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일기. 여름방학의 꿈.

Comment 2015. 6. 23. 00:39

기말 페이퍼 하나를 냈고 장염도 조금씩 완화추세다(제발 내일부터는 밥을 먹고 싶다...일주일 동안 죽만 먹고 사니까 위가 황폐해지는 느낌). 지난 주말은 여러모로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과제를 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페북 친구와 팔로워 수만 엄청나게 늘어서 감당하기 힘들다. 계정 리셋하는 사람들 기분을 조금 알 것 같다. 읽기 힘든 공부 글만 쓰다보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싶다.


뭘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고 되다만 아이디어 하나만 덜렁 있는 두 번째 페이퍼를 쓰는데 3일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박사 코스웍이 이제 절반 지났는데 슬슬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다. 결국 오늘 제출한 페이퍼도 20여 시간 동안 10여 쪽을 몰아서 쓰고...(물론 1주일 전에 아이디어 노트랑 개요는 짜놓았으니까 가능한 일인데) 퇴고도 안했는데 주술호응 안 맞는 문장 엄청 나오겠지 싶다. 어떻게 나이 먹고 문장에 신경쓸 수록 주술호응이 더 틀리는지. 여튼 빨리 학기 끝나고 내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세미나가 벌써 3개인데다가 알바도 최소 3개인데 거기에 내가 따로 읽을 책까지 합하면 감당할 수 있으려나.


1.


어쩌다가 동사 하나의 표기용례를 찾느라고 OED를 뒤져보는데, 17세기 그러니까 1600년도 초반부터는 슬슬 몇 번씩 읽어도 잘 안 와닿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용례 같은 거. 17세기 후반의 로크나 하다못해 중반의 리바이어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필머의 가부장제 같은 건 스타일이 짜증나서 그렇지 사전끼고 참고 읽으면 그냥 꾸역꾸역은 읽을 수 있다. 근데 거기서 좀 더 앞 시대로 가면 경우에 따라 힘들어지는 문장들이 나온다. 표기법이 꼬이는 경우도 있고(영어에서 표기법 통일이 되는 때가 언제쯤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번 정도 들어본 것 같은데;;) 문장순서가 오늘날의 기준으로 매우 이상한 경우도 있고. 다음 학기에 아마 중세 쪽 수업을 들을 것 같은데, 17세기 초에도 이렇게 걸리적 거리면 중세 텍스트는 어떻게 읽으려나 싶다. 곧 기일이 다가오는 신 선생님께서 학부 때 캔터베리 이야기를 중세 억양으로 어떻게 읽으면 되는지 한번 보여주신 적이 있지만 중세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좋아했으나 중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나는 전혀 기억이 하지 못한다. 단지 선생님께서 읽어주셨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여담으로, 홉스나 벤담을 읽을 때 종종 이공계 전공 학부생들의 글을 첨삭하던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홉스의 스타일을 칭찬하는 글들을 읽으면 솔직히 조금은 복잡한 기분이 된다(벤담의 영어를 칭찬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달까). Tuck가 편집해놓은 텍스트 읽다가--오크숏이나 맥퍼슨이 편집한 판은 구성이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전공자도 아니고 거기까지 읽어볼 이유가 없으니...그럴 시간 있으면 De Cive를 읽지--진석용 선생 국역본을 읽어보면 국역본이 문장을 엄청나게 친절하게 풀어놓은 걸 알 수 있다. 홉스는 문장을 정말 기계적인, 법적인 느낌이 나게--한국 법학의 악문 말고--잘라내듯 쓰기 때문에 주술구조가 뒤집히거나 문장성분이 생략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기억한다). 국역본은 그런 거 없으니까.


 물론 스타일 상에서 가장 곤란했던 저술은 지금도 마지막 권을 못 읽고 있는 로크의 ECHU였는데--이거에 비하면 2nd T는 그냥 읽기 쉬운 글이고 STCE는 아주 잘 읽힌다--어떤 사람들에게는 찬사를 받고 있는 ECHU의 스타일은 내게는 키보드 워리어의 그것에 가까웠다. A라는 걸 이야기하다가 A에 대해 나올 반론을 미리 반박하고 그 반론에 제기될 반론을 (미리) 재반박하고...해서 따로 정리하지 않으면 처음에 뭔 소리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헷갈리게 되는 스타일. 3권까지 읽고 덮었는데 국역본이 나와버려서 뭔가 억울한 마음에 안 사 읽고 있는데, 함께 읽어보신 분이 있다면 번역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다.


이 모든 게 OED를 뒤지면서부터 시작된 짜증의 산물이다. 젠장.



2. 여름방학 독서희망 리스트 짜고 있다.


