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히스토리아>, 혹은 세계의 비참과 자유에 관하여 [120916]

Reading 2014. 3. 18. 11:47

*2012년 9월 16일 페북에 썼던 글.


<피터 히스토리아>, 혹은 세계의 비참과 자유에 관하여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중

 

비록 부천만화상, 그것도 대상이라는 꽤 굵직한 상을 수상했다고는―그래서 저자들의 경제적 걱정을 조금 덜어주었고―하지만, <피터 히스토리아>라는 한국에서 이례적인 ‘청소년 학습만화’가 고작 그러한 장식적인 칭찬만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이 어떤 면에서 뛰어난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는지를 쓸 의도는 없다. 그러나 몇 번을 읽어도 어떠한 ‘울림’ 혹은 가슴 서늘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조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다.

 

얼핏 볼 때, 관찰자이자 때로 주인공인 피터 히스토리아가 겪는 사건들은 (적어도 내가 어린 시절에 많이 접했던)고전적인 ‘역사학습만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터(그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나타나지만 일단 표제에 나오는 이름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자)가 최초의 질문들을 갖게 되는 메소포타미아의 문명들로부터 이 책이 출간된 시점과 거의 동시대인 기원후 2천 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인 순서로 이야기들이 배열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작품들에 반기를 든다. 먼저 내용의 측면에서 일관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위 진보적,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신좌파적인 관점이 눈에 띈다. 한국사회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관점은 아직도 휘그whig 사관의 확대된 판본으로서 근대문명에 도달하기까지 서구-백인-남성 주체가 겪는 모험담/성공담의 큰 틀 안에 입각해 있다―이러한 반동적 태도는 최근 우파적 사관의 득세로 인해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배제된 이들의 시점을 도입하는 전략을 통해 그러한 서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수법을 취한다. 애초에 어디에서도 이방인으로서 취급받는 주인공의 존재가 매순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타자의 문제를 상기시키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지 않은가? 더불어 인물들을 단순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해 동원해야하는 장기말처럼 다루지 않는 태도, 잠시 지나가는 인물에게조차도 꼼꼼한 시선으로 말을 건네는 피터-저자의 정서 또한 ‘학습’을 위해 삶을 질식시키는 역사교육의 통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미 ‘진보적’ 담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상식적인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정리한다면 <피터 히스토리아>의 서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나아가 이 작품에 내포된 진정한 물음을 역사를 배제된 타자들을 지속적으로 사회 내로 흡수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형태의 발전적 역사관과 구별하여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서사의 형식적인 측면을 조망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총 7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는데, 피터 자신의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을 (그래서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피터는 층층이 쌓인 내면을 가진 ‘깊이 있는’ 인물이 된다) 도외시한다면 이 모든 작은 이야기들은 사실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피터가 겪는 일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세계의 비참’이다. 그가 아동노동의 착취를 통해 이윤을 확보하는 산업혁명기 영국의 공장에 갇혀 내뱉는 말은 텍스트 전체를 관통해서 유효하다―“또 노예인거야…빌어먹을, 또 노예라구”(2권 72쪽). 노예라는 단어는 중요하다. 이 표현을 피터가 처음 억압적인 권력을 마주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제국이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이 명시적으로 노예제 위에서 운영되는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좁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공식적으로 노예를 허용하지 않는 19세기 중반의 영국은 말할 필요도 없고, 2차 대전 하의 유럽이나 미군에 의해 폭격 받는 아랍인들의 땅에 이르기까지 표면적으로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서도 인간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위협받고 착취당하는 상황은 역사의 그 어떤 시기에서도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마치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 Glass의 체스판 위처럼, 인간들의 삶은 매순간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피터 히스토리아>는 동일한 이야기들의 반복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몇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소년의 몸을 취하고 있는 피터 ‘히스토리아’는 그 근본적인 형태에서 성장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역사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피터 히스토리아>는 단지 절망적인 진실을 이야기할 뿐인 텍스트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비록 후반부로 갈수록 피터가 맞닥트리는 문제들은 투쟁의 지점과 대상들이 불분명해지고 (예컨대 폭격당하는 아랍인들은 폭격하는 이들은 단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상상적인 방법들도 허용되지 않지만, 우리는 <피터 히스토리아>의 모든 이야기들이 비단 고통과 절망만이 아닌 그것들에 대한 저항과 분투,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희망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항의 지향점으로 끊임없이 호출되는 개념은, 최근 한국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심각하게 오염되었지만, “자유”이다. 