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입문을 위한 노트: 방법, 근대, 그리고 하버마스

Comment 2015. 6. 25. 03:39

페이퍼 관련 2차 문헌들을 읽다가 푸코 세미나를 준비하는 이에게 질문을 받았다. 사실 푸코는 워낙 많은 작업들을 남겼고 그 작업의 성격도 계속해서 변했기 떄문에 주저 하나만 콕 찝어서 이걸 읽으면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주 도식적으로 구분하면 지식과 담론의 역사를 다루는 60년대, 권력-장치의 역사를 다루는 70년대, 주체화-실천의 문제를 다루는 80년대로 나눠볼 수 있겠지만 쓰면서도 이 구별이 썩 만족스럽진 않다. 권력의 분석과 주체화의 분석이 별개인가도 논쟁적인 주제고(나는 지금은 양자를 별개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권력 분석을 하다가 좌절한 푸코가 주체의 윤리로 퇴행했다"는 흔해빠진 비판이야말로 주체와 권력구조의 분할을 전제로 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가장 인기 있는 70년대로 한정한다고 해도 예컨대 70년대 중반까지 규율권력을 다루다가 전쟁모델을 거쳐 통치성을 꺼내드는 것처럼 푸코 본인이 자신의 이론적인 모델을 계속해서 뜯어고치고 때때로 과거의 작업을 재활용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연속과 단절, 개량과 재활용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나는 차라리 "계속 공부하면서 자기 관심 범위를 넓혀나가는, 단지 그 속도가 매우 비범해서 무서울 정도인 엄청나게 성실한 연구자"라는 상식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게 푸코 사상의 궤적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관점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일반론적인 진술은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푸코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은, 그리고 단순히 그가 제시한 앎을 축적하는 대신 그의 사고를 배우고자 하는 이가 염두에 두어야 할 지점은 연구대상을 다루는 그의 가장 일반적인 작업태도라고 생각한다. 폴 벤느가 강조했듯 푸코의 가장 독특한 사고방식은 현상에 곧바로 거대한 일반론을 적용하는 대신 그것을 가장 미시적인 수준의 (아리스토텔레스-헤겔의 전통을 따르자면) '질료들'matter로 분할하는 태도다. 그의 작업에서 실천practice, 장치dispositif와 같은 용어들은 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실체로서 특권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담론의 감옥"이나 부유하는 기표들과 같은 레테르를 붙이며 그를 포스트모던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푸코가 실체들 위에서 작업하는 역사가였음을 이해하지 못한 오판의 소산이다. 푸코는 거의 모든 작업에서 먼저 이처럼 가장 '물질적인' 층위를 포착한 뒤 이어 이 질료들이 어떤 '형식'form으로 재/배치되는지를 살핀다. 요컨대 실천과 장치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해명하는 게 푸코의 '손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다.


푸코를 합리성의 거부자 혹은 반 이론주의자로 보는 시각과 달리(물론 벤느도 때때로 그렇게 오해될 수 있을만한 멘트를 남기지만) 그는 일반화된 개념들 자체를 거부한다기보다는 기존의 개념적 해석들이 실제의 실천/장치의 배치/작동양상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 물론 푸코는 비판에 머무는 대신 실제로 질료들의 배치=형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설명을 제시한다. 에피스테메, 규율권력, 전쟁, 통치성과 같은 가장 널리 알려진 푸코의 용어들은 실제로 그가 자신의 작업을 거시적/일반적 수준에서 개념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푸코의 작업이 방법적으로 가장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은 그가 실천/장치로부터 배치로, 배치로부터 거시적인 역사적 진술로 이행할 때 그러한 이행이 얼마나 연역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지, 다시 말해 일종의 선험적인 해석틀이 은밀하게 도입되고 있는 게 아닌지일 것이다(비록 권력의 역사를 기술하는 푸코의 서사가 갖는 엄청난 매력이 이러한 비판을 좀처럼 제기하지 않게 만들지만 말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마찬가지로 질료-형식의 관점에서 현상을 재기술하는 가장 유력한 전통인 헤겔적 변증법과 공통점을 갖는다. 오늘날 푸코를 가장 깊게 이해하고 활용하는 저자라 할 수 있는 주디스 버틀러가 헤겔 연구로 학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나는 버틀러를 거의 읽지 않았지만, <젠더 트러블>이 푸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온전히 소화할 수 없는 텍스트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실천/장치와 배치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푸코적 방법의 핵심이라면, 이를 체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효율적인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그의 텍스트를 최대한 많이 면밀하게 읽는 것이다. 우리는 사유의 요점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사유는 정리를 통해 습득되지는 않는다. 마치 변증법적 방법이 그 전통의 가장 빼어난 텍스트들을 지속적으로 읽고 이해하고 그 사유와 비판적으로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는 것처럼, 푸코의 '연장통'을 손에 익히는 작업은--물론 나는 그것이야말로 사상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믿는데--부단한 연습을 통해 자신의 사고에 사상가의 사고를 각인시키는 데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어느 정도 표준화된 기준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양적 방법론에 비할 때 전통적인 문헌학적 수련을 어렵게 만드는,  그래서 방법을 온전하게 습득한 연구자의 육성을 매우 까다롭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내게 푸코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가장 간단한 길로 처음부터--최소한 70년대의 가장 첫 작업부터--마지막 작업까지 가능한한 많이 읽는 '정통적인' 수련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2.


