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토로비츠.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 간단한 정리.

Reading 2016. 2. 22. 16:00

Kantorowicz, Ernst H. _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_. 1957. A New Preface. William Chester Jordan. Princeton: Princeton UP, 1997.

 

에른스트 칸토로비츠의 <왕의 두 신체: 중세 정치신학 연구>(이하 KTB)를 학과 "정치신학" 리딩그룹에서 읽었다. 독회자들 중 중세 신학 및 법제사를 연구한 이가 없는 상태에서 본문만 5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겨우 5주에 걸쳐 읽었으니 정성들여 읽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대부분 라틴어로 된 각주를 검토할 역량이 없었기에 우리의 독회는 본문에 집중하여--그렇게 따지면 500쪽이라고 해도 실제 분량은 훨씬 줄어든다--칸토로비츠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내 공부영역을 고려할 때 KTB를 정독하는 일이 한번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으므로, 더 잊어버리기 전에 내 눈에 주요하게 띈 내용들을 기록한다.

 첫 번째로 개략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두 번째로는 챕터별 주요 쟁점을 짚으며, 세 번째로 정치신학적 맥락에서 칸토로비츠의 텍스트가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를 다루겠다.

 

서론(introduction)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칸토로비츠가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영국의 튜더 시대, 나아가 심지어 19세기의 조지 3세에게까지도 적용되었던 법적 허구/의제(legal fiction), 이는 곧 왕은 자연인으로서 필멸하는 몸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불멸의,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진다는 "왕의 두 신체" 개념을 가리킨다. "왕은 법적으로 죽지 않기 때문에 불멸한다거나, 왕은 법적으로 언제나 성년 상태"(That the king is immortal because legally he can never die, or that he is legally never under age, 4)라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조소받을만한 "신비주의"(mysticism)19세기 영국에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일견 경악스럽다. 그러나 칸토로비츠가 자신보다 반 세기 앞서 태어난 위대한 중세 법제사가 메이틀랜드(Frederic William Maitland, 메이틀랜드에 대해 요약된 설명으로 http://www.encyclopedia.com/topic/Frederic_William_Maitland.aspx 를 참고하라)를 인용하면서 강조하듯, 이 독특한 논리는 단순히 미개한 과거의 우스꽝스러운 잔존물이 아니라 "정부라는 보다 비인격적인 개념과 [왕이라는] 인격적인 것을 일치시키기 위한"(to bring into agreement the personal with the more impersonal concepts of government, 5) 중요한 법 개념적 장치였다. KTB11, 12세기부터 15,16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개념이 어떻게 다양한 방면에서 태어나고 변형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울만(<서양중세정치사상사>)이나 스키너(<근대 정치사상의 토대>)를 읽어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정치적 개념의 역사에서 근대성의 한 지표가 인격적인 것에서 비인격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한 세대 이전의 연구자인 칸토로비츠의 작업을 마찬가지로 근대성 연구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칸토로비츠의 텍스트는, 울만이 강하게 주장한 바와 마찬가지로, 중세 후기에 이미 근대세계에서 활용될 개념적 장치들이 상당히 완성된 형태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책의 전체적인 순서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읽고 넘어갈) 1"문제: 플로우든의 보고서"(The Problem: Plowden's Reports)2"셰익스피어: 리처드 2"(The Shakespeare: King Richard II)는 각각 사례 제시를 통해 튜더 시기에 "왕의 두 신체" 개념이 정치체(Body Politic)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논리로서 현실적인 중요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서두의 역할을 한다.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들여다보는 독자들은 눈치챌 수 있겠지만, 1장은 한편으로 "두 몸" 개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지점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다른 무엇보다도 19쪽에서 제시하듯 신학적인 논리와 제국/왕국의 논리가 서로를 참조하면서 발전해나간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논리가 영국에서 대륙의 절대군주제와 달리 "주권"(Sovereignty, 20)이 의회와 결합하는 흐름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칸토로비츠 책 전반의 중요한 주제들을 선취한다. 영국에서 왕의 공적인, 비인격적인 신체는 왕관으로 상징되는 국고(fisc)나 국체와 같은 개념적 실체와 결합해 있었고, 이는 다시 하나의 국체로서의 의회(parliament)와 분리될 수 없었다. 요컨대 왕은 자연인으로서의 몸과 함께 의회와 결합된 공적인 몸을 지니는 걸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혁명기의 의회파들은 왕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자신들이 '진정한' 왕과 함께하여 덜 중요한 자연인으로서의 왕과 적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3장부터 8장까지는 KTB의 실질적인 본론에 해당한다. 3"그리스도 중심 왕권"(Christ-centered Kingship), 4"법 중심 왕권"(Law-centered Kingship), 5"정체 중심 왕권"(Polity-centered Kingship)은 각 장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인격체를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왕권을 구성하는 논리의 형식이 어떠한 개념적 장치와 결합하여 스스로를 형성하고 지탱해갔는지를 다룬다. 6"연속성과 신체에 관하여"(On Continuity and Corporations)는 이러한 비인격/초인격적 개념이 연속성을 사유할 수 있는 시간개념 및 '죽지 않는' 몸 개념과 함께 발전해나갔음을, 7"왕은 죽지 않는다"(The King Never Dies)는 이러한 개념들이 왕권 개념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합했는가를 각각 왕조(dynasty), 국체로서의 왕관(The Crown), 왕의 존엄성(dignity)과 같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8"인간 중심 왕권: 단테"(Man-centered Kingship: Dante)<신곡>(La Divina Commedia)의 저자이자 제국의 통치를 염원한 단테의 사례를 통해 인문주의와 세속화된 정치신학으로서의 왕의 두 몸 개념이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리하여 교권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서도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는 제국/왕국의 개념이 마침내 등장하게 됨을 보여준다(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부는 바로 이 문제의식이 근세 공화주의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통치자가 자연인으로서의 사적 인격만이 아니라 공적 인격을 아울러 가진다는 논리가 기독교 이전 고대 이교 국가들에도 있었음을 덧붙이면서, 그러나 왕이 두 개의 몸을 갖는다는 사고는 튜더 시대 영국의 고유한 산물임을 밝힌다.

