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비판적 논평(4/6 갓뫼포럼 토론문)

Critique 2016. 4. 8. 02:49

이 글은 201646일에 열린 서울대학교 민교협 주관 제3회 갓뫼포럼을 위해 쓴 글이다. 나의 역할은 토론자로서 발표자 김홍중 선생의 논문이자 발표문인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한국사회학> 49.1(2015): 179-212)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제시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 목표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응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당일 발표한 토론문을 그대로 올리고, 그 아래에는 원래 초고에는 포함되었으나 토론을 이끌어내기 효율적이지 않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 수정하게 된 마지막 한 쪽 분량을 함께 수록한다.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토론문


먼저 『마음의 사회학』을 흥미롭게 읽었던 독자로서 김홍중 선생님의 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2009년 이후 발표하셨던 논문들을 부분적으로나마 따라 읽으면서 오늘 발표문의 원 논문을 포함해 『마음의 사회학』의 문제의식이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반가운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청년세대의 “생존주의”에 대한 분석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먼저 선생님께서 구축하신 일종의 역사관과 그 안에서 생존주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제가 이해한 바에 따라 간추리고, 그 뒤에 비평적 코멘트를 짧게나마 덧붙이고자 합니다.

『마음의 사회학』 및 이후의 논의에서 전제하고 있는 역사적 서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 과정으로, 이 시기에 진정한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공적 문제에 개입하는 “진정성의 에토스”가 성립되어 386세대의 ‘마음’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합니다. 87년 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이러한 유형은 1997년 IMF 체제의 등장으로 붕괴하고, 그 자리에 동물·속물로 대변되는 새로운 인격유형이 등장합니다.1) “신자유주의적 생존자”라 명명된 이러한 모델은 구조조정을 통한 무한 경쟁, 공공성 해체에 따른 과시적 인정투쟁, 건강과 생명의 상품화 등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진정으로 “좋은 삶”(good life)을 위한 성찰을 폐기하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시장)사회의 각종 요구사항에 맞춰 어떻게 관리·계발할지만을 고민하는 도구적 성찰의 주체로 만든다는 점에서 “도덕적이고 비윤리적”입니다(실제로 2009년의 글들에서는 생존에 매몰되어 동물·속물이 된 오늘날의 인간형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죠).2) 선생님의 최근 작업은 이러한 서사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청년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보다 정묘한 상을 그려내고(생존, 독존, 공존, 탈존적 주체와 같은 세분화된 유형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3)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대상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하여 19세기 말부터 한국 및 동아시아의 생존주의 및 그 대안의 역사를 추적하는 시도로 읽힙니다.4)

오늘의 발표를 포함해 지금까지 열거된 선생님의 분석 작업을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분석적 서사에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인간형의 희구와 생존주의적 인간형의 경멸이라는 윤리적·미적 가치판단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때 정치적으로도, 미적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꿈꾸었던 인간형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건 사고하지 못하는 인간형이 득세한다는 식의―80년대 후반 학번 지식인들에게 특징적인―관점은 필연적으로 대안적 인간형의 분석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예를 들면 생존주의의 대항마로서 (진정성의 윤리를 계승한) 공존주의에 대한 암묵적인 선호나 (박솔뫼의 소설 비평에서 나타나는) 탈존주의에 대한 미적 평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둘째, 『마음의 사회학』부터 서바이벌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작업에선 기본적으로 개별 인격 유형이 중심에 놓이며 그것과 맞닿은 기제들은 비교적 추상적으로 다뤄집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97년 IMF 체제 및 이후의 신자유주의 제도라는 역사적 컨텍스트와 그러한 컨텍스트의 대표적인 산물들이 열거되고는 있지만 이것이 각각의 인격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는 논의되지 않죠.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윤리적·미적 가치판단을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 그리고 방법적 개인주의라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한 결과에 대하여 저는 두 가지 아쉬운 면을 꼽고 싶습니다. 먼저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 작업은 주체성에 대한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주체의 행위역량을 윤리적·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구조와 주체 사이의 구체적인 매개에 대한 논의가 생략될 때 양자의 간극이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거의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로 나타나고 그에 반비례하듯 청년 ‘주체’는 구조의 산물이 됩니다. 이때 청년 주체에게 주어진 영역은 어떠한 윤리적·미적 태도를 선택하느냐는 것뿐으로―저는 거의 주체가 점(點)으로 표상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데―시민사회 및 정치적 영역에서 그들의 행위역량이 왜 감소했고 어떻게 증대될 수 있는지는 논의되지 않습니다.5)

