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주트. <포스트워>, <기억의 집>, <재평가>.

Reading 2015. 10. 25. 05:20
토니 주트. <포스트워 1945∼2005: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뛰어든 유럽 이야기>. 조행복 역. 전2권. 플래닛, 2008.
---. <기억의 집>. 배현 역. 열린책들, 2015.
---. <재평가: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조행복 역. 홍기빈 해제. 열린책들, 2014.

정신없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10월 말까지 코스웍과 세미나를 제외하고도 글 두 편을 끝내야 한다!) 토니 주트Tony Judt의 책을 몰아서 읽는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추석 연휴 때부터 읽기 시작한 두꺼운 <포스트워>_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_를 드디어 마쳤고, <기억의 집>_The Memory Chalet_ 및 <재평가: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_Reappraisals: Reflections on the Forgotten Twentieth Century_를 보았다. 다음 주는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더 읽을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고, 11월 초에는 <지식인의 책임>, <20세기를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까지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번역은 지금까지 읽은 것들은 대체로 만족스럽다(다만 <포스트워>는 내가 읽은 1판 1쇄를 기준으로 볼 때 교정을 한번쯤 더 거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현재로서는 이 책이 추가적으로 인쇄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트가 불과 5년 전에 역사가로서는 아직 한창때인 60대 초반에 죽었으며 한국의 지식장에서 역사가들의 저술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역사는 많은 덕후집단을 거느리고 있지만 덕후집단 안팎의 온도차가 매우 큰 분야이기도 하다--그의 책이 이토록 많이, 빨리, 괜찮은 수준으로 번역된 것은 어쨌든 한국의 독자들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여섯 권의 여정을 마친 뒤 간단하게 종합적인 소감을 쓰고 싶지만, 우선 부족하게나마 중간보고를 하자.

<포스트워>는 현대 유럽사에 관해 비전공자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저술에 속한다. 2차 대전 이후 현대 유럽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한국어 서적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집권정당의 국회의원이 공개석상에서 전후 독일에 좌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어떤 부끄러움 없이 말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 책의 탁월함을 '상대적 우위'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좀 부족하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포스트워>는 뛰어난 책이다. 주트는 본문 기준 원서 830여쪽, 한국어판 134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서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포괄적인 '유럽사'를 조망하는데 성공한다; 전후에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부재했는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냉전체제(정확히 말하면 소련 체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통합된 유럽연합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그리고...유태인 학살이 어떻게 망각되었다가 다시 유럽인들의 기억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내용을 이 정도로 밀도있게 서술하는 역사서를 요약하는 건 무의미하기에 나는 이 이상을 책의 내용을 말하지는 않겠다.

전쟁의 폐허로부터 EU가 등장하기까지를 훑는 주트의 서사를 소개하면서 플롯만을 제시하는 건 저자에게 불공평한 일인데, 왜냐하면 이 책의 최대 강점은 우리가 '동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매우 공들여 서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주트는 동유럽의 비극적인 일들을 냉정함을 유지한 채 서술하며 역으로 이를 통해 서유럽의 환경을 되비추어봄으로써 이른바 "제1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이전까지 20세기 통사로서 가장 널리 읽힐만한 책이 <극단의 시대>_The Age of Extremes_였다면(다행히도 이 책은 홉스봄 번역의 저주로부터 그나마 멀리 벗어난 편에 속한다), <포스트워>를 읽은 독자들은 홉스봄의 시야가 미국에 대한 서술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유럽사에서도 상당히 큰 구멍을 감추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여기에 암시되어 있듯 <포스트워> 서술의 형식적 층위에서 국제관계사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국가는 기본적인 설명 단위로서 그중에서도 정치경제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되지만 물론 저자의 시선은 일국에 머물지 않고 각국의 상황이 어떻게 서로 연관 맺고 있는지를 짚는다. 각국 내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타국과의 관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솜씨있게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폭넓은 시야를 갖고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명료한 지성의 소유자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주트 자신은 매우 의아해하겠지만 나는 맑스주의자 로버트 브레너의 탁월한 책 <붐 앤 버블>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 책이 논쟁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는 저자의 확고한 정치적/윤리적 입장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직접적으로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기술에서는 능숙함을 갖춘 집단이라면, 주트는 그 미덕을 갖추었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그리고 역사적 대상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선명하게 표현하는 쪽에 가깝다. 그는 낙관론자가 아니면서도 시장자유주의도, (혁명적) 공산주의도, "제3의 길"도 아닌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계승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강하게 주장한다(<재평가>에서 주트의 전체 이력을 훑는 유용한 해제를 단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홍기빈 선생임은 실로 적절하다). 이것은 <포스트워>의 결론부에서 다소 암시적으로, <재평가>의 결어에서 좀 더 선명하게 주장되듯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어쨌든 주트는 유럽의 많은 영역이 EU체제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에서조차도 국가의 역할이 사라질 수는 없으며 사라져서도 안된다고 믿는다(그가 그리스 국가채무를 둘러싼 협상과정 및 그렉시트 사태를 볼 정도까지 살았다면 어떤 논평을 남겼을까?). 주트의 고민이 국가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 직전까지 가는 걸 보게 되면 정작 주트가 그다지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았던 푸코의 70년대 후반 강의들을 떠올리게 된다.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든 20세기 이후의 세계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장치다.