 

 


앞서 말했듯 이 글에서 KTB처럼 방대하고 중요한 작품의 흥미로운 요소를 전부 정리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몇 가지 인상깊었던 지점들만 짚는다.


1. 3장에서 언급하듯 "왕의 두 신체" 개념은 12세기 속권과 교권의 서임권 투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왕과 왕의 지지자들은 왕의 통치가 스러져 없어질 덧없는 세속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에까지 이르기를 원했고, 따라서 왕과 보편적인 속성을 결부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왕의 지지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리의 중추를 이루는 그리스도 교리를 가져온다. 로마 가톨릭의 주교(bishop)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자연적인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세계에서 불멸하는 영원한 몸을 가졌던 것처럼 자신들의 주교직이 보편적인 몸을 가졌다고 주장했는데, 왕의 지지자들은 이 이중적 신체의 논리를 가져와 왕권을 설명하는 논리적 형식으로 삼는다. 왕은 한편으로 자연적인 몸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은총"(grace)을 받은 또 하나의 신성한 몸을 가진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 몸을 통해 왕권은 중단없는, 영구한 연속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2. 4장에서 설명하듯, 신학적 논리에 기초한 왕권의 정당화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로마법(Roman Law) 전통과 결합하여 교회법(Canon Law)의 논리와 대결하는 법학(legal science)적 논리로 발전한다. 엄밀히 말해, 교권의 확장이 법학적 수련을 받은 교황들의 등장과 맞닿아있음에서 알 수 있듯, 교회법 전통 역시 로마제국의 유산으로부터 자신의 뼈대를 만들어갔다--우리는 이러한 뼈대가 로마 제국->가톨릭 교회->신성로마제국 및 각 왕국으로 변형을 거쳐 전파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왕권과 법학의 결합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 즉 성자(聖子)에 비유되던 왕이 점차 신, 성부(聖父)로서 묘사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왕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법lex animata이자 정의 그 자체로, 즉 법의 원천으로 표상되기 시작했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왕과 법의 관계다; 왕은 법에 종속되는가, 아니면 그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인가? 이 (칸트의 두 번째 비판을 연상시키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왕은 아버지(법을 만드는 이)이자 아들(법을 따르는 이)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칸트를 예비하기라도 하듯, 왕은 법에 묶이지 않으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법을 따르는 존재다(105). 왕이 법을 따른다고 할 때, 16세기의 보댕(Jean Bodin)을 예측하기라도 하듯, 왕은 주어진 법률 자체를 따른다기보다는 그 법의 원천이자 신의 통치원리를 뜻하는 이성(ratio)의 명령을 받는 것이다; 이성은 자연법(the Natural law)이자 신의 법이다. 왕은 근본원리로서의 이성과 실정법--구체적인 법조문들 양자를 매개하는 중개적 정의iustitia mediatrix로 기능한다. 이렇게 법적인 개념이 신학적인 색채를 띠어가는 과정에서 법학자들은 스스로의 작업에 신성한 색채를 부여했다.


