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일기. 길 잃음과 스피노자에 관하여.

Comment 2015. 3. 21. 23:54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스스로를 다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을, 왜 하려고 하는가를 처음부터 조금씩 다시 떠올려 보고 있다. 생각해보니, 중심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을 거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결국 시작과 끝을 다시 사고해야 한다. 그 두 가지만 제대로 붙잡고 있다면 백척간두 위에서라도 평온할 수 있을 터이다.


모든 길이 막힌 것만 같은 순간, 무언가에 목이 졸리고 있는 듯한 순간에 종종 스피노자가 떠오른다. 작년 <에티카>를 읽던 날 커튼 바깥의 여름 볕은 은은하게 비쳐왔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문제와 함께 '역량'을 강조하는 보기 드문 근대철학자다. (곁에 책이 없으니) 벌써 흐릿해진 기억에 의존한다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 이외의 사물들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능동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상태를 '선'이라고 불렀고, 반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악'이라고 부른다. 우울과 슬픔, 분노와 같은 정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에 갇히는 것이 역량을 상실하는 길이라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타당하고 명료한 앎에 다가서면서 더 많은 역량을 갖추게 된다.


 인간의 감정에 냉담한 현학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스피노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들에서 폭풍 속에서도 스스로의 주인으로 남아있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그는 20대 초반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축출당했고, 30대 후반에 자신과 견해를 같이하는 친구가 바로 그 때문에 감옥에 갇혀 죽는 것을, 40세에 자신을 지지해준 정치가가 흥분한 군중들에게 문자 그대로 찢겨 죽는 것을 보았다. 그때까지의 철학서 중 가장 급진적인 책 중 하나인 <신학-정치론>에는 편견과 정념에 휘몰리는 수많은 이들 속에서 드물게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남아있고자 하는 의지와 그에 수반하는 고독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단순히 합리적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로서가 아니라 모든 편견과 정념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를 사고한다. 서늘하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자유에의 의지는 책의 첫 부분부터 마지막까지 기하학적 연역의 형식을 통해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논리로 현현한다. 그것은 조용히 타오르지만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에겐 무섭도록 크게 울리는 불길의 소리와 같다.


불안과 불투명성이 저녁의 어스름처럼 우리들의 세계를 그 발밑에서부터 휘감고 있음을 보다 이윽고 나 자신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좇아오던 빛나는 별이 손에 닿지 않는 지점에 있는 환영에 불과한 듯 느껴지고 이내 그 환영의 깜부기불조차도 흐릿하고 두터운 안개 속에서 오간 데 없는 듯, 아니 처음부터 나만의 착각이었던 듯 사라져버린다. 어디로 가든 출구가 애초에 없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나는 실제로는 가장 자유롭다고 믿어 온 순간에조차도 부자유한 존재였다. 아직 평온과 안식이 있는 길, 그저 저 멀리 있는 세계를 조금 잊어버리면 될 뿐인 삶으로 나아가는 수가 남아있다고 어디선가 자애로운 목소리는 말한다. 그때 나는 철학자의 삶과 글을 떠올린다. 어떠한 퇴로도 없이 모든 방향으로부터 포위된 채 살았던 사람을 말이다. 모든 어려움이 담긴 저울 반대편에 있는 것은 오로지 신념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옳다고 믿는 바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있고, 그 정신이 자신을 붙잡고 옭아매려는 세상 그 자체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고자 하는 무섭도록 선명한 의지가 있다. 죽는 순간까지 자유롭고자 했고 또 자유로웠던 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내가 그의 사유와 생애를 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나보다 더 힘든 길을 더 강인하게 걸어갔던 누군가의 존재는 스스로가 가장 무력하고 약하게 느껴질 때, 길을 잃었을 때 바로 곁에서 빛나는 불빛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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