주된 교육을 영국에서 받은 1948년생 주트는 10대에 맑스주의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접했고, 유대인으로서 키부츠 생활경험을 겪은 뒤 빠져나왔으며, 68혁명 때 파리에 있었고(그리고 프랑스인들에 대한 냉소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동유럽 반체제 인사들에게 실질적인 관심을 갖고 80년대에 교수신분으로 직접 체코어 및 체코역사를 공부, 자신의 주 관심영역으로 흡수했다. 결과적으로 좌파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맑스주의 및 신좌파 이론 모두와 거리를 두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독특한 입장을 유지한다. 여기에는 엘리트 역사가로서 교육받은 영국인에 수반하는 태도, 즉 신랄한 냉소를 갖추었으면서도 도덕적으로 진지한 (오늘날엔 희귀해진) 정신적인 전형이 깃들어 있다--나는 상당히 다른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E. H. 카를 떠올린다. 유대인 학살을 망각했던,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일들에 무지할 뿐더러 관심도 없었던 구/신좌파들을 날카롭게 겨냥하는 멘트에서 독자는 주트에게 윤리적인 면모가 절대로 지워버릴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배태한 시기에 대해 이토록 확고한 정치적/윤리적 판단을 제시한다는 사실은 <포스트워>의 선명한 특징이며 이 저술에 대해 찬반이 갈릴 만한 지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윤리적인 의무감이 역사가로서의 의식과 결합하여 우리가 20세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주트의 서술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도 사실이다(주트의 저술 통틀어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기억"이다).

저술 및 저자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두기는 할 수 있다. 20세기가 호된 경험을 통해 도달한 산물인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주트의 정치적 믿음은, 물론 그의 진정한 마지막 작품인 <20세기를 생각한다> 및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보기 전까지는 말을 아껴야겠지만, 이론적으로 엄격한 정당화라기보다는 경험과 '전통'에 대한 존중과 맞닿아 있다. <재평가>의 마지막 꼭지글을 읽는 독자가 에드먼드 버크를 떠올릴 때 주트는 무슨 생각을 할 지 모르겠다; <기억의 집>에서 주트는 과거의 특정한 생활방식에 대한 진심어린 향수와 옹호를 피력한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대목에서 진보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며 자신이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인 한 어쩔 수 없이 이러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데, 주트의 정치적 입장 또한 그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상식적인' 측면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가 의도한 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다음으로 특히나 '프랑스적인 것들', 신좌파의 후계자들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 주트가 충분히 사려깊은 서술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재평가>에 실린 알튀세르에 대한 글은 심지어 나쁜 점에서도 주트답다...알튀세르의 신봉자가 아니더라도 주트의 알튀세르 비판이 상당히 진부한 버전임을 알 수 있다). 포스트-연구들이나 문화연구, 급진 페미니즘 및 정체성 정치의 등장은 적어도 미국 및 그 영향 하에 있던 나라들에서는 지성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운동 및 사회사의 측면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음에도 불구하고(공정하게 말하자면 영국의 대학가는 미국만큼 이것을 신속하게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주트는 68혁명을 당대의 정치경제에 끼친 영향력으로만 판단하며 그리하여 다소 성급하게 조롱하고 치워버린다는 인상을 준다; 그게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영국인 역사가'의 (E. P. 톰슨이나 홉스봄 역시 공유한) 뿌리깊은 혐오감에 기인한 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던지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신좌파 및 계급운동 이후의 각종 시민운동에 있어 주트의 서술은 그 대상의 진실보다는 서술하는 시선 자체에 대해 더 많은 걸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포스트워>에 대한 내 입장은 다음과 같다. 몇몇 논쟁적인 지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상당히 길고, 그러면서도 엄청난 양의 지식이 압축적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빽빽하게 읽힌다(서양근대사에 대한 대략의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 이 책이 어느 정도의 난이도로 다가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읽어라. 나는 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지인들에게는 좀처럼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난 이미 전문적인 영역에 들어온지 시간이 제법 흘렀고, 내 관심사는 '한국인 독자 평균'의 관심사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스트워>를 내 친구들이 읽기를 바란다. 특히나 공적인 위치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이미 현대 유럽에 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예외일 수 있겠다). 시야와 깊이, 날카로움 모두에서 아주 많은 걸 가르쳐주는 1급의 저작이다. 주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를 존경하지 않기란 어렵다.


