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정당성과 예의

Comment 2016. 9. 28. 23:50
[이 글은 편집을 거쳐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게재되었다. http://www.huffingtonpost.kr/woochang-lee/story_b_12188320.html ]

기사(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1&aid=0008706322)에 따르면, "서울 종로경찰서는 백씨 시신에 대해 부검영장(압수수색검증영장)을 신청했다고 이날 밤 밝혔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부검의 필요성이 있어 영장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규정된 강도 및 발사각을 모두 위반한 경찰측의 물대포가 고인의 두부를 직격했고, 이를 맞고 쓰러진 고인이 단단한 도로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기까지 발사가 이어졌으며 이후 고인이 어제 오후 사망할 때까지 의식불명 상태였음은 누구나 쉽게 확인가능한 사실이다. 이는 매우 높은 확률로 경찰측이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행위를 범했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집회폭력을 근거로 경찰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주장은 애초에 차벽 너머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타당성도 결여할 뿐더러, 경찰의 행위를 해석하는데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론할 가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정확한 사인을 밝힌다는 이유로 부검을 신청한 경찰측의 행위는 사실상 스스로의 살인혐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영상자료 등을 통해 명확히 기록된 근거로부터 비롯되는 가장 유력한 해석, 즉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망을 인정한다면 "정확한 사인"을 새삼 밝히겠다는 입장표명을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경찰의 고인의 시신에 대한 압수수색검증영장신청이 부당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경찰이 지금까지의 사태에 어떠한 책임감 있는 의사표명도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미 두부손상에 따른 의식불명 및 사망이 명확한 상태에서 자신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인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라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 신청이 경찰 혹은 경찰 내외의 결정권자를 극도로 자기중심적으로밖에 사고할 줄 모르는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행위자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을 습득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하는 죽음에 대한 규범 세 가지가 있다. 1) 죽은 이의 시신은 아무런 의미없는 '그냥 몸뚱아리'가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이 예의를 갖춰 대해야 할 망자의 인격의 상징이다. 2) 따라서 시신을 손상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무례 혹은 범죄로 간주된다. 부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기에, 우리는 망자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갖추었다는 믿음 하에서만 부검을 정당하게 받아들인다. 3) 고인의 유지 및 인격을 일차적으로 대변하는 주체는 유족이며, 유족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은 고인에게 예를 갖추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경찰의 시신 부검 결정이 고인의 인격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음은 매우 명백하다. 그들이 고인을 조금이라도 존중했다면, 혹은 적어도 그러한 제스쳐라도 보여주고자 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유족을 설득하고 자신들이 결코 무례하게 행동하고자 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표명 및 노력 이전에 경찰의 지휘권자가 보여준 것은 경찰병력을 투입해 장례식장을 에워싸는 광경과 함께 유족의 동의를 전혀 얻어내지 못한 일방적인 부검 결정이었다. 지금 시신 부검이 이대로 진행될 경우 경찰의 행보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망자를 위한 예의 따위는 무시하고 마음대로 시신을 훼손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고인에 대한 예의를 내던져버리지 않을만큼의 사려를 갖추고 있는 한국인들 중에서 이러한 무책임과 자기중심성에 분노하지 않을 이는 없다.

합리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나이브할 뿐인 몇몇 이들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적 정당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법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기준 중 (물론 매우 중요한) 하나일 뿐이며,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듯 법적 결정은 다른 사회적 규범, 특히 사회구성원에 대한 인격적 존중과 같은 규범에 부합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재판정에서도 국민의 법 감정 같은 요소들이 판결에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는 걸 떠올려 보자. 특히나 경찰과 같은 국가권력의 경우, 주어진 권한에 의한 결정이 사회적으로도 정당하게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권력이 항상 사회구성원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선진성의 중요한 척도다. 오늘날처럼 국가권력의 작은 실수가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유례없이 강력한 때라면 더욱 그렇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경찰은 그러한 정당성, 존중, 예의 따위는 내팽개친 채 법적으로 허용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다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보다는 좀 더 나은, 신뢰와 책임감을 갖춘 경찰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26일 새벽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60645001) 경찰의 재신청 후 28일 결국 영장을 발부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632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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