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 <파놉티콘> /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Reading 2015. 2. 24. 17:49

제러미 벤담. <파놉티콘>. 신건수 역. 책세상, 2007. Trans. of _Panoptique: Mémoire sur un nouveau principe pour construire des maisons d'inspection et nommément des maisons de force_ by Jeremy Bentham&Etienne Dumont, 1791. [통칭 <판옵티콘>. 본래 벤담이 영어로 쓴 내용을 불어로 편역해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으로 보냈고, 국역본은 이 불어본을 옮긴 것이다]


E. J.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박인수 역. 책세상, 2003. Trans. of _Qu'est-ce que le Tiers-État?_ by Emmanuel Joseph Sieyès, 1789.



보통 벤담과 시에예스가 함께 언급되는 일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해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으며(벤담 1748-1832, 시에예스 1748-1836)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던 시에예스 못지 않게 영국 내 급진파radical의 계보에 속한 벤담--19세기 초의 서유럽의 맥락에서 보면 공리주의자들은 개혁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또한 계몽의 아이들임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로 둘은 자유(경쟁)시장에 대한 선호(시에예스 21)를 포함한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전제를 공유하는데, 여기서 이 주제를 다룰 것은 아니다. 나는 시에예스의 주장에 내재한 논리를 가볍게 요약하고 벤담의 <판옵티콘>의 몇 가지 모티프를 건드리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한국의 '지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두 텍스트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트리고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에예스의 핵심은 제3신분들, 곧 실질적으로 부(wealth)를 생산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로서 "국민"(nation)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즉 노동(력)으로 상호환원될 수 있는 실질적인 생산물/부가 있고, 이 생산 및 생산과정을 공유하는, 그렇기에 공통의 이해관계로 결속된 단일한 국민이 있다. 이런 점에서 시에예스의 사유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이 시대 사유의 주요한 개념틀로 규정한 '노동'에 충실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덧붙여져야 하는데, 입법 기관 혹은 정치적 권력의 대표성 문제가 그것이다. 생산물/노동(가치)이 뭉쳐진 '덩어리'인 국민은 그 자체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대신 스스로를 통치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시에예스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특권층의 존재를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몸에서 제거해야 할 "고름"(141)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기해야 할 비유다--일종의 자기조정기관으로서 정치/입법권력을 정립시켜야 한다(그 수사와 개념 모두에서 시에예스의 정부는 푸코가 "생명권력"bio-power이라 부르는 것에 붙어 있다). 다시 말해 이 텍스트의 기저에서부터 노동, 이해관계, 생산과정에 기초한 국민 개념이 솟아오른다면, 그 국민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번영시키기 위한 기구로서 '법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또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에 후반부가 할애된다. 시에예스를 법학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국역본의 다소 짧은 역자해설에서도 수행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더하지 않겠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국민이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19) 하나의 국민이 있고, 이 국민의 행위양식은 생존과 번영이라는 동물-유기체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국민들 개개인의 활동들이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수공업", "생산자와 소비자들에게 유용한 중간 상인 집단", "사회 혹은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 일련의 배려나 특별한 활동"으로 분류되는 것은 당연하다; 쉽게 말해 시에예스는 노동가치론자의 시점에서, 노동을 통해 가치가 생성되고 그 가치가 사회의 부를 구성한다는 시점에서 사회의 기본 토대를 구성한다. 일단 이 테제를 받아들이게 되면, 사회의 실질적인 가치생산자들인 제3신분과 그렇지 않은 기생적인 특권 신분들 사이에 메울 길 없는 간극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특권층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러한 테제--노동(가치), 부, 생산을 사회의 유일한 토대로 삼는 유물론적 사유에서 솟아나오며 그런 점에서 시에예스의 텍스트는 유물론적인 경제를 사회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이 이끌려나가게 될 정치적 여정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왜 유일한 생산자들인 제3신분이 기생적인 특권계층들에게 종속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그것이 후자가 정치와 법에 의해 결정되는 통치영역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예스는 이어 정치체로서 국민을 정의한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동일한 입법부에 의해 대표되며, 공통의 법률 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이다."(23) 2장에서 시에예스는 프랑스인들의 서로 다른 '민족적 기원'을 언급한 뒤(이 이야기의 맥락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참고), 과거의 기원과 무관한 동일한 국민을 규정하는 새로운 기준--프랑스 공화주의가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있음을 참고하자--으로 제3신분을 제시하고, 다시 "공통의 질서에 속하는 시민 전체를 제3신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28)고 덧붙인다. 앞서 지적했듯 새로운 국민은 한편으로 그 기저에서는 동일한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면, "공통법과 공통의 대표야말로 하나의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28-29)는 시에예스의 진술은 위로부터 국민을 형성하는 기제가 무엇인지를 덧붙인다. 이 공통법과 공통의 대표는 바로 "조세부담" 및 "인구"(49)에 비례해 선출된다는 점에서 다시금 근대국민의 생산력과 연결된다.


