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한국어판 읽기 전)

Comment 2015. 12. 15. 12:41

밤샘하다시피 페이퍼를 쓰다가... 오전에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039857). 영서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Taylor, Charles.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Cambridge: Harvard UP, 1989. 여름방학 때 강독세미나를 한지 반년 만에 한국어역이 나왔으니 반갑기도, 살짝 억울하기도 한 기분인데, 이 책의 탁월함에 대해서 구태여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미/대륙철학(그는 통상적으로 별개의 전통처럼 간주되는 두 영역 모두를 폭넓게 흡수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철학사, 종교사, 지성사, 문학의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저작이라 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지적 강도가 엄청났을텐데(거기에 테일러의 기품있는 문장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공역자들의 경력을 봤을 때 번역의 질이 크게 걱정 되지는 않는다. 다만 출판사가 이 책의 가장 큰 불안요소라서 내가 한국어판을 읽어보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원서가 대충 24$, 현재 환율로 2만 8천원 쯤 되는데 한국어판은 6만 5천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이다; 번역의 노고와--물론 역자들에게 제대로 된 번역료가 지급된다는 전제 하에서!--1064쪽의 물리적 양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독자들에게 가격부담이 되긴 할 것 같다. 원서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을 읽기 부담스러운 분들에게는 선택지가 없겠지만 말이다.


사소한 트집을 잡자면, 목차 번역 중에서 21장 "The Expressivist Turn"을 한국어판은 "표현주의적 전회"라고 옮겼는데, 테일러가 통상 표현주의로 옮기는 "expressionism"을 일부러 피해 자신만의 용어를 만든 거라 이전에 이 용어를 번역표기한 사람들은 "표출주의"로 옮기곤 했고, 나도 그 선택을 지지하는 편이다(의미 상으로는 크게 차이는 없다; 어차피 대략의 의미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우주-자연-보편적인 것을 인간의 바깥으로 꺼내어 펼친다는 뜻이라).


더불어 출판사 책소개에서 "'탈주술화', '도구적 이성', '순수이성', '자연 속의 인간' 등 지금까지 근대와 관련해 제출되어온 모든 논의에 대한 급진적 해체와 도덕철학적 재구성"이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에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테일러의 논의는 해체와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 전개된 다양한 근대론들을 교통정리하고 연결하여 (서구) 근대 주체를 형성하는 여러 측면들을 담아내는 보다 거대한 역사적 서사 혹은 해석적 공간을 만드는 쪽에 가깝다. 실제로 테일러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남길 때조차도 매우 온건하게 말하는 매우 섬세한 저자며, 이 책의 논의는 상당부분 세분화된 여러 분과학문에서 성취된 1급의 2차 문헌들을 정리하고 테일러 자신의 맥락에 담아내는데 할애된다. 그래서 연구자들에게는 (물론 25년전의 시각이니 그동안 업데이트 된 것들이 많겠지만) 다른 필드들에서 나온 주요 문헌들을 따라가며 참고할 수 있는 게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테일러는 자신의 작업의 의의를 이미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독창적인 해석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포괄적인 조망 및 지도를 제시하는데 초점을 두며,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이런 저작이 나오기 위해선 먼저 각 분야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아의 원천들>은 그 자체로 동시대 서구 학술전통의 힘을 보여주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테일러가 "20세기의 주요한 시인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한다는 (출판사 책소개의) 진술은 그 자체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19세기부터 모더니즘까지를 따라온 독자들에게 테일러가 제시하는 맥락은 깊이 음미할 만하지만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테일러의 서술이 나오기까지 밑바탕이 되는 시공간적으로 광범위한 서구 학적 전통/네트워크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에 문제가 있다.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수사에 명저를 뻔하디 뻔한 책으로 오해하고 넘어가는 독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덧붙인다.


요약하면, 번역과 편집에 문제만 없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반드시 읽을만한,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P.S. 테일러의 (그리고 출판사 책 소개의) 푸코에 대한 코멘트는 무시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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