3. 4장 132쪽에서 강조하듯, 13세기 중반부터 (아베로에스와 아퀴나스를 거쳐) 재도입된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정치학>의 논리 역시 이 과정에 기여한다. 주지하다시피 아퀴나스는 자연법의 개념이 부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왕은 이 과정에서 천상의 자연법=이성을 지상에 실현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군주는 그 자신이 정의이자 자연법을 실현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의 장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겠지만 아퀴나스를 통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활이 중세 후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은 이것보다 더 심원한데, 단적으로 인간다움의 필수요건으로 공동체 안의 삶이 강조됨으로써 공동체/정치체는 이제 교권이 독점하려 했던 영적 세계의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위한 하나의 단위로 사고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8장으로, 단테는 아퀴나스의 학생 레미지오 데 지롤라미(Remigio de'Girolami)에게 수학함으로써(478) 세속적 세계를 하나의 "전체"(the Whole)로 사고하는 논리를 형성했고, 이를 급진화하여 교권으로부터 분리된 "지상의 낙원"(terrestrial paradise) 혹은 인간의 제국을 주장할 수 있었다. 초기 인문주의의 대표자로서 단테는 인간이 교회의 영역 바깥에서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기준에 따라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음을 주장했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제국 안에서의 삶에 대한 옹호로 이어졌다(459-66). 그는 아예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을 포함하는 인류공동체(humana universitas 혹은 humana civilitas)가 존재하며 그 자체로 신비한 신체corpus mysticum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467).


4. 143쪽부터 시작하는 4장 3절 "브랙튼"(Bracton)은 4장의 여러 중요한 논의 중에서도 특히 눈여겨봐야 하는데, 무엇보다 칸토로비츠가 이 대목에서부터 "왕의 두 신체"의 논리가 영국적인 발전경로를 밟아나가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조망하기 때문이다. 4장 2절이 "살아있는 법"이자 정의의 체현자로서 왕의 신성한 '두번째 몸'을 강조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를 다루었고, 이것이 칸토로비츠에게 있어 왕권이 국가이성(the Reason of State)의 성립으로 나아가는 대륙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3절은 명백히 2절과 대비되는 사고로서의 영국적인 경향을 보여준다--요컨대 대륙 대 영국이라는 구도가 이 지점에서부터 명백해진다. 브랙튼을 포함한 영국의 법률가들이 형성한 논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뽑아보자.

1) 왕이 법을 만든다--이 또한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법인격으로서인데--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법의 아래에 있다"(the king was "under the Law", 147)는 것을 강조한 점(이는 존 포테스큐와 같은 이들을 통해 보통법common law 전통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신하들이 자연법 > 왕 > 실정법의 위계를 만들었다면, 브랙튼은 실정법에 이미 자연법이 깃들어있다는 논변을 펼침으로써 왕이 실정법을 준수해야 하는 논리를 만든다.

2) 왕이 법을 만들 때 중요한 원칙이 단순히 그의 의지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기쁨에 따르는"(at his pleasure, 151) 것이라면, 브랙튼은 이 명백히 절대군주의 승인으로 향하는 수사에 부가조항을 덧붙여 "왕을 기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의원들의 의회를 기쁘게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what pleased him had, first of all, to please the council of magnates. 151-52)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의회에 왕의 입법권을 종속시킴으로써 일종의 공의회주의 혹은 헌정주의(입헌주의)적 경로로 나아가는 방향을 예비한다는 것을 내가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의 법인격은 의회 안에서 온전하게 존재한다(이것은 정체 중심 왕권에서도 이어진다: 5장 2절 후반부, 223-32를 볼 것).