두 번째로 2000년대 중후반부터 청년 세대에 나타나는 주요한 변화들이 거의 포착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대형 극우파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와 같은 사례를 꼽고 싶습니다. 일베는 한국에서 10-20대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곳 중 하나로, 통상적으로는 청년 보수화의 상징처럼 인식됩니다(실제로 청년집단의 보수화는 중요한 현상이기에 선생님께서 언젠가 그 주제 또한 다루시길 기대해봅니다). 그러나 박가분(『일베의 사상』) 및 김학준(『일베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의 선구적인 작업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이러한 커뮤니티는 청년 세대에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베를 포함해 청년 세대 다수가 참여하는 커뮤니티를 보면 그러한 공동체 형성과정 속에서 생존, 독존, 탈존, 공존의 분류에 포함되지 않는 유형이 나타남을 어렵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유형 및 청년 보수화의 분석에 있어서 생존주의에 내포된 개인주의와는 다른 요소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 인문사회학 논의의 대다수가 청년문제를 접근할 때 “오늘날 청년에게 (역사의) 주체로서의 역량이 결여”된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면, 김홍중 선생님의 분석은 그를 위한 표준적인 틀을 제공한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제 생각에 이러한 작업이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서든, 새로운 행위규범을 위한 문제제기로서든 실천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주체의 역량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상실되었는가를 포함해 논의를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맥락화하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 위해 도입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테일러(Charles Taylor)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주체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세계관 혹은 공동체적 서사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오늘날의 청년 세대가 어떤 세계관 혹은 서사를 가졌으며 그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위치시키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80년대 민중사관부터 오늘날의 헬조선 담론까지 청년 담론에 대한 연구가 가능합니다. 둘째, 푸코의 작업에 함축되어 있듯 주체의 행위역량이 그에게 주어진 장치들에 따라 증감한다고 할 때,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집단적 주체를 형성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장치들의 역사를 통해 추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9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매우 빠르게 대학의 학생공동체가 사라져간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대학이 지금까지 청년 담론을 독점하는 장소였던 건 부인할 수 없죠). 재사회화를 위한 일종의 교양교육기구이자 집단적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로서 학생공동체는 분명 청년 주체의 행위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주요한 장치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이유로―대학 내의 제도적 변화를 포함해―사라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의 여러 장치들을 어떻게 배치할 때 그와 같은 기능을 복구할 수 있는지 등은 행위역량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필수적인 질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이처럼 “자아를 넘어선 삶”(life beyond self)을 위한 역사적 비전과 현실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이 한편으로 생존주의에서 드러나듯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분열된 개인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 편으로 국가 및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공동체’에 이끌리는 일견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아주 놀랍지는 않습니다.6)

두 가지 항을 포함해 청년 주체의 삶과 역량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을 추적하고 역사화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초월적인 구조 대 무력한 주체의 양극화된 구도라는 이론적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다른 한편으로는 분석이 현실의 청년주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이러한 형태가 아니라고 해도 청년주체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논의를 보다 풍성하고 생산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실 몫이 결코 작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1)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9-20 및 66쪽 참조.

2)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윤리적 해체」, 『사회와 이론』 14(2009): 173-212 참조.

3) 「탈존주의의 극장: 박솔뫼 소설의 문학사회학」, 『문학동네』 21.2(2014): 1-19, 특히 4절.

4) 「성찰적 노스탤지어: 생존주의적 근대성과 중민의 꿈」, 『사회와 이론』 27(2015): 33-76 및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1(2015): 179-212 참조.

5) 이런 측면은 선생님의 관점을 깊이 공유하는 다음의 글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현, 「세월호 이후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 『창작과 비평』 170(2015 겨울): 389-405[창비 주관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작].

6) 저는 행위역량이라는 문제의식의 경우 선생님의 「마음의 부서짐: 세월호 참사와 주권적 우울」(『사회와 이론』 26(2015): 143-86)에서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문제 및 청년 담론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지점은 바로 주체이며, 이 주제를 둘러싼 인문사회학적 논의의 대다수가 오늘날의 청년에게 (역사의) 주체로서의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상황을 논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김홍중 선생님의 분석이 한국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표준적인 틀을 제공한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저는 지금까지의 분석을 역사적 서사로서 맥락화하기 위해서라도 간략한 스케치를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주체성의 형성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측면을 도입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를 본받아, 주체는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세계관 혹은 공동체적 서사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 푸코의 작업에 함축되어 있듯이 주체의 행위역량은 그에게 어떤 장치들이 주어져 있느냐에 따라 증감합니다. 이 두 가지 항을 도입하는 목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신자유주의화라는 초월적 구조로 부르는 것을 장치 혹은 매개와 같은 구체적인 단위로 나누어 사고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한국 청년 주체의 행위역량이 감소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민중주의적 역사철학이 붕괴하면서 청년 집단은 스스로를 맥락화할 수 있는 거대서사를 찾지 못합니다. 주지하다시피 80년대 민중사관은 민족통일, 인민혁명, 민주주의성취라는 세 가지 목표의 집합체였으며, 대학생-청년은 민중의 일부이자 동료로서 이러한 목표로의 전진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자임할 수 있었습니다(저는 대학생과 청년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데, 이는 사실 대부분의 청년 담론은 대학생들을 주체로 호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87년 체제의 성립 및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형식적 민주주의가 달성되고, 소비에트 붕괴로 맑스주의가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민중사관 또한 무력화 됩니다90년대 중반부터 민중 주체의 공백을 메꾸는 주체를 탐색하는 이론적 시도가 이어지지만 특별히 성공적인 사례는 없었습니다. 문화, 소비주의, 대중, 일상과 같은 키워드가 주요하게 간주된 것은 무엇보다도 민중사관 및 그것이 약속한 (조지 엘리엇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를 넘어선 삶”(life beyond self)의 전망이 사라진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학생운동 대의의 소멸, 97년 이후 저발전 및 강화된 경쟁, 대학의 학사관리 엄정화 혹은 기업화 등과 맞물려 대학에서 학생공동체라는 구체적인 장치가 점차 사라져갔다는 사실 또한 중요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는 익숙하겠지만, 한국의 대학생공동체는 자체로 일종의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제도의 통치와 대면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행위역량을 부여하는 집단네트워크였습니다. 이것이 사라지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점은 학생공동체의 붕괴 후 그 기능을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장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대학생-청년들은 개인화된 삶 이외에 집단적·공동체적 주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학습할 수 없게 되었고(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군대식 모델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이는 역량을 가진 행위자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자체를 훼손하는 바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이처럼 스스로의 삶에 역사적 비전을 부여할 수 없게 된 그리고 현실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지 못한 세대가 한편으로 생존주의와 같이 공동체로부터 분열된 개인으로 인격화하거나 다른 한 편으로 국가 및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공동체에 이끌리는 일견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황이 아주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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