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학 개혁담론의 클리셰: 한 대담에 대한 논평

Comment 2015. 4. 17. 15:54

한국연구재단, 그러니까 사실상 한국 학계의 돈줄을 그러쥐고 있는 기관의 이사장의 인터뷰가 나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0766). 나는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제 전반을 코멘트할 역량은 없으나, 적어도 인문사회분야에 대한 이사장의 견해는 나름대로의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나는 대체로 자신이 인문학을 웬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비 인문학 전공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관적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인문학에 대해 내놓는 견해들은 대부분 조잡한 클리셰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나마 무언가 대화를 통해 합의할 수 있는 방향이 있지만, 스스로의 한계조차도 알지 못한다면 시쳇말로 '답이 없다.' 얼마 전 모 경제학 교수의 칼럼이 그런 실패사례를 보여준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산업공학을 해서 조금 인문사회에 가깝다"고 말씀하시는 정민근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또 하나의 사례로 추가해야 할 성 싶다. 주변에서는 이사장님이라고 추켜세워주겠지만, 지금의 발언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추태와 별반 다르지 않아보인다.



먼저 인문사회학에 대한 정민근 이사장의 견해가 담긴 대목을 살펴보자.


"“다행히 산업공학을 해서 조금 인문사회에 가까운 편이다. 산업공학은 경영학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고 특히 인간공학이 전공이라서 심리학자와의 공동연구도 많이 해봤다. [...] 이번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있는데, 작년에 부임하면서부터 주장한 게 ‘창조경제의 핵심은 인문학이다’ 라는 것이다. 물건 팔고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인문학과 관련된다. 제품의 기능개발에는 과학기술이 활용되지만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물건을 갖고 싶도록 하는 과정에서도 사람과 관련되므로,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이 중요하다. 어느 나라에 상품을 팔려면 그 나라의 정치, 사회와 문화를 알아야 하지 않나. 인문학이 과학기술과 융합해서 창조경제에 도움이 되는 형태, 즉 융합연구를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순수 학문’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인원을 유지하고, 나머지 인문학을 하신 분들이 인문학을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어를 전공했다고 하면, 약 30%는 러시아어(문학)를 연구하고, 70%는 러시아에 한국 상품을 팔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부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  대학이 구조조정하면서 제일 먼저 인문학을 통폐합하니까 죽게 생겼다고 말하는데, 국가 전체적인 측면에서 인문학의 중흥과 지속을 위해 유지해야 하는 범위를 정해놓고 지원해야 한다. 그 이외에는 인문학을 이공계 학생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서비스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취업도 인문학을 중흥시켜줄 것이라고 본다."


"문학, 사학, 철학의 학문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학문탐구를 위한 연구자와 실용적인 인문학으로 키워나갈 연구자를 2분화해 역할분담이 돼야 한다. 기업에서는 인문학 전공자들이 필요하다. 물건 팔려고 하는데 대학에서 배출된 인원은 써먹을 만한 내용을 배우지 못했다."


"외국과 비교했을 때 국내에서 인문학 하는 분들이 상당히 상아탑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성 있는 연구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아는 분은 미국에서 巫俗신앙 전공으로 박사를 했다. 나는 이것도 ‘돈이 될 수 있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무속학이란 것을 꼭 학문적 접근만 강조하지 말자는 것이다. 무속학이 생긴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무속에 관심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까 그 원리에는 경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방향을 틀면 그 부분에서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 [...] 인문학자도 너무 연구실에 갇혀 있지 말고 내 연구가 사회에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적용시켜주면 본인도 제자도 살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의 가치를 모르는 발언 운운하는 틀에 박힌 반론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애초에 인문학의 가치란 말을 물신적으로 사용하는 순간 이 반론은 논증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되어버린다. 가장 상식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은 정 이사장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인문학/대학교육을 기업에 종속시키는 데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파고들어가서, 정 이사장의 입장과 같은 형태의 주장이 진정으로 문제적인, 그러니까 해로운 까닭은 그러한 담론에 내재한 사회의 이해 자체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싶다.