3) 그러나 칸토로비츠가 브랙튼의 논변에서 가장 강조하는 지점은 그가 국고, 즉 공적인 재산을 항구적인 시간 개념과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왕=국가의 재산은 시간의 흐름에도 그 지위가 침해받지 않는 영역으로 간주되는데, 이때 재산권에 대한 두 가지 법 개념, 즉 "시효"(prescription)와 "양도불능"(inalienability)의 도입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165, 이 개념 자체는 본래 로마 교회가 독점하던 것이었으나 발두스Baldus와 같은 법학자들을 통해 왕권의 논리로 전유되게 된다, 181). 즉 (영토를 포함한) 왕의 재산은, 국체는 소멸시효를 갖지 않는 것으로서 누군가가 아무리 오래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사용취득"(usucaption)의 대상이 되지 않고, 동시에 양도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13세기부터 독립적 실체로서의 국고는 개별 왕의 수명보다 더 긴 정도를 넘어 항구적으로 지속하는 '초개인적 시간'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고(fiscus)는 그리스도(Christus)와 연결된다.

왕의 재산이, 국토가 신성한 것으로서 독특한 법적 대상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 듯 보이지만, 이러한 논변의 발전의 변증법적 전개가 갖는 귀결은 주목할 만하다--국고가 신성한 것으로 간주될 때, 그것은 하나의 독립적 실체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기 시작하며, 그 반대급부로 (각각의) 왕들은 실체로서의 국고/영토를 지켜야 하는 의무에 종속된다. 영국의 왕은 취임하면서 전체 영토를 손실없이 보전해야 한다는 선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167). 국고가 왕의 부속물인지, 왕이 국고의 부속물인지가 불분명해진 상태에서 15세기에 자연인과 (국고의 수호자인) 법인이라는 왕의 두 인격이 분리되어 후자의 권리가 전자의 권리를 제약하는 사례를 볼 수 있게 된다(173). 공적인 것은 신성한 것이 되며, 왕은 자신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자연인으로서의, 개별 왕으로서의 권리를 굽히도록 요구받는다.


5. 항목1에서 언급한 제국과 교황령의 상호참조는 5장에서 스스로를 정치체body politic 혹은 "신비한 신체"(Corpus mysticum)으로 표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5장은 1절이 교권에서 정체론의 발달, 2절이 세속국가에서 정체론의 발달, 3절은 조국patria 개념의 등장으로 구성된다). 이때 '신체'의 수사는 일종의 집단적인 것(collective), 즉 인민, 영토, 통치자들, 왕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공동체를 지칭하게 된다. 신체의 수사학은 동시에 머리(head)와 몸(body)의 구별로까지 이어지는데, 당연히 왕 혹은 교황/주교가 머리가 되고 다른 피지배자들이 몸이 된다(그리고 이 수사는 이후 머리와 지체member의 관계설정을 둘러싼 논쟁에도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다시 주교/왕과 신민/왕국을 결혼관계로,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정하는 수사로도 이어진다--전자는 후자에 대해 지배권을 갖지만, 이 수사를 반대방향으로 활용하여 후자에 대한 전자의 의무를 제기하는 주장도 나타난다. 요컨대 신체의 수사를 통한 개인적인 것:집단적인 것 -> 머리:몸 = 그리스도: 교회 = 왕:왕국(신민) = 남편:아내 등 이중적 구도에 기반한 수사들의 연쇄. 그러나 영생하는 그리스도와 달리 각각의 왕들은 필멸하는 존재였고, 적어도 이 세계에서 영속할 수 있는 개념의 등장이 필요해진다(6-7장은 바로 그것을 다룬다).

 여기에서 첫번째로 주목할 점은 바로 앞의 문단에서 설명한 신성한 것/은총-자연적인 것의 이중적 구도가 집단적인 것-개인적인 것(the individual)의 구도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198). 두번째로 신경써야 할 것은 몸의 수사가 단순히 말의 상찬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법학에서 집단적인 것, 예컨대 민족이나 인민, 국민, 도시민 등을 표상하기 위한 하나의 허구적 인격(fictitious person) 개념의 등장과 맞물린다는 사실이다(201)--왕국/교회는 하나의 정체polity로 표상되며, 이것은 다시 법적 허구로서의 법인격을 통해 (재산권을 포함한) 법적 권리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그리고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과 같은 이들은 교회=정체와 주교=머리의 간극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고 후자를 전자에 종속시키는 논변을 만들어낼 것이다, 205).

