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국역된 텍스트들 [140110]

Reading 2014. 3. 18. 12:48

*2014년 1월 10일


며칠간 국역된 발자크 소설들을 읽었다.

<나귀 가죽>과 <루이 랑베르>(문학동네 판)는 어떤 면에서 <잃어버린 환상>의 뤼시앵 드 뤼방프레 이야기의 형제들처럼 읽힌다(실제로 <잃어버린 환상>에서 작중인물들이 루이 랑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있으며, <나귀가죽>과 <루이 랑베르>의 주인공은 공통적으로 '의지'의 문제를 탐구한다). 요컨대 문학적인, 혹은 사색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 재능을 발휘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도록 해줄 수 없는 물질적인 뒷받침이 부재한 인물이 파리의 사교계와 같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한 기본적인 구도 하에서 <나귀가죽>은 위험부담이 따르는 초현실적인 해결수단--목숨과 능력의 교환이라는 오래된 테마--을 기꺼이 붙잡는 주인공을 내세운 우화로, <루이 랑베르>는 그 어느 인물보다 자신의 (결과적으로 자폐적이기까지 한) 철학적 탐구에 몰입하는 주인공을 중점에 놓은 사변소설로, <잃어버린 환상>은 상대적으로 유혹에 약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 인물이 마주하는 사회의 속성을 부각시키는 사회소설로 나타난다. 발자크는 한국에 소개된 대표작 <고리오 영감>에서 볼 수 있듯 재능있는 젊은이의 출세라는 모티프를 매우 잘 다룰 수 있었고, 위의 세 작품은 그에 입각하여 인물의 성격을 조금씩 변모시켰을 때 나타나는 결과물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루이 랑베르>는 이중에서 가장 '표준값'과 멀리 떨어져있다. 실제로 주인공 루이 랑베르는 직접적으로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화자의 입을 빌어 랑베르의 사색이 단문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역자는 발자크와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독일어로 1819년에 출간되었다--의 친연성을 언급하는데, 내가 쇼펜하우어를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반의 자연철학/인간학에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발자크의 공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부족한 수준에서나마) 나름의 견해를 제시한 것인지, 자신의 철학적인 입장이 텍스트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누차 퀴비에와 같은 자연(철)학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며, 직접적으로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이 등장하여 실험을 진행하는 <나귀가죽>이나 제지 문제에 관한 기술을 굉장히 디테일한 레벨에서 소개하는 <잃어버린 환상>에서 알 수 있듯 발자크가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의 차원에서 학적인 영역을 다룬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물론 디킨스의 전작을 읽지 않고 이런 진술을 하는 건 위험하지만, 적어도 제철업계나 공장, 발명가들이 나오는 <블리크 하우스>, <어려운 시절>, <리틀 도릿>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세계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어서 발자크가 쏟은 지적관심의 양과 질은 비슷한 시대 어느 작가에도 밀리지 않는다. 로렌스 스턴, 리차드슨, 포우 같은 영국작가들의 인용이 꾸준히 나온다는 점도 흥미롭다.

실제로 리차드슨의 <클라리사>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오는 <골짜기의 백합>(을유문화사 판)은 국내에 번역된 발자크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서간체로 씌어졌다. 물론 95%정도는 실질적인 화자인 펠릭스 드 방드네스의 긴 편지 한 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탈리의 (굉장히 흥미로운!) 답신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연인과의 교감을 통한 스스로의 성숙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펠릭스의 편지는 일종의 내적 기록과 같은 형식을 띤다; 바로 이 내면의 불안정성이라는 점에서 (역자 정예영 선생도 언급하듯)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연결지점이 생긴다. 실제로 매우 낭만적인 줄거리를 끌어오는 펠릭스의 편지는 지극히 냉철한 나탈리의 시각이라는 철의 장벽을 만나며(거의 잘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벽에 정면충돌하는 느낌이다!) 소설은 펠릭스의 내면을 완전한 형태로 마무리짓지 않는다. 즉 1인칭 시점 '교양소설'의 형식을 띤 이야기에 쉽게 도입되기 어려운 이질적인 요소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낭만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 측을 맞대응시키는 발자크의 기본적인 관점은 관철된다. 기타 흥미로운 요소로 모르소프 백작부인과 레이디 더들리의 대립구도에서 종종 프랑스와 영국이 비교되는데, 발자크의 시선에서 영국이 이미 매우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달한 장소로 묘사되며 영국인들의 '분석적인' 사고방식이 언급된다는 점은 기억해둘만 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기묘한 비교점을 하나 더 언급한다면, 통상 우리는 '인구'라는 문제가 제기된 시기를 1790년대 토마스 맬서스의 텍스트와 연결짓지만,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의 강의를 따른다면 1770년대 프랑스의 텍스트에서 최초로 인구가 중요한 요소로 언급된다)

<외제니 그랑데>(지만지 판)는 조금 당황스럽다. 어차피 발자크의 소설이라면 일반적인 독자가 흥미위주로 구입한 건 아닐텐데(물론 그렇게 읽혀도 될만큼 재밌는 소설들이지만) 도대체 왜 텍스트의 50%를 잘라내어 번역한 건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잘라낸 결과물이 꽤 넉넉한 여백이 있는 판형으로 소설본문만 150쪽 짜리 얇은 책에 불과하다--12,000원이라는 가격도 말해둔다; 여백 좀 줄이면 300쪽도 안 되는 분량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을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현재 한국의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가능한 <외제니 그랑데>는 이 축약본 뿐이다. 소설 자체는 매우 재밌고 또 흥미로워서 ('인도에서 사람장사 하면서 재산을 축적하는 유럽인'이 등장한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구판본을 뒤져서 읽어볼 생각이다.

단편집 <사라진느>는 <사라진느> <미지의 걸작> <추방된 사람들> 세 편을 담고 있다. 이중 앞의 둘은 바르트의 _S/Z_(국역본이 있긴 한데 역자를 보니 그냥 영어판을 읽는 게 나을 것 같다)를 제외하고도 곳곳에서 언급되는 작품이다. 낭만과 현실의 충돌이라는 모티프가 무언가 절대적인 지점을 탐구하는 예술가 소설(<사라진느>는 조각가, <미지의 걸작>은 화가들이 나온다)과 결합할 때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미지의 걸작>에서 나오는 예술론도 한번쯤 재미삼아 읽어볼만 하고. <추방된 사람들>은 무려 단테 알리기에리가 등장한다. 굉장히 사색적인 면모가 강한 단편으로, 특히 종교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꽤 멀긴 하지만) <루이 랑베르>랑 연결시켜보는 게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도서관에서 국역된 발자크 몇 권 정도(<절대의 탐구> <외제니 그랑데> <사촌 베트> <인생의 첫 출발> <환멸> <랑제 공작부인>...1990년대 이후 판본은 그냥저냥 읽겠는데 그 이전 판본들은 모르겠다!)를 하루 날잡아 죽 읽고 싶다. 불문학계에서 <인간극> 전체를 번역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데, 내가 기다림에 지쳐 영어판으로 발자크를 읽는 때가 오기 전에 그 날이 오면 좀 더 편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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