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문명, 미개에 대한 노트.

Critique 2015. 9. 6. 16:08

경향신문 주말판에 나온 기사들이다.


[커버스토리]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42059215&code=940100)


[커버스토리]‘사회’ 없는 국가, ‘희망’ 잃은 청년…“한국은 지옥이라 불려 마땅하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42213005&dable=10.1.1)


귀를 막은 기성세대에게…“체념 말라” 훈계만 말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42059465&dable=10.1.1)




박은하​ 선배의 기획이 드디어 나왔다. 엮인 기사도 같이 링크한다. 대학원도, 교수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로스쿨을 졸업하거나 행정고시를 합격한 친구들도 특히 막내에 대한 노동착취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공유한다. 청년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결정권을 쥐고 있는 '어르신들'은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비명소리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점점 더욱 크게 울려퍼진다. 고장난 축음기처럼 '노오력'만을 말할 뿐인 부모, 사장, 상사, 관료, 국회의원들도,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죽창'도 모두 '미개'하다. 상승, 극복, 탈출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세계는 지옥과 같으며, 그 지옥을 넘어서려 하는 이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착취적 질서는 전근대적 사회의 기표 조선과 같다--이렇게 '헬조선'이 탄생한다. 어느 곳을 돌아봐도 답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비명의 울림은 더욱 커져 가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이 망해버려도 좋다는 자기파괴적인 저주 역시 그러하다. 눈덩이처럼 부풀어오르는 원한과 절망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세상, 그럼에도 무기라고는 고작 죽창 뿐인 세상, 그러나 그 죽창 앞에서 나자빠진 시체들로 가득한 세상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기사에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어떻게든 좌절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다. 누군가는 <데빌맨>의 종반부를, 누군가는 로메로의 _Land of the Dead_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런던>"London"을 생각한다.


I wander thro' each charter'd street,

Near where the charter'd Thames does flow. 

And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In every cry of every Man,

In every Infant's cry of fear,

In every voice, in every ban,

The mind-forg'd manacles I hear 


How the Chimney-sweeper's cry

Every blackning Church appalls, 

And the hapless Soldier's sigh

Runs in blood down Palace walls. 


But most thro' midnight streets I hear

How the youthful Harlot's curse

Blasts the new-born Infant's tear 

And blights with plagues the Marriage hearse.


"특권이 점유한 템즈 강가를,

특권이 점유한 거리들을 나는 헤맨다.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얼굴에서

약함의 표지, 비통의 표지를 본다.


모든 사람의 모든 울부짖음에서,

두려움에 찬 모든 아기의 울음에서,

모든 목소리에서, 모든 금지에서

마음으로 벼린 사슬 소리를 나는 듣는다.


굴뚝청소부의 외침이 어떻게

모든 교회에 상장을 드리우고,

불운한 병사의 한숨이 어떻게

궁전의 성벽을 따라 피로 흘러내리는가를.


무엇보다도 한밤중 거리에서 나는 듣는다.

어란 창녀의 저주가 어떻게

갓난아기의 눈물을 메마르게 하고

결혼의 운구차를 역병으로 시들게 하는가를."


(번역을 첨부한다: 유명숙. <역사로서의 영문학>. 창비, 2009. 77-78 에서 인용.)





이하는 하루의 시차를 두고 쓴 글이다.


"헬조선" 관련 기사가 하루간 SNS를 뒤덮으면서 여러 반응이 나왔다. 그중에서 유독 뇌리에 남는 것은 "문명-미개"의 대립항이 함축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에 대햔 경각심이다("오리엔탈리즘"이란 표현도 나왔으나, 사이드의 개념을 좀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식민주의"쪽이 보다 적절하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문명-미개의 대립항은 주로 서구권의 보다 발전된 사회를 이상적인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를 열등한 곳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인종주의처럼 한국 사회에 이미 만연한 식민주의적 의식을 드러내고 또 강화한다.


나는 이러한 의혹이 전적으로 부당하지는 않지만, 사태를 다소간 지나치게 간단하게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해석틀이 주어지지 않은 현재의 문제와 대면할 때, 비평가가 결코 놓지 말아야 할 유일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섬세함이다. 나는 좀 더 섬세해지고 싶다.


1.