 이어 3절의 '조국' 이야기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본래 십자군 전쟁에서 군사력 동원을 위해 성지(the Holy Land)를 (각자가 속한) 진정한 나라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부터 시발되었다(235, 단 칸토로비츠가 강조하듯 로마법 전통에서도 조국 개념은 존재했다). 성지수호는 손쉽게 각 영역국가에서 조국수호의 논리로 전용되었으며 이는 근세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선민(elect-nation) 의식과 결합할 수 있었다. 십자군 이데올로기의 천상의 낙원(the celestial Paradise)과 이를 위한 순교(martyrdom)의 논리는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논리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조국 이데올로기의 탄생 과정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동포애(caritas)라는 기독교적 덕목이 세속국가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공통의(common), 공적인 것(public)에 대한 의무라는 개념으로 전유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242)--나는 마키아벨리적 사고방식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교회/제국이라는 보편적 세계가 공적인 것, 공통된 것의 담지자로서 세속의 왕국들로 대체될 때, 전자가 표상하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헌신 또한 후자의 공적인 것에 대한 헌신이라는 덕목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6. 6장 1절에서 칸토로비츠는 세 종류의 시간 개념을 설명한다. 먼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적인 논리를 제공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시간관은 고대의 순환론적 시간을 비판하면서 세계를 두 가지 시간, 즉 신의 시간, 천상의 영원(aeternitas)과 덧없이 스러져갈 세속의 시간(tempus) 하에 놓인 것으로 제시한다. 현세의 우리는 모든 것이 필멸하는 세속의 시간 속에서(in Time) 살고 있지만, 신의 나라가 임하면 세속의 시간이 멈추고 모든 변화가 정지한 영원의 시간에 들어서게 된다(벤야민의 "정지상태의 변증법"을 염두에 둘 수 있겠다). 그리고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흥은 (고대적인 순환론을 변형한) 제3의 시간개념을 도입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자체로는 피조물이지만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 있는) '천사들의 시간'인 영속(aevum)이다. 이때 영속은 만물이 정지상태에 놓인 신의 영원과 달리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모하는 시간, 끝없이 나아가는 무한한 연속의 시간이다(275-84). 이 시간 속에서 인류는 영원히 지속할 수 있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간관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전술한 '변하지 않는' 재산권 혹은 왕의 법적 인격과 같은 개념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어서 칸토로비츠는 이러한 시간개념이 왕/국가의 권력행사와 어떻게 맞물리는지--이것이 별개의 흐름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나는 '수렴진화'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정기적 세금의 등장인데, 본래 왕의 죽음 및 계승이라든가 딸의 결혼에 필요한 지참금과 같이 특수한 사건의 발생 시에 매겨졌던 세금이 항존하는 전쟁가능성으로부터 '왕국을 방위'(당연히 조국 개념의 일반화와 이어져 있다)하기 위한 "반복될 수 있는"(repeatable) 세금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예컨대 1년처럼) 주어진 시간단위가 돌아올 때마다 내는 정기적인 세금은 끝없이 지속되는 시간개념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직선이 실제로 고대의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과 매우 가까이에 맞닿아 있음이 바로 이런 세금 개념에서 드러난다). 

 2절은 교회의 회중이나 왕국의 인민들, 도시민들과 같은 집단적 법인 개념의 지속을 사고할 때 '천사들의 시간' 에붐의 시간관이 어떻게 그러한 지속가능성의 시간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는지를 설명한다. 예컨대 로마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시공간으로 간주되었을 때, 로마의 인민들은 설령 각각의 개인들은 죽어 사라질지라도 그 전체  집단은 유지된다는 점에서 영속적인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었으며(298), 이 논리가 집단을 대표하는 법인격 혹은 법적 신체(legal corporation)의 영속을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게 작용한다(테세우스의 배를 참고하라). 이러한 실체는 영속하면서도 각각의 개체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천상의 영원한 것과는 구별된, 마치 인간과 신의 사이에 있는 천사와 같이 여겨졌다--우리는 중세에 왕을 천사로 간주하는 논리의 등장 역시 이러한 시간개념을, 보편자와 개별자 사이에 있는 영속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수 있다. "변화하지만 동일성을 유지하는"(identity despite change) 것으로서의 universitas나 인민populus 개념은 이렇게 로마법 전통과 신학적, 법학적 변화 속에서 재구축된다. 이러한 영속 개념은 신체의 수사가 가졌던 기관학적 국가 개념(organological concept of state, 311)에 결여되어 있던 시간적 영속을 정치체에 부여함으로서 그것을 '시간 속에서' '법적으로 불멸하는'(legally immortal)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7. 7장에서 흥미로운 몇 대목들