푸코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일반론은, 그가 거의 항상 "근대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가"의 해명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국가박사학위논문 <광기의 역사>를 포함한 그의 주저들이 항상 근대에 나타난 어떠한 단절을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은 명백하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푸코가 동시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매우 예외적인 사례며, 그 경우조차도 근대분석의 연장선에 있다). 심지어 통치성의 경우에서조차도, 그는 근세적 통치성이 어떻게 근대적 통치성으로 이행하는가를 추적하는 대신--그가 헤겔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 상이한 시대 간의 이행에 대한 태도인데--근대적 통치성의 출현과 그 성격해명에 집중한다. 따라서 80년대부터의 최후기 저작들이 고대의 실천들을 다루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계몽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 푸코는 근대의 실천들에 대해 발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푸코가 고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고대 자체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근대가 상대화된다는 사실, 근대의 독특함이 더욱 잘 비추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푸코의 고대 연구는 기본적으로 근대에 대한 코멘트다. 예컨대 <주체의 해석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거리두기로 시작해 헤겔에 대한 기묘한 찬사로 끝나는 텍스트인 것이다.


푸코를 처음 읽는 독자들, 서구 근대사를 개략적인 수준에서라도 정리해두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이 현실적으로 마주치게 될 가장 큰 난관은 (푸코가 당연히 자신의 독자들이 알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무지에 있다; 이 난관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푸코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실제로 '이론'으로서만 푸코를 읽은 독자들이 종종 클리셰적인 편견에 빠지거나 푸코의 언어를 매우 피상적인 차원에서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러한 상황이 푸코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사실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안전, 영토, 인구>를 근대 정치사상사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없이 읽는다는 게 가능한가? <정신의학의 권력>부터 <앎의 의지>까지를 샤르코와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 없이 따라간다는 게 가능한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근대적 민족개념의 형성을 모르는 사람이 읽을 수 있을까? 특히나 푸코가 때때로 지독할 정도로 암시적으로 말하는 저자라는 걸 감안한다면 나는 이에 회의적이다.


따라서 푸코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우선적으로 권하고 싶은 건 서구 근대사에 대한 개략적인 공부다. 그렇게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었다는 전제 하에서 푸코와 같이 읽을 책을 고른다면, 많은 사람들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꼽고 싶다. 통상적으로 '부르주아 공론장'에 대한 책으로만 여겨지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실제로는 근대 서구에서 공적인 것the public과 사적인 것the private의 개념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텍스트다. 부르주아 핵가정, 커피하우스, 잡지 같은 키워드는 사실은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다. 나는 <구조변동>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앞부분에 '공적인 것'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서사를 제시한다. 왕이나 궁정court과 같은 비교적 협소한 집단이 국가를 표상하고 의사결정과정을 독식하던 '전근대'의 '공적인 것'이 바뀌면서, 사적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부르주아 집단이 의사결정과정=공적인 영역에 참여하게 된다. 부르주아들의 공론장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의사소통이 공적인 권력을 움직이고 제어하도록 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그러한 계몽시대의 황금기는 계급갈등과 같은 근대적 문제 앞에서 무너진다. 2차 대전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 근대사회는 사적인 영역 속에 틀어박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역량을 상실한 개인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국가=정부로 나뉘는 "관리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경로를 밟는다(<구조변동>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서사를 역사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양자는 서로를 더 밝게 비추는 한 쌍의 등불과 같다; <구조변동>을 숙독하면 서구 근대를 다루는 어떤 분석으로든 비교적 손쉽게 옮겨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근대의 서사를 염두에 둘 때 푸코의 작업을 한결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한다면 푸코는 이러한 서사를 끊임없이 참조하고, 비판하고, 수정하고, 재해석한다. 단적인 예를 든다면, <감시와 처벌>의 저 유명한 도입부를 보라. 다미앵의 처형에서 근대적 감옥/기숙사로의 대조는 단순히 '규율권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권력'의 성격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역사적 사례 제시이기도 하다. 최초에 왕과 궁정이 독점하던 공적 권력이 스스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위반자의 신체를 통해 폭력을 전시했다면, 그러한 독점적 집단의 지배가 '합리적인' 시스템의 지배로 바뀌면서 권력 혹은 통치행위는 개인의 신체를 통해 스펙타클을 만드는 대신 주체화를 위한 시공간 자체의 재배치로 바뀐다; 권력은 신체라는 협소한 영역에 폭력을 행사하는 시시한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주체 자체의 재구축으로, 재구축을 위한 장치의 활성화로 이행한다. 그것은 개개인을 규범화하는 기준들을 통해 표출될 때 규율적으로 작동하며, 대규모 사회집단을 하나의 생물군처럼 다룰 때 마치 먹이, 온도, 공간배치, 화학적 처리 등을 통해 번식개체수를 관리하는 사육사처럼 조절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푸코와 하버마스(적어도 <구조변동>의 하버마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버마스가 근대 시민사회의 역사를 다룬다면, 푸코는 시민사회를 통치하는 근대적 권력--종종 그것은 국가/정부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프랑스적 특수성의 소산이리라--의 역사를 다룬다. 푸코가 70년대 후반의 강의에서 시민사회조차도 통치의 특수한 장치라는 취지로 말한 사실을, 그리고 하버마스가 시민사회를 권력의 획득/행사과정을 중심에 두고 설명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와 권력의 역사를 이해하는 작업은 서로의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참조를 요구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이 내가 푸코의 성실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 하버마스를 읽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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