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한 대목 인용

Reading 2015. 9. 19. 00:51

벌초하러 집에 내려온 김에 다시 훑어보았다. 그 사이에 그래도 좀 더 공부한 게 있어서인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다 풍성한 텍스트임을 확인했다. 아래 문단은 아마도 이 방대한 저술의 요약에 가장 가까운 내용일텐데, 이것을 충분히 풀어내어 이해하기 위해 그만한 공을 들여야 한다.


페리 앤더슨.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김현일 역. 현실문화사, 2014. 630-31. [결론]


"성격과 구조에서 유럽의 절대군주정은 여전히 봉건국가 즉 중세를 지배하던 것과 동일한 귀족계급의 통치기구였다. 절대왕정이 탄생한 서유럽에서 그것이 통치하던 사회구성체는 봉건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것으로서 점차 성장하는 도시의 부르주아지와 국제적인 규모의 본원적 자본 축적을 수반했다. 단일한 사회 내에서 두 개의 대립적인 생산양식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절대주의라는 이행기적 형태가 탄생했다. 새 시대의 왕정 국가는 비록 완전히 통일적인 정치체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순수한 봉건적 생산양식 자체에 내재한 통치권의 분할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상업자본주의와 메뉴팩처 자본주의의 확산--이는 농촌에서의 일차적인 봉건적 관계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에 수반된 상품생산 및 교환의 증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농노제의 소멸이 곧 직접생산자로부터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사적인 경제외적 강제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토지귀족은 경제적으로는 계속 기본적인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권력기구 전체에서 중요한 지위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봉건적 강제는 중앙집권화된 군주정으로 상향이동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귀족계급은 쇄신된 국가구조 내에서 관료직을 차지하기 위해 신분의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첨예한 긴장이 다수의 영주 반란을 야기했다. 왕의 권력은 흔히 귀족계급 구성원들에 대해 무자비하게 행사되었다. '절대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사실 엄밀하게 보아서는 잘못된 명칭이지만 귀족신분 자체에 부과된 새로운 군주정의 압박을 잘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절대왕정을 세계 다른 곳에서 지배적이었던 개인 주권자의 수많은 전제적, 자의적, 폭군적 지배 형태들과 다른 것으로 만들었던 기본적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왕정국가의 정치적 지배권 강화는 귀족 토지 소유권의 경제적 안정의 감소가 아니라 전반적 사적 소유권의 그에 상응하는 강화를 수반했다는 점이다. '절대주의적' 공권력이 강요되었던 시대는 또한 동시네 '절대적' 사적 소유권이 점차 공고화된 시대였다. 부르봉 가, 합스부르크 가, 튜더 가, 바사 가의 군주정들을 유럽 바깥에 있는 술탄 제국이나 막부체제와 다르게 만든 것이 이 중대한 사회적 차이였다. 유럽 땅에서 오스만 국가에 직면했던 당대인들은 이 깊은 차이를 계속해서 날카롭게 의식했다. 절대주의는 귀족 지배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유럽에서 세습귀족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보호하고 안정된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군주정을 지배한 왕들은 그들의 권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그것은 왕들 자신이 속해 있는 계급의 재생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이라는 한계였다. 보통 이러한 상황에서 군주들은 자신들이 그 귀족계급의 성원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신분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자부심은 집단적인 감정적 연대에 기반을 두었다. 그래서 절대주의의 찬란한 상부구조 밑에서 자본이 상부구조에 한층 다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 서서히 축적되어간 동안 근대 초 유럽의 귀족 지주들은 이제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왕정 속에서, 그리고 왕정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경제적인 보호를 받고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며 문화적으러 성숙되었던 귀족계급은 여전하 사회를 지배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서유럽의 복합적 사회구성체 내에서 끊임없이 싹을 틔우고 있는 자본에 귀족계급의 우월적 지위를 맞추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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