1) 왕국이 영속하는 왕조 개념을 발명하게 된 것은 교황권의 지배를 막기 위한 측면이 있다. 성경의 바울로부터 유래하듯 왕들이 신의 대리자로 통치한다면, 한 왕이 죽고 통치자가 없을 때 그 왕국은 자연스럽게 신/그리스도의 통치에 놓인 것이 되며(while no king rules, Christ rules, 335), 이는 다시 신의 대리자(vicar)로서 교황이 통치권을 주장할 빌미를 제공한다. 왕국은 통치권의 계승을 개별 왕으로부터 왕조에 귀속시킴으로써 통치권의 공백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변을 만들었다(군주제에서 왕의 교체 시기에 생기는 공백의 문제점은 17세기 홉스에게까지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주제였다).

2) 왕관(Crown)은 국고(fisc) 및 영토(realm)를 상징한다. 이것이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실체로 상정되고 왕이 이 실체에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헌정주의적 논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왕관이 독자적인 실체가 되고, 또 나아가 왕의 법인격까지도 흡수하려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특히 영국 전통에서) 의회와 결합하느냐 여부는 왕에게 사적인 자연인으로서의 인격과 공적인 주체로서의 법인격의 분열을 겪을 수 있는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이는 3절에서 설명하듯 주교나 왕이 "도구"(instrument, 443)로 간주되는 논리로까지 나아갔다.

3) 3절 후반부에서 칸토로비츠는 다시 왜 "왕의 두 신체" 담론이 영국에서만 살아남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446-50). 확실한 사실은, 영국에서 "의회는, [정치적] 대표기능에 의해, 왕국의 살아있는 '정치체'였다"(Parliament was, by representation, the living "body politic" of the realm, 447)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는 측면에서 칼 슈미트를 염두에 둘 때 칸토로비츠의 기획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짧게 생각해보자(_Representations_ 106호에서 Richard Halpern이 이 주제를 짧게 다루었지만, 설령 그가 말하는 대로 칸토로비츠가 절대주권을 비판하고 의회를 옹호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 생각에 그의 논변이 핵심을 건드리는 것 같지는 않다). 주지하다시피--언젠가 정리글을 쓰겠지만--슈미트는 1920년대 초 <정치신학> 및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을 포함한 일단의 텍스트에서 고유의 정치신학론을 주장한다. 그 핵심적인 테제는 3장 첫 문장, 곧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김항 역 한국어역본 54)로 응축된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한편에는 신학 개념이, 다른 한 편에는 (법학으로 대표되는) 국가론이 존재하며,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근대의 세속화 과정이다. 아마도 이러한 구도 자체는 칸토로비츠 또한 공유한다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는 슈미트가 근대화를 (아마도 베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제틀 안에서) 파악하는 방식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정치신학> 2,3장에서 그 개요가, 그리고 <현대 의회주의>와 같은 텍스트에서 보다 분명하게 상술되듯 슈미트는 자유주의-의회주의-법적 실증주의-내재적 국가관 등으로 묘사되는 18-19세기의 근대화과정이 국가론이 신학적 개념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월적인 면모, 혹은 (주권자로 표상되는) 인격적 특성을 소거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적인 특성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이 점에서 적어도 2차 대전시기까지의 슈미트는 분명히 반(anti) 근대화론자의 시선을 띠고 있으며, <정치신학>은 이러한 근대 국가론의 쇠락 및 형해화에 대항해 '결정하는 심급'으로서 주권의 인격적 요소, 혹은 초월자적인 면모를 다시금 제기하는 텍스트다--조지 슈왑(George Schwab)의 영역본 1장 첫 문장, "Sovereign is he who decides on the exception"(5)은 슈미트의 사유에 인격적인 것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깃들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he who").

