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송령. <요재지이> / "순수한 이야기" [130707]

Reading 2014. 3. 18. 13:42

*2013년 7월 7일


 포송령의 <요재지이> 완역 국역본(전3권)을 다 읽었다. 물론 포송령의 생몰연대가 지금으로부터 크게 멀어진 건 아니지만, '동양 고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이야기는 남녀의 연애를 다루며(한 편 정도이긴 하지만 남성 간의 동성애도 나온다^^), 여성 인물의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이 두드러진다; <요재지이>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가장 흔한 패턴 중 하나가 야심한 시각 남자 혼자 있는 방에 갑자기 여자가 찾아와서 섹스를 하는 거니까(물론 이때 여성은 거의 여우/귀신/요물이다--대체로는 특별히 남성인물을 벗겨먹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오는 거긴 하지만). 여우,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90% 이상이니까 <요재지이> 자체를 일종의 기담집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 중요한 건 '형식으로서의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민담과 마찬가지로 <요재지이> 또한 몇 가지 기본적인 패턴에 기초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상 500편 가까운 이야기들 중에서 대다수는 비슷비슷한 이야기인데, 이러한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교한다면, 근대소설을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는 없다(분량의 차이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해명되지는 않는 것 같다; 역으로 근대소설 또한 우리가 근대소설에 도입된 문학적 장치들과 전혀 무관하게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반복적이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음은 오늘날 한국에도 어느 정도 통용된다; 가령 10대와 20대 독자들을 겨냥해 생산-소비되는 한국 판타지 소설들을 보라. 이야기가 갖는 힘을 해명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중요할 것 같다 / '이야기라는 형식'이 우리가 삶을 인식하는 방식과 닮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이야기처럼 인식한다(일종의 필연적인 가상처럼). 부분적으로는 삶=가상을 닮았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갖는 힘이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출발한다면, 시작과 끝이 있는 삶에 우리가 특정한 가치들을 입히듯 이야기 또한 특정한 가치들(통상 "교훈"morale)을 담아낼 수 있다. 그것은 때로 인식적인 가치이기도 하고 윤리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지점도 있다. 그러한 가치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이야기를 볼 수 있다면, 역으로 어떠한 가치도 담아내지 않는 "순수형태"로서의 이야기 또한 존재한다. 그림동화도, <요재지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본다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영어중역)<이솝우화>의 경우, 매 이야기의 끝마다 역자가 교훈적인 해설을 다는데 해설과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때때로 존재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역자의 지적인 부실함의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교훈도 거부하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포송령의 텍스트는 이 점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대개 이야기의 말미에 "이사씨가 말하길" 과 같은 형태로 저자/편자의 논평이 붙곤 하는데, 특정한 이야기들은 이러한 논평이 아예 붙지 않거나 붙은 논평이 매우 지엽적인 것에 그치곤 한다. 즉 교훈적인,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논평자가 소화불가능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형태"로서의 이야기를 고찰하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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