위의 긴 인용문은 몇 개의 명제로 줄일 수 있다. 1) 인문사회학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2)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은 "경제적 기여," 다시 말해 기업의 이윤획득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3) 따라서 다수의 인문사회학 연구자는 기업의 이윤획득에 보탬이 되는 연구를 해야한다. 4) 다만 인문사회학이 순수학문이라고들 하니까 어느 정도 문화유적처럼 보존할 수 있게 소수는 학문 자체의 재생산에 복무할 수 있게 해주겠다. 이 4개의 명제는 '인문학 개혁담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겹도록 들어보았을 클리셰 덩어리다. 덧붙이자면 인문사회학은 순수학문으로 소수의 엘리트를 뽑아서 연구를 시켜야한다는, 학문 생태계의 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주장도 이런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네 가지 명제 및 그 결합물을 비판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2번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즉 정 이사장의 입장에 내재한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사회'를 경제적인 영역과, 사실상 기업의 이윤획득과정과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이런 논리에서 학문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기업자본의 더 많은 이윤창출에 복무하라는 명령으로 번역된다. 더불어 정부의 법적/행정적 지배도, 기업의 자본에 의한 지배와도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영역 및 시민정치의 영역은 이와 같은 논리에서 애초에 자리를 빼앗겨버린다. 한국사회에 남는 것은 국가와 자본(혹은 국가-자본) 뿐이니, 자연스럽게도 (그 자체가 본래 도구인) 학문은 국가-자본의 원활한 운용을 위한 도구가 된다. 조금 더 명확하게 서술한다면, 자본의 융성을 위해 국가기관이 학문/연구라는 도구를 휘두르는 문자 그대로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관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오로지 국가와 자본만을 유의미한 영역으로 인정하는 정 이사장의 사회관은 가장 우파적인 논리를 띤다. 예를 들어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사회관에서 밀양에서의 투쟁이나 세월호 집회와 같은 행위는 시민주체의 능동적인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국가-자본의 효율적인 행위를 가로막는 '처분해야 할' 돌뿌리와 같이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는 이러한 사회관을 가진 사람이 사악하거나 약자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관 내에서 애초에 국가-자본 이외의 주체를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유의미한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유의미한 내용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나아가 그들을 위한 학문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는 (ad-hoc과 같은 형태의 임시변통이 아니라면) 학문의 자유나 (시민사회를 전제로 하는) 공공성과 같은 담론이 제대로 도래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자유와 같은 담론은 학문이 어떠한 주체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논쟁적인 상황이 될 때 등장한다. 학문 자체는 그 속성상 도구적인 행위라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 (맑스 이후 본격화되는) 시민사회와 자본의 갈등과 같이 학문의 귀속을 두고 경쟁적인 주체 간의 담론적 대립구도가 형성될 때 학문은 일시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국가와 시장영역이 긴밀하게 결합하고 양자에 대항할 수 있는 인민/시민사회적 영역이 사실상 부재했던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학자들이 어떤 운명에 처했는가를, 그리고 중국의 인문사회학이 어떤 문제를 겪었는가를 상기해보라.


문제는 그러한 사태가 조금 다른 형태로, 즉 자본 및 자본이 고삐를 물린 국가에 학문이 종속된 오늘날의 한국에서 선명히 가시화 중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신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의 말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학문관이 선명하다. 여기에서는 학문의 자유라는 근대의 오래된 이념은 물론이고 기업도, 국가도 아닌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한 학문과 같은 요청조차도 들어설 수 없다. 기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보여준 무기력의 핵심은 이윤획득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삶에 무관심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음에도 말이다. 정 이사장의 믿음대로 학문이 나아갈 때, 인문사회학은--그가 인문사회학에서 무언가 효용이 있다고 미신적으로 간주하는 유일한 영역인--취미교양의 레벨에서가 아니면 사회와의 간극을 좁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 이사장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어느새 한국사회의 연구행정가들 머릿속에 깊게 침투한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무반성적으로 흡수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의 학문관이 실제로 학문의 역사적 형성과도 그다지 맞지 않을 뿐더러, 사회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학문과 같은 비교적 제한적인 활용조차도 제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마 그가 대학에서 학문을 배우고 그 기초적인 전제를 암묵적으로 형성했을 시점을 고려해본다면 사실 그의 사회이해가 매우 조잡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같은 신자유주의 관료라고 할지라도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상당한 교양교육을 받은 이들에 비해 한국의 지식엘리트들이 매우 조잡하고 거친 형태의 사회이해를 보여주는 현황은 이 자체가 한국 교육의 역사적 조건에 기인한다--한 마디로 말해 한국의 대학들은 관료 및 엘리트들에게 충분한 시민/교양교육을 제공한 적이 없으며, 유감스럽지만 오늘도 그렇다. 아마도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정 이사장처럼 교양이 부족한 이들이 스스로의 미진한 점을 인식하고 후대에 이를 개선하는 대신 자신과 같은 이들을 반복해서 산출하려는 데 열의를 다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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