 <정치신학> 2판 서문에서 암시하듯 슈미트에게 근대의 세속화란 신학적인 요소, 즉 인격적인 것으로서의 주권이라는 본질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중성화" 과정으로서 일종의 '타락'에 가깝다면(국역본 8-9), 이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바로 영국의 의회주의 전통이다--<현대 의회주의>에서 그는 의회주의의 핵심요소 중 하나로 권력분립을 들며, 이때 해링턴, 로크, 샤프츠베리, 볼링브로크,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물론 20세기 후반의 사상사가들은 이 흐름에서 자유주의보다는 공화주의의 계보를 읽어내겠지만--일종의 영미적 계보로서 제시된다(나종석 역 한국어역본 85).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정치신학> 영역본 2005년 판 Tracy B. Strong의 foreword를 참고할 수 있겠다.


요컨대 근대의 세속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 및 영국적인 의회주의 전통을 그 중심사례로 간주하는 것을 슈미트의 핵심테제로 이해할 수 있다면(물론 <대지의 노모스>나 <햄릿 혹은 헤쿠바> 등의 텍스트에서 볼 수 있듯 1950년대에 들어 슈미트의 영국에 대한 평가는 다소 바뀐다), 우리는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칸토로비츠가 슈미트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째, KTB는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주권/국가 개념의 성립과정이 슈미트가 주장하는 '신학적인 개념의 세속화'처럼 분명한 직선적 서사로 정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칸토로비츠가 누차 강조하듯 교황권이 교회법을 통해 스스로를 정치체로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로마 제국의 붕괴 후 잔존한 로마법 및 제국의 논리를 참조하고 변형시킨 것이었으며, 교권과 속권의 모방 혹은 상호참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면, 슈미트가 일종의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위치에 놓는 '신성한 기원' 역시 "시간 속에서" 역사적인 형성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순수한 기원으로서의 로마 가톨릭과 그것을 세속화하는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대립구도가 성립하기도 전에 애초에 전자 자체가 끊임없이 형성되는 것이었다면, 슈미트의 서사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둘째, KTB는 슈미트가 근대 세속화의 첨병으로 삼는 영국의 의회주의 전통이 그 기원에서부터 정치신학적 개념형성과정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주권자로서의 왕을 의회=정치체의 법에 종속시키는 영국적 전통은 단순히 신학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정치신학적 전개로 이해되어야 한다. 칸토로비츠의 작업은 이런 점에서 정치신학이 결코 절대적 주권하고만 맞닿는 개념이 아니며 그것이 다양하고 복잡한 경로를 가질 수 있음을 역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근대=세속화=중성화=영국을 주요한 적수로서 겨냥하는 슈미트의 주장에서 핵심요소를 박탈한다.


이 두 가지 지점에서 드러나듯, 칸토로비츠의 작업을 정치신학 논쟁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과정은 어떤 형태로든 세속화secularization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오래된 질문과 맞닥트린다. 한국에는 칼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_Meaning in History_정도가 번역되었고, 홍철기의 논문 <세속화와 정치신학>(문학과사회 27.4(2014): 411-28)이 드물게 이 주제를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따라서 특별히 저자와 서지사항을 언급하지 않겠다)--최근 <세속화 예찬>을 포함해 아감벤의 저술들이 들어오고 있지만, 이게 어느 정도로 유의미한 저술인지는 조금 거리를 두고 보고 싶다. 이 주제는 비교적 최근에야 내 시야에 들어왔고,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공부해나갈 것이기에 유의미하게 무언가를 정리할 역량은 없다. 그러나 칸토로비츠가 중세-근세의 세속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 이것을 단순히 타락이나 중성화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애초에 신학적 개념 자체가 세속적 세계의 논리를 흡수하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그리고 오늘날 정치를 구성하는 주요한 논변들이 다시금 이러한 흐름에서 자신들의 수사를 끌어왔다면--더불어 이러한 수사적/개념적 전유와 다른 층위에서 세속화된 실천들이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면--이것들에 어떤 강력한 가치를 부여하기는 무척 힘들어진다. 슈미트가 주장하는 '목적으로서의 기원'도, 그 반대편에서 형식적으로 완결된 근대 세계를 찬탄하며 세속화의 완성을 선언하는 외침도 칸토로비츠의 역사적 설명 안에서 녹아 스러진다. KTB는 역사는 그저 그렇게 만들어져 왔으며 어떤 것도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텍스트처럼 보인다.