앞서 언급한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로부터 모티프를 따온 장의 마지막 컷은 무제약적인, 유토피아적인 자유를 구현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비단 서사의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측면에서도―장면이다. 공장의 문을 부수고 뛰쳐나온 아이들은 공장주와 노동 착취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 나간다. 달리기가 계속되는 와중에서 어느새 배경은 녹색 벌판으로 바뀌고, 그곳에서는 오직 아이들만이 밝은 표정으로 있을 뿐이며 가볍게 푸른 하늘과 작은 구름들, 그리고 힘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감싸주는 바람만이 그들을 맞이한다. 마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편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떠올린다.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언제까지나 이대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면…”(2권 102쪽). 이 컷은 강력한 희망과 눈물이 나올 정도의 슬픔 모두를 불러일으킨다. 어떠한 궁극적인 목표지점이 있고 순간적으로나마 현세에서 그러한 꿈의 조각을 맛볼 때의 행복과 함께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인식―나는 이것을 의지와 가능성에서 출현하는 또 다른 진실이라고 부르겠다―에서 비롯되는 희망이 있다면, 그 직후에 결국 그러한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다시금 세계의 비참을 눈앞에서 목도해야만 한다는 ‘내려옴’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슬픔이 독자들을 감싼다. 두 가지 인식/감정이 각자 나름의 진실로서 병존하는 이 텍스트의 서사를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형식과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하는 의지, 유토피아를 향한 염원을 담은 내용 간의 변증법적인 대립구도로 파악한다고 해서 무리는 아닐 것이다―바로 그러한 구도 자체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울림을 전해주는 어떤 진실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 점에서 <피터 히스토리아>의 무의식으로서의 서사형식(내용과 형식의 대립을 포함한)은 이 텍스트가 자신의 의식적인 측면을 점유하는 ‘진보적’ 입장의 조잡한 사례들 중 하나로, 예컨대 앞서 언급했듯 단순히 더 많은 양의 타자들을 포함할수록 더 나은 사회라고 간주하는 태도라든가,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 책의 저자들 중 하나인 ‘교육공동체 나다’의 수업에서 강조되는 가르침처럼, <피터 히스토리아>는 단순히 대립적인 두 입장/태도를 나열하고 그 사이에서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머무는 선택지 아닌 선택지에 머물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에서 폭격과 함께 정신을 잃은 피터 히스토리아는 노인 모습을 한 또 다른 피터 히스토리아와 대면한다. 두 명의 피터 히스토리아는 각각 지금까지 말한 두 가지의 진실을 대표한다. 역사의 모든 쓰라림을 겪고 동굴에 남기로 결심한 노인은 절망적인 진실, 역사가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경험적 사실’을 가리킨다. 노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다시금 “수많은 자기 자신”들을 만나기 위해 뛰쳐나가는 소년은 주어진 사실을 넘어선 진전=자유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소년은 자신의 선택을 노인처럼 차분하게 경험에 의거해서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믿음과 가능성의 차원인데, 이는 결코 비현실적인, (나쁜 의미에서)낭만적인 태도로 매도당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인간은 의지를 통해 세계를 이전과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음과 의지의 차원으로만 소년의 선택이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 그에 더하여 소년이 자기의 선택지에 덧붙이는 추는 윤리의 차원이다. “그곳에, 세상 속에 내가 있어요. 수많은 내가 있어요. […] 제가 ‘역사’에요”(2권 246쪽). 소년 피터의 진술은 역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인간집단들과,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읽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개인들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겪고 있을 세계의 비참이 자신과 분리될 수 있지 않듯,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고 구원할 의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그 의무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소년 피터가 다시 한 번 동굴을 떠나 역사에 복귀하는 선택은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의 무게를 싣고 있기에 결코 부질없는 “한번만 더”라는 요청, 또는 주의주의(主意主義)적 태도와 동일시될 수 없다.

 

좋은 인문학적 텍스트는 결코 한 가지 층위의 해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내 판단에는)<피터 히스토리아>는 그러한 해석이 자신의 지배하도록 쉽게 놓아두지 않겠지만, 이 텍스트의 서사 구조는 그 자체로 역사적 산물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할 생각도 없으며 그럴 형편도 되지 않는다. 다만 최종적으로 텍스트가 제시한 윤리적인 선택지가 저자들, 혹은 한국의 이른바 ‘진보세력’과 좌파들이 처한 곤경에 내놓는 답변으로서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만을 언급하겠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기계적인 앎의 축적만이 아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어떤 ‘불의 강’을 건너는 순간에는 분명히 지식과 논리의 영역을 넘어선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을 위한 교육의 가능성이야말로 <피터 히스토리아>가 찾고자 하는 가장 절실한 목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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