문명-미개 프레임은 단순히 인종주의 및 식민주의적 위계를 담는 표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국인들이 간직해온 '발전/진보의 서사'의 핵심이기도 했음을 먼저 지적하자. 전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맞닥트려야 했던 부조리함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면, 진보, 문명화, 선진화의 서사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그것을 종래에는 극복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제공했다.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삶은 두 가지 요소를 전제로 한다: 부조리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가치평가기준과 그것이 언젠가 해결가능한 문제라는 믿음.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삶을 문명화 서사로 이해했을 때 이 서사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제공해주었다. 한국인들은 '문명', '선진국'과 같은 개념을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상태를 설정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문명화 서사는 충분히 노력한다면 그러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문명-미개 프레임을 비판하는 사고 자체가 문명화 서사의 결과물이자 그 일부이기도 하다.


문명화 서사가 최초로 강력한 충격을 받은 때가 97년 IMF 사태라면, 2010년대에 명확해진 장기불황 및 진보-중도파의 정치적 패배(촛불집회 및 2012년 대선)은 문명화 서사의 핵심요소 하나를 무너트리는 데 성공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문명화된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상실했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의 영국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마지막 소설 <막간>_Between the Acts_을 보면, 영원히 연옥에 붙들려 살지도 죽지도 못하리라는 악몽같은 미래를 떠올리는 젊은이들이 나온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정지상태의 무력감에 더해 곳곳에 산재한 부조리들을 볼 수 있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의 정치적 반동기는 사회 전반의 윤리적 기준을 급격히 후퇴시켰고, (주로 청년층들이 속한) 약자에 대한 착취가 급속도로 표면화되었으며 이것을 조정할 정치/행정권력은 역으로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적어도 그렇게 이해되었다.


만약 문명화 서사 자체가 완벽하게 파괴되었다면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적인 지표가 되는 해외사례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환경에서 더 나은 사회 혹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라는 평가기준 혹은 목표지점이 마치 조명탄처럼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서 부조리가 증식하는 사태는 아주 명확하게 보였다. 그러한 부조리가 문명화가 진전되면서 극복될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 시점에 원한과 분노, 체념과 좌절의 감정이 증폭한다. '미개'라는 표현은 한편으로 문명화 과정이라는 끊어져버린 철길의 잔재이며, 다른 한편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부조리에 얽매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원한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그것이 정몽준의 아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미개는 일차적으로 부조리 자체와 함께 부조리를 붙들고 그것을 합리화하지 않으려는 이들--퀴어퍼레이드에, 미국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제사에 나와 북을 치고 부채춤을 추는 이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에 대한 인식이다.


2.


그러나 헬조선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가 '죽창'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미개는 동시에 자조적인 뉘앙스를 포함한다. 헬조선에는 탈출구가 없으며, 유무형의 자본을 축적한 소수의 사람들만 탈출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소수에 속하지 않는다. 온통 미개함으로 뒤덮였을 뿐만 아니라 그 미개함이 도무지 바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 수 있는가? 미개한 세상에 살 수밖에 없으며 세상의 미개함을 바꾸는 주인공이기는커녕 미개함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 역시 미개한 존재일 뿐이지 않은가? 칼도, 총도, 하다못해 테러라도 저지를 수 있는 폭탄도 아닌 그 자체가 미개한 사회에서나 통용될 무기인 죽창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라는 사실은 극도의 절망감을 표현한다. 이때 문명이라는 키워드와 그것이 함축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것이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되어버렸을 때, 미국, 프랑스, 독일, 북유럽과 같은 사회들에 대한 경배와 복종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미개한 세상에, '닫힌' 세상에 남은 미개한 이들 간의 그 자체로 미개한 원시적인 투쟁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 남는다(메갈리안들이 위악적인 뉘앙스를 담아 사용하는 '갓양남'은 사실 이러한 식민주의적 의식이 희미하게라도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이는 바꿔말하면 여성주의는 문명화 서사가, 발전의 희망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 극히 드문 영역임을 보여준다). 죽창은 한편으로 경향신문의 헬조선 특집에서 우려하고 있듯 자기파괴적인 공격성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죽창은 괘씸하고 얄미운 약자들을 찌르고, 약자들을 찌르는 이들을 찌르고...이렇게 이어질 피의 원환이 이것의 이미지에 잠재되어 있다. 미개함이, 죽창이 구조적인 사고를 가로막는다는 비판은 선후관계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오류이다. 죽창이 구조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죽창질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력감과 그로부터 보다 증폭되는 공격성은 식민주의적 의식의 되풀이보다는 오히려 힘 자체의 숭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3.