방학동안 읽으려고 생각하는 것들. 루소 <고백>-<대화>-<몽상>(책을 이미 빌려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어야한다). 리오 댐로쉬의 전기는 어차피 갖고는 있는데 고민 중. 마이네케,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 보고 <국가권력의 이념사> 다시 정리(이것도 빌려놨으니까 볼 거다). Tuck의 자연권 이론 관련 연구서 하나랑 외스트라이히Oestreich의 신스토아주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 하나. 자연권-자연법 문제랑 신스토아주의 문제가 내 공부가 가장 과거로 가는 지점이기를 바란다. 자연권-자연법 문제를 염두에 두고 마이네케랑 신스토아주의를 섞는다면, 자연권-덕-국가이성-자연법이라는 네 가지 상호작용하는 개념의 묶음이 나온다. 이 네 가지 키워드가 지금까지는 아주 어렴풋한 수준이지만 어느 정도 공부를 해두면 근대 사회이론/역사이론 텍스트 읽을 때 문학전공자들이 하기 힘든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7월 20일까지 <인권과 인권들>의 토론문을 써야하는데, 적어도 자연권-자연법 연구서라도 읽어두고 그걸 반영해서 토론문을 쓰는 게 목표. Otto von Gierke를 추천받았는데 아 솔직히 중세법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다.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및 테일러 SoS. 테일러는 장염으로 끙끙거리는 동안 화장실에 처박혀서 1장과 미주만 쭉 훑어봤는데 생각보다 내 박사주제랑 많이 맞아 떨어질 것 같다; 70년대부터 영국 근세 정치사상사 쪽에서 나온 논의가 생각보다 많이 반영되어 있다. 테일러랑 매킨타이어 읽고 월러스틴까지 좀 보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유주의&덕이라는 큰 서사를 어느 정도 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방학 때는 국역이 있는 매킨타이어랑 세미나 하는 테일러만(대신 자유주의 쪽으로는 아블라스터를 그냥 후딱 볼까 한다; 혹시 근대 자유주의 사상사 괜찮은 거 아시는 분? 인간학, 문화, 정치사상, 경제학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좋은 개설서 없나요?).


여기에 또 다른 세미나에서 낸시 암스트롱 책 두 권이랑 _Culture of Sensibility_. CoS는 예전에 앞부분만 좀 봤다가 페이퍼 쓰면서 중간중간 뒤적거려봤는데 생각보다 내 주제랑 이어져 있다.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었다. 1970년대 이후 영국 18세기 정신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준 키워드들을 꼽으라면, 하나는 정치사상사 쪽의 공화주의/덕 수사의 재발굴 및 상업사회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 쪽에서 감성sensibility의 인간학이다. 이번에 쓴 기말 페이퍼가 루만과 감성의 문화를 연결시켜 본 거였는데, 사실 나는 덕virtue과 감성을 연결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유쌤 학부 수업 조교하면서 큰 이야기는 들었는데 확 와닿진 않아서 어차피 내가 공부하면서 내 정리를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스키너 <토대>는 국역본이 있으니까 이번에 꼭 보고, 포콕은 겨울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은 어차피 국역본 갖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좀 보려고 하는데 과연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사실 디킨스랑 엘리엇 좀 더 읽어놔야 하는데 성격상 소설은 세미나나 수업이 아니면 안 읽는지라... 그냥 안 볼 것 같다. 아도르노랑 영어판 강의록들을 따라가면서 <부정변증법>과 <미학 이론>을 다시 보는 게 목표인데 물론 그러려면 헤겔을 먼저 좀 더 읽어야겠지-_-; 사실 아도르노 강의록도 엄청 재밌다. 푸코만큼 다용도가 아니라서 그렇지. 개인적으로 강의록들을 얼마나 보느냐에 따라 <부정변증법> 이해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와 자유> 앞부분을 조금 읽으면서, 이게 <부정변증법 강의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강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정말 정말 나면 테일러 세미나할 때 <도덕철학의 문제들> 강의록을 뒤져볼 것 같은데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푸코는 <푸코 효과>만? 한동안 80년대 강의록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전에는 특별히 더 뒤져볼 것 같지는 않다(<푸코 이후>도 책장에 있지만 독자모임 자료집을 훑어봤을 때 내게 특별히 흥미있는 이야기는 잘 없었다).


물론 바로 위 문단은 세 번째 세미나(?), 즉 유쌤과의 공부가 어떻게 되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물론 알바가 얼마나 많은 노동을 요구하느냐가 더 큰 변수일 것이다). 유쌤은 벌써부터 읽기 시작하셨을텐데 무엇을 같이 읽을지 어떤 이야기를 하게될지 고민. 개인적으로는 18세기 고전을 읽어도 좋고(흄까지는 별 필요는 없지 않냐고 하시면서도 읽어봐라 하실 것 같은데, 저번에 샤프츠베리를 주문했다가 그거 굳이 읽을 필요 없다고 탁 치셔서... 막상 안 읽어본 나는 궁금하고;;) 연구서, 특히 Istvan Hont를 봐도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물론 CHPT 같이 무지막지한 선집들도 좋긴 한데(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두 권만 해도 두께가...) 그건 필요한 것만 골라 빼먹어야 할 듯 하고. 저번에 혼트 논문 하나 보내드렸더니 맘에 드셨는지 새로 책 주문하는 것에도 OK하시긴 했는데...개인적으로는 WV랑 JoT, 그리고 새로 나온 루소 연구서만 쭉 읽어도 방학 알차게 보내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럼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 준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 유쌤과 '같이 공부'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 감이 잘 없다.