예전에 지인과의 대화 과정에서 <왕의 두 신체>에 "세속화"(secularization)란 단어가 얼마나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필요하신 분을 위해 사용된 주요 예시들을 옮겨둔다. 이런 대목들을 통해 칸토로비츠의 저작에서 세속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개념이었는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1) p.12 각주

 2) 60("secularized canon law")

 3) 93("strangely secularized")

 4) 141("What matters here is the obvious secularization of royal mediatorship through the new jurisprudence, a development comparable to the secularization of the rex et sacerdos ideal and of many another notion")

 5) 192("But this hallowing of the status regis et regni, of state institutions and utilities, necessities and emergencies, would have remained incomplete had not that new state itself been equated with the Church also in its corporational aspects as a secular corpus mysticum.")


 6) 197("It was the beginning of the so-called secularization of the mediaeval Church")

 7) 201("to "secularize" the notion of "mystical body."")

 8) 207("The noble concept of the corpus mysticum, after having lost much of its transcendental meaning and having been politicized and, in many respects, secularized by the Church itself,

easily fell prey to the world of thought of statesmen, jurists, and scholars who were developing new ideologies for the nascent territorial and secular states.")

 9) 230("process of secularization")

 10) 235("From the outset, therefore, one should at least consider the possibility whether-before the full impact of legal and humanistic doctrines became effective-the new territorial concept of

patria did not perhaps develop as a re-secularized offshoot of the Christian tradition and whether the new patriotism did not thrive also on ethical values transferred back from the patria in heaven to the polities on earth.")


 11) 246("Secularization had other facets as well.")

 12) 246("And this was done in the name of caritas-no longer, to be sure, the evangelical virtue of Charity as an expression of active brotherly love, but its secularized counterpart: a publica caritas, as Baldus called it, for the protection of the naturalis patria.")

 13) 248("Nothing would be easier than to extract many relevant passages from the writings of Petrarch, Boccaccio, Salutati, Bruni, and others, and to show how the secularized Christian notions of martyr and caritas henceforth were sided by the classical notions of heros and amor (patriae).")

 14) 278("We may consider, perhaps, "immortal fame" in this world as the equivalent of or secular substitute for the immortal beatitude of the other world")

 15) 279("Aristotelian uncreated "world without end" likewise in terms of some secularized Eternity")


 16) 281("The revival of the Aristotelian "eternity of the world," which presupposed and resulted in the immortality of the genera and separate species, was therefore indeed a "secularization" of the angelic aevum: an infinite continuum of Time was, so to say, transferred from heaven to earth and recovered by man.It was the secularization of the Christian concept of continuity perhaps even more than the classical belief in the circular motion of an infinite time, which the Averroists likewise endorsed, but which was one of the least acceptable of their theses.")

 17) 298("the perpetuity of kingdoms and communities "having no superior" rested on more than the transfer and secularization of the empire idea.")

 18) 397("And later authors declared straightforwardly that the phrase imperium semper est referred to the Dignitas. This is a secularization of old ideas: the perpetuity of the empire no longer derived from God and the divine dispensation, but from the fictitious, if immortal, personage called Dignitas, from a Dignity created by the policy of man and conferred upon the Prince or present office-holder by a likewise immortal polity, by an universitas quae nunquam moritur.")


 19) 438("That the king as King was "incorporated with his subjects, and they with him," was a saying at which the jurists, despite the ominous word "incorporated," could have arrived easily from the relatively safe grounds of organological concepts or of the corpus mysticum doctrine in its secularized form; it meant that the king as the head and the subjects as the members together formed the body politic of the realm.")

 20) 445("Not without some inner logic and some inner necessity have both separation and union of the "King's two Bodies" produced the dogma of a political Incarnation, a noetic incarnation of the Dignitas or of the Body politic, and therewith a new secularized version of the hypostatic union of the first and second persons, of Dignitas and rex.")

 21) 463("Dante, in order to justify the self-sufficiency and sovereignty of the universitas generis humani, appropriated, like the jurists, theological language and ecclesiastical thought for expressing his views concerning the secular body politic; and thereby he arrived at the construction of "a secularized imitation of the religious notion of the Church,"[Gilson을 인용] while endowing his creation even with a blessedness of its own: the terrestrial paradise.") / 471, 484쪽도 마찬가지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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