문명-미개 프레임이 문명화 서사와 엮어져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탱해온 서사의 핵심에 이미 문명-미개 프레임의 출현을 위한 논리적 구조가 전제되어 있음을 마찬가지로 인정해야 한다. 조금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19세기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기원한 이러한 사고는 사실상 우리가 맑스주의 및 파시즘을 제외하고 근대국가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상이다. 우리는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잘해봐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서사 이외의 서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시민윤리의 측면에서 우리에겐 서구 근대가 제시한 가치평가기준 이외의 다른 척도가 없다. 심지어,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근대 비판의 문법조차도 서구 근대의 산물들로부터 끌어왔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이미 그 안에 깊숙히 파묻혀 있는 사고의 한 귀퉁이가 식민주의로 비판받는 것은 사실 내게는 무척이나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문명-미개 프레임이 이미 있었을 뿐더러 그것은 항상 우리들에게 행위와 사고의 토대를 제공해왔다. 식민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헬조선을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태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서사를, 가치평가 기준을 새로이 제시하지 않는 한 이러한 프레임은 지속될 것이다.







"헬조선"에 대한 박권일 씨의 비판적인 코멘트를 읽었다(http://fabella.kr/xe/blog2/59057 및 http://fabella.kr/xe/blog2/59063). 읽은 소감부터 말하자면 만족스럽지 못하다. 상하 합쳐서 A4 6쪽 짜리 글인데, 아무리 '블로그 글'이라고 해도 정보량이 너무 적다. 요점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헬조선이란 표현 자체에 주목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체념의 표현이 등장하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 2) 헬조선 담론에서 주목할 표현은 "미개"로, 이 표현은 방관자로서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를 함축한다. 3) 미개란 개념에 내재한 태도는  (박권일이 생각하기에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인) 연대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에 좋지 않다.


1번의 비판은 그 자체로는 유효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박권일이 특별히 제대로 된 대안적인 분석 혹은 해석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나마 분석 비슷한) 2번은 다소 자의적이라고 생각하고(오히려 나는 "헬조선"과 결합된 "미개"라는 표현의 특징은 그것이 단순히 외부의 대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자기지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3번은 그냥 '연대'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왜 "미개"의 의식으로부터 연대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 하는데, 그러한 설명의 방향도 문제지만 너무 추상적인 논변이라 분석이라 하기가 어렵다. 약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두 편의 글에서 박권일은 어떠한 유의미한 진술을 제공하지 않는다--분석은 결여되어 있고 진단은 자의적이며 결론은 (연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원래 그가 하던 말을 반복할 뿐이다.


나는 이전의 글에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했지만, "헬조선" 및 그 주변에 분류된 어휘군으로부터 곧바로 어떤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지적으로 충분히 엄밀하게 훈련받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소 선정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문화비평 관련 필자들이 성급하게 "정치적 가능성" "윤리성" 등을 찾아내려다가 그게 그거인 억지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인데, 어차피 현실에서 무언가 대안적인 가능성을 무뽑듯 죽죽 뽑아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현실이라면 이미 바뀌었을테고.


애초에 "헬조선"이라는 표현 자체가 답이 없다는 인식, 현실적인 무력감과 분노, 좌절감의 표출이다. 박은하​ 선배는 특히 죽창이라는 단어로부터 진짜로 심각한 사태를 본 거고, 성급하게 억지 대안이니 뭐니 이야기하는 대신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을 진짜로 두렵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그래서 그 특집은 경향 특유의 생기없는 밋밋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진짜로 뒤흔든다). 그 점에서 나는 선배의 글이 차라리 훨씬 더 현실적이며, 기사의 분석이 충분치 않다는 박권일의 글쪽이야말로 나이브하다고 생각한다. 박권일은 좋은 감각을 가진 저널리스트고, 나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대체로 유의미하게 평가한다(분석의 밀도는 아쉽지만, 전문 연구자나 비평가가 아니니까 딱히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방법론까지 들먹이며 기존의 연구를 비판할 거였다면, 지금 나온 것보다는 지적으로 성실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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