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학문을 위한 플랫폼" 또는 학문 장치의 비판.

Comment 2015. 6. 9. 22:52

원문 링크: http://heterosis.net/index.php/archives/1753


이하 주요 인용.


"엔드노트도, 멘델레이도, 펍메드도, 구글스칼라도 모조리 서구의 플랫폼이다.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과 트위터, 그리고 아마존과 이베이와 알리바바, 플랫폼을 가져간 자가 시장을 독식한다. 학문 시장이라고 다를 바 없다. 영어라는 플랫폼을 빼앗긴 상황에서 어차피 학문적으로 세계와 경쟁하는 것은 불리함을 안고 싸우는 것인데, 거기다 학술정보들이 글로벌화되고 온라인으로 병합되는 과정에서마저 우리는 완전히 뒤쳐지고 있다. dbpia, riss.kr, kiss.kstudy,  papersearch, 한국의 논문들은 이름도 외우기 어렵고 산재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는데다 대부분 유료["무료"의 오기인듯 보인다--인용자]도 아니다. 서울대학교의 학위논문은 윈도우 시스템이 아니면 볼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만 교수가 글로벌 지식장 안에서 대결하라는 말은 본말이 전도된, 아니 선후가 바뀐 강단학자의 분석일 뿐이다. 지금 우리 학문의 내용이 없어서 우리가 밀리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과학이 서구중심인 것이 단지 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런게 아니다. 우리에겐 플랫폼과 시스템이 없다. 시스템은 대학을 바꿔야 하는 일이니 힘들겠으나, 플랫폼은 대학을 상정하지 않고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래의 웹사이트와 서비스들은 단지 과학분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서구학술정보들이 점점 오픈소스의 형태로 나가고 있으며, 다양한 스타트업들이 학술정보시장으로 들어와 플랫폼을 구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톰슨 로이터는 SCI라는 사기에 가까운 지표로 학자의 학술적 권위를 계량화해 전세계의 과학을 망쳐놓았다. 이제 다양한 학자들과 회사들이 학술정보가 공공의 권익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사익에 봉사하고 상아탑에 갇힐 것인가를 두고 벌어질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지가 과학을 잠식해나갈때, 서구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과학의 공공도서관 PLoS를 만들어 오픈액세스 저널의 시대를 열었다. 서구의 과학자들은 단지 상아탑에 머무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몸이 너무 멀리 있다."



이하 나의 코멘트.


(김경만 선생의 논지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는 잠시 괄호에 넣자) 플랫폼 혹은 푸코적으로 말하자면 '장치'에 대한 김우재 선생의 코멘트는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는 비록 스스로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접한 장치에 의해 우리의 잠재적인 능력을 발현하고 또 제약당한다. 플랫폼에 대한 사유는, 그리고 어떻게 더 효과적이고 '공공적인'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런 점에서 단순히 기술적인 질문을 넘어 비판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인문쪽 전공자로서 말하자면, 이 글은 바로 푸코와 아감벤(<장치란 무엇인가>)이 계속해서 제기해 온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단언하건대 여기서 김우재는 그 어떤 푸코 전공자보다도 푸코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플랫폼 혹은 장치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결코 높은 기술적 숙달을 이룩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장치에 의해 어떻게 제약당하고 있는지, 장치의 개선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목표에 얼마나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는지--혹은 목표 자체도 수정될 수 있는지!--, 장치가 어떠한 형태로 개선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사고에서부터 출발한다. 연구자는 단지 학계와 학교에 의해 길들여져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장치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에도 자율성을 상실하고 '소외된 노동자'로 전락한다. 오늘날 연구와 학문의 소외에 대한 비판은 늘 곁에 있는 것, 날마다 사용하는 것, 별 불만없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에 대한 비판을 포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손에 붙어있는 도구가 사실은 우리를 속박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장치 및 그 장치를 통한 연구의 실천이 어떤 형태로, 어떤 목적을 위해 가능할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Trackbacks 0 : Comments 8
  1. 개선비 2015.06.10 18:37 신고 Modify/Delete Reply

    잘 읽었습니다^^

    형님 아니었으면 전 꽤나 오랫동안 푸코를 오해했을듯 합니다.

    • BeGray 2015.06.10 22:16 신고 Modify/Delete

      9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으로 푸코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있는데 아직도 쌍팔년도(?)식 프레임에 묶여 있는 사람을 볼 때면 당혹스럽습니다ㅎㅎㅎ

    • 개선비 2015.06.11 00:10 신고 Modify/Delete

      딱 그 시기 전공자한테 배웠었거든요ㅋㅋㅋ
      본인 입으로도 90년대 푸코 르네상스 아니었으면 교수 못 얻었을 거라고

    • BeGray 2015.06.11 02:22 신고 Modify/Delete

      그래놓고 푸코 관련 업데이트를 안 했단 말예요?;; 학자로서 양심이 없네요 ㅋ 전공자도 전공자 나름인 세상이긴 합니다만...

    • 개선비 2015.06.11 16:59 신고 Modify/Delete

      배우긴 했는데 10년도 일인지라...ㅋㅋㅋㅋ
      흑역사의 기간이기도 했고, 지금 논의하는 거랑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거였어요. 미디어론이나 섹슈얼리티 쪽으로... 게다가 당시에 별 관심을 못가졌었어요.

    • BeGray 2015.06.11 18:28 신고 Modify/Delete

      아, 여기서 양심이 없다는 건 그 교수자 얘기입니다 ㅋ

  2. 김우재 2015.06.13 04:31 Modify/Delete Reply

    반갑습니다. 트랙백이라도 걸어주셨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 BeGray 2015.06.14 00:02 신고 Modify/Delete

      아, 이런 구석진 곳까지 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 제가 트랙백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고, 또 선생님의 글에 무언가 비판적인 날을 세운 게 아니라서 귀찮게 해드릴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질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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