<포스트워>가 주트의 가장 위대한 저술이라면 <기억의 집>은 가장 매력적인 소품이다. 루게릭병 발병 이후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 혹은 개인사 기록에 가까운 <기억의 집>은 주트 본인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전후 유럽에서 태어나 살아간 한 '유럽인'(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의 정체성만 가진 것은 아니기에)의 삶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전후 영미 대학에 관해서도 인상적인 스케치들이 나오며 (케임브리지 교육에 대한 짧지만 인상깊은 묘사가 여럿 있으며, 프랑스 고등사범학교 및 미국 대학에 대해서도 따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종종 주트의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이 복잡한 성격의 책을 나는 좀 더 오랜 전통, 즉 에세이 글쓰기 전통의 후계자로 간주하고 싶다. 루게릭 병에 걸린 처지를 담담하게 서술할 때 주트는 때때로 스토아학파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 또한 매우 깊은 사고를 촉발한다(마치 몽테뉴의 저술처럼 말이다). 역사가의 자서전이라면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라는 (역시나 번역에서 운이 충분히 좋지는 못했던--물론 읽는데는 큰 지장이 없다) 두툼한 책이 있는데, <기억의 집>은 훨씬 작고 초라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상만큼은 홉스봄의 자서전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박식함과 함께 과거의 가치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실제로 <기억의 집>의 주트는 다른 데서보다도 홉스봄에게 가까이 간 것처럼 느껴진다.

<재평가>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및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20여건의 서평 모음집이다. 주제별로 다양한 책들을 다루니만큼 독자들의 관심사 또한 분할되겠지만, 주트는 언제나 주트로 남아있으며 그의 주요 관심사와 명민함은 바래지 않는다. 책의 절반은 프랑스 지성사로 출발한 주트의 초기 이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지식인 및 지성사적 측면에 할애되어 있다. 다만 특히나 전후 동유럽 문제에 대한 해당 지식인의 태도가 주트의 평가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절반에서 좋게 말해 일관된, 나쁘게 말하면 반복되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물론 그 주제는 중요하지만 나는 특히 지성사적 작업에서는 다음 대목이 뻔히 예상되는 독서와는 다른 풍성함을 기대한다). 개인적으로는 남은 절반, 즉 3부와 4부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3부는 유럽의 곳곳에 대한 통렬한 논평을, 4부는 (<포스트워>에서는 항상 배경에 드리워져 있던) 미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가 특히나 그 자신이 이미 연구한 국가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해당 지역에 관한 짧고도 상세한 전반적인 개요를 거의 백과사전 항목을 읽는 경탄과 함께 제시한다면, 4부는 주로 (냉전기 및 이라크전쟁 시기의)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포스트워>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재평가> 3, 4부의 여러 부분이 <포스트워>에서 압축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서술하고 있음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그런 점에서는 4부가 조금 더 새로울 것이다. 그 어느 대목에서든 (굳이 예외를 꼽자면 알튀세르에 대한 글 정도) 주트는 박학함과 명료함, 날카로움을 유지하며, 이는 특히 자신이 논평하는 저술의 장단점을 소개할 때 빛을 발한다(키신저에 대한 논평이나 존 개디스John Gaddis의 냉전사에 대한 평을 보라).

<재평가>와 비견될 만한 서평집은 한국어로 된 것 중에서는 현재로서는 페리 앤더슨의 <스펙트럼>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양자의 강점도, 관심분야도 다소간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하지 않겠다. 서평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장르가 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는 이들의 저술을 읽으면 감탄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왜 우리에겐 이런 저술이, 필자가, 나아가 지면 자체가 부재한지 역시 묻게 된다. 한국의 유력한 보수언론들은 지적으로 깊은 관심사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으며 (최근 조선비즈에서 때때로 파워인터뷰를 행하는데, 질문의 수준은 대체로 평범하며 지적으로 독자를 두뇌를 자극하는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유감스럽지만 주요진보언론도 아주 낫다고는 할 수 없다. <교수신문>은 정기적으로 책소개를 하지만 전문적인 관심사를 깊게, 논쟁적으로 들어가는 글은 좀처럼 나오지 않으며 <프레시안>이 한때 이런 과업을 시도했지만 과거의 일이다. 지면이 없으니 필자도 없고, 글이 없으니 날카로운 독자들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앤더슨이나 주트의 서평집이 번역되는 건 이런 상황에서 반가운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좋은 서평조차도 수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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