데 (물론 스킵을 엄청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1차 문헌 포함하면 1500쪽 정도는 훑어본 것 같다) 생각보다 건진 내용이 별로 없다. 그냥 페이퍼 하나를 꾸역꾸역, 그냥 말은 되지만 결코 뛰어날 수는 없는 대학원생 과제수준으로 만들어낼 만큼의 자료를 제외하면,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로 뭘 하고 싶으면 프랑스어를 모르면 안 되겠구나는 당연한 사실이 유일한 소득이다. 일단 영어로 된 연구물 자체가 별로 없고, 그조차도 한국에선 구할 수가 없다(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몇 권의 주요 연구서는 거의 다 구해서 읽었는데 해외에 있는 지인의 큰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문헌들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프랑스어 인용이 영역없이 나온다. 단어 또는 간단한 문장이나 그나마 사전을 찾아 더듬거리며 추측해보는 내 수준으로는 도저히 무리. 독일 낭만주의만 해도 영어권 문헌만을 토대로 어느 정도 틀을 갖춘 정리를 하는 게 가능한데 14-15세기 중세 프랑스문학은 불어무식자에겐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세계다ㅠㅠ

이번 학기의 소득은 1) 미국 쪽 중세 연구자들 중 1980년대 식 '이론'의 향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느꼈고 2) 그러한 연구자들이 종종 보여주는 비역사적인 방법론을 내가 결코 맘편히 수용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고 3) 이왕 하는 거 중세에 대해 이것저것 읽다보니 이쪽 정치사상사 연구자들이 "케임브리지 학파"와는 꽤 다른 노선을 가진, 그러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 스칼리십을 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덕택에 20세기 후반의 정치사상사를 좀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물론이거니와, 중세 후기를 기점으로 자연권-민주주의-헌정주의-법치 등이 얽혀 형성된 오늘날의 (이 개념의 커다란 의미에서) "서구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구도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된 것, 세속화와 정치신학이라는 주제에 결코 단일한 입장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에서 세속화-정치신학과 종종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슈미트-벤야민-아감벤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지 그 일부에 불과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도 매우 큰 소득이다--기말이 끝나고 테일러를 마저 읽은 뒤에 세속화 논리의 유형들을 한번 개인적으로나마 정리하고 싶다.

물론 중세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 하나를 갖게 되었다. 중세의 연구사에서 매우 다른 소재를 다루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흐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생각해보게 된 건데, 특히 정치(사상)사의 핵심이 기독교/교권과 세속정부/왕권의 경쟁 및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공진화를 주축으로 놓고 나아간다면, 대체로 문학사/문화사/사회사 등에서 다뤄지는 봉건귀족계급과 기사도/무인과 같은 주제는 그러한 서사에서 배제된다; 역으로 아날학파 쪽 문화사/사회사/심성사에 의지하는 문화사/사회사에서 특히 기사도 로맨스를 다루는 경우 교권과 왕권의 갈등은 의례적인 배경 이상으로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며, 교황권 혁명papal revolution이 가져온 흥미로운 변화는 이쪽에서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특별히 종합적인 통사 정도를 제외하면, 이 두 가지 경향을 따로 읽다보면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중세가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물론 90년대 후반 이후로 기사도에 대한 연구에서 교권과 왕권의 영향을 어느 정도 깊게 따져보려는 시도들이 보이고는 있지만--대표적인 연구자로 Richard Kaueper가 있는데, 그는 엘리아스 식의 "문명화과정" 서사를 받아들이면서 교권과 왕권이 기사도를 통해 귀족/기사계급을 훈육하고자 했다고 보는 듯하다--이번에 내가 읽은 것들만 놓고 보면 (물론 대체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연구란 걸 감안해야겠지만) 아직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보인다.

로마 멸망 이후 수세기에 걸쳐 전 유럽적 영향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으나 직접 보유할 수 있었던 무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던 중세 기독교회가 무력을 보유한 세속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어떻게든 증대시키고자 노력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세속권력은 황제·왕들만을 포함하는 게 아니었으며 이들과 때로 긴장관계에 있던 귀족·기사·무인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때 이 삼자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좀 더 정리된 해석적 서사를 구축할 수 있다면 기사도 및 로맨스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보다 수월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난 10여년에 이미 이런 작업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난 이번 학기에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 한동안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지만) 소위 "두 개의 검"으로 지칭되곤 하는 교권과 속권의 갈등관계, 이른바 국가이성 혹은 "국가"의 형성과정이라는 내러티브로 정리되어 온 왕과 귀족계급--덧붙이면 부르주아들까지도--의 관계라는 두 가지 큰 구도를 좀 더 복잡하고 흥미롭게 연결시켜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무척 재밌는 일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얼른 페이퍼를 마치고 제발 중세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ㅠㅠ 나는 멀리 가봐야 근세early modern, 가능하면 18세기 이후가 훨씬 흥미롭고 (사실 내게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이 제일 재밌고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중세는 그냥 가끔 남들이 정리해놓은 연구사 따라가는 걸로 충분한 것 같다ㅠㅠ



2. 2017년 1월 3일

밤 10시 20분 부로 코스웍 마지막 과목 과제를 냈다. 여러 가지로 정말 힘들었는데, 들인 힘만큼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정확히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더 힘들었다(나는 드물게 완벽주의를 욕망하는 타협적 인간이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을 다시 한 번 수정했다. 스스로의 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 '정신 빠진' 내용이 이렇게 자주 눈에 밟히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한 반 년쯤 두고 다시 고치면 아주 약간 밀도가 생기겠지만, 현재로서는 주장도 근거도 있긴 한데 너무 성기다. 프루아사르로부터 마키아벨리를 끄집어내는 상당히 희한한 이야기다.

어쨌든 이렇게 석사 시절 포함 열 번째 수업학기가 끝났고, 이제 코스웍은 안녕이다. 2-3일 쉬면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조금 읽겠다. 일단은 예전에 팽개쳐두었던 루만의 <생태적 커뮤니케이션>, 데이비드 마틴의 <현대 세속화 이론>, 아무리 봐도 무난한 한국어로 번역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해롤드 버만의 책들을 보겠다. 그리고 테일러 세미나 남은 분량을 마무리하고, 쓰기로 한 글을 쓰고...오랜만에 18세기로 되돌아갈 생각이다.

안녕, 2016년. 2017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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