물론 위의 모든 것들은 세미나를 빼고는 매우 축소된 규모로 실행될 거다. 내가 나를 잘 알아서, 항상 계획은 거창하지만 실천은 소박하게 뭐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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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12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06.25 15:05 Modify/Delete Reply

    폭풍일기간지

  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06.25 19:33 Modify/Delete Reply

    나중에 이런 게 모여서 좋은 자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 <이우창 선집> ㅋㅋ

    • BeGray 2015.06.25 21:23 신고 Modify/Delete

      학자로서 대성한다는 것은 선집이 아니라 전집이 나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sifr 2015.06.25 22:52 Modify/Delete

      예전에 말씀하셨듯이 살아 있는 사람은 전집이 나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ㅋㅋㅋ

    • BeGray 2015.06.25 23:42 신고 Modify/Delete

      기말페이퍼 마감 기한 12시간, 써야 할 쪽수 12시간이니 곧 저도 전집을 낼 수 있는 최소 요건 중 하나를 충족시킬 수 있을 듯 합니다 ㅋㅋㅋ

  3. 2015.06.28 11:31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15.06.28 12:32 신고 Modify/Delete

      네, 연락 받았습니다^^. 종종 오겠다고 하네요 ㅎㅎ

      저는 4학기까지 수업을 듣고(대신 3학기-4학기에 이런 저런 세미나들을 했지요) 5-6학기에 학위논문을 썼어요(그때도 세미나를 하긴 했네요ㅋ). 방법론 구상 떄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는데, 논문 자체 못지 않게 그 동안 다른 부담 없이 읽고 싶은 다른 책들을 몰아서 볼 수 있었던 게 제일 좋았습니다. 대략의 서사가 완성되었다면 한번 써보고 엄격하게 코멘트해주실 분께 읽히는 것도 최종적인 완성도를 제고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그런 과정을 거쳐 고쳐쓰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더 좋은 글이, 스스로와 다른 독자들에게 당당할 수 있는 글이 나오는 법이기도 하니까요 :)

      간략하게 적어주신 내용을 보면, "인물"에 초점을 두시는 것인지 "인물유형"에 초점을 두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변형-적용 양태를 분석하고 기술하는 적업 못지않게 그 인과관계를 무엇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논문의 학적 무게가 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흠, 혹시라도 예의 상 하는 멘트가 아닐까봐 덧붙인다면, 세미나 진도를 따라온다는 전제 하에서, 언제든지 참여가능합니다. 굳이 참여/이탈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 게 제가 세미나를 운영할 때 일반적으로 견지하는 원칙이기도 해서요 ㅎㅎ 어쨌든 부담없이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 2015.06.28 14:23 Modify/Delete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15.06.30 13:37 신고 Modify/Delete

      <정치적 무의식>의 서론은 워낙 악명높은 글이고, 보통 그 책에서 서론과 결론만 묶어서 읽는 식을 많이 취하는데 저는 본론 쪽 챕터들이 좀 더 재밌었습니다. 솔직히 서론은, 지금도 중요한 몇 가지 테제들이 있긴 하지만, 그때에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옛 시절을 느끼게 하는 내용들이 많아서 꼭 읽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회고적으 생각해보면 제임슨 보다는 제임슨 본인도 강한 영향을 받았던 아도르노의 텍스트를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물론 쉬운 글들은 아니지만, 제임슨의 지랄맞은 영어나 아도르노의 밀도가 너무나 높은 문장이나 뭐...). <미학강의1> 같은 책은 아도르노의 미학에 대한 입문용으로 좋은 책이니 한번쯤 숙독하셔도 좋겠어요.

    • 2015.07.07 21:06 Modify/Delete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15.07.11 05:25 신고 Modify/Delete

      답이 늦었군요. 저는 다울링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80년대 책이라 지금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제임슨을 알튀세르와 연결시켜 읽는 게 그다지 중요한 요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특히 '방법'의 측면에서 제임슨을 따라가려는 저자라면요(아도르노 독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제임슨의 텍스트 독해는 기본적으로 아도르노적 모델에 기초하기 떄문입니다). <정치적 무의식>에서 제임슨은 맑스주의 문예비평의 이론적 초석을 다지기 위해 루카치적 모델과 알튀세르적 모델을 검토하면서 문학/문화와 물질적 생산양식의 관계설정을 시도하는데, 저는 그게 오늘날에도 충분히 생산적인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야 생산양식이라는 최종심급을 유지하면서도 문화, 정치 등과 같은 제반 영역들의 부분적인 자율성을 짚는 게 중요한 이슈였겠지만... 그래서 알튀세르와 제임슨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저술들을 보면 진짜 중요한 걸 건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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