요컨대 생산하는 자, 나아가 생산력의 집합, "동일한 이해관계"="사회의 공통이익"(76)으로 묶이는 집합은 공통의 헌법과 공통의 정치기구(대표)로 스스로를 하나의 전체로서의 "국민"으로 설정한다. 전자가 내용이라면 후자인 헌법은 "그것을 구성하는 형식"(93)이다. 공통의 이해관계가 공통의 대표를 만들고, 공통의 대표가 다시금 공통의 이해관계를 보전하는 사이클이 여기에 있다("공통적 이익은 개별적 이익을 지배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 127). 따라서 시에예스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서 국민국가를 완성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를 노동과 생산력의 집합으로 보는 사고가 법적 형식화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근대 국민국가로 향하는 길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 노정되어 있다; 로크가 노동가치적 경제론과 입법기구에 대해 말한다면, 시에예스는 양자를 종합하는 진정한 유기체적 사회를 논리적으로 구현한다.


시에예스에서 특기할 점 하나는, 분명 그는 "노동이 채신없는 일로 여겨지는 나라, 소비하는 것이 존경스럽게 여겨지고 생산하는 것이 창피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나라"(73)--생산계층과 소비계층을 분리하는 논리는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가 특권층을 비판하는 전통적인 수사, 즉 제3신분=노동=덕성, 특권층=사치=부패,타락이라는 오래된 도식을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덕성과 도덕의 언어가 상류층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어온 기나긴 역사를 감안한다면, 귀족은 부패해서가 아니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즉 쓸모가 없고 잉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다는 '효용'의 언어가 시에예스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체크해둘 만 하다.



2. <판옵티콘>


판옵티콘 자체는 하나의 도구라는 이해에서 출발하자.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이 수감자를 어떠한 주체로 인도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감시와 처벌>에서 이 주제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짚어둘 필요는 있다; 푸코의 테제는 훨씬 역사적으로 읽혀야 한다), 기본적으로 벤담의 사고를 관통하는 것은 효용성/유용성utility이다. 이 저술의 처음부터 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감옥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가히 강박적인 정언명령이다. 한 명의 감시자가 수 천 명의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한 명의 수감자가 자신이 소비하는 만큼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사회의 '폐기물'인 죄수들을 내버리는 대신 사회가 재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재생산할 수 있도록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벤담의 목적이다; <판옵티콘>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표현 중에 "비용 감소", "경제적"이 있음을 지적해 두자.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에 도달하는 것, 한 가지 도구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열정에 놀라는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구의" 효용, 효율, 이익인가?


실제로 벤담의 논리를 충실히 재현하듯 그의 글에는 낭비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첫 파트 첫 문단을 보라: "만일 다수의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 수 있도록 그들을 에워쌀 수 있는, 그들의 행동과 [인적-옮긴이] 관계, 생활환경 전체를 확인하고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감시에서 벗어나거나 의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이것은 국가가 여러 주요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정말 유용하고 효력있는 도구임에 틀림없다"(19, 강조는 인용자). 판옵티콘은 "한 건물 안에 다른 하나를 넣은 두 채의 건물"로서, 여기서 다른 하나의 건물이란 "중앙의 탑"을 가리킨다(22). 이 탑은 바깥과 격리된 감옥의 내부를 언제든 살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23). 이곳의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그[수감자]를 놓는 것"(19)으로, "탈출이나 폭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 수감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게 되고 이 강요된 굴복은 점차 기계적인 복종으로 연결된다"(26).


요점은 벤담의 고안물에 어떤 초월적인 위치에 놓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감자들을 감시하고, 조작하며, 그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사회에 유익한 존재들로 만드는 것, 판옵티콘은 바로 그러한 인간지배와 인간생성 과정을 수행하는 초월적 주체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앞서 나는 우리가 이 장치의 경이로움과 효과에 탄복하기 전 "누구의" 효율성이 증진되는 것이 중요한가를 물었다. 초월적 주체의, 국가의 효율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벤담의 사회모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끌어낼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또 하나의 텍스트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벤담은 자신의 효용주의적(공리주의적)utilitarian 인간관을, (물리적으로 지각 가능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을 유일한 동인으로 삼는 인간관을 축조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들이 살아갈 사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판옵티콘>은 벤담의 사회이론의 핵심을 보여준다: 각자 자신의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이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여 사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효율성이란 이윤의 극대화와 손실의 극소화를 가리킨다--초월적 주체로서의 국가가 서술어의 '주어로' 등장한다.


우리가 공리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명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좇는데 어떻게 사회 전체 쾌락의 최대화가 가능할 것인가?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이 방법으로 자유시장을 제시했다면(그래서 벤담의 경제이론도 적어도 그 초기에는 자유시장 옹호에서 출발한다), <판옵티콘>의 벤담에서 사회 전체를 조정하는 시점은 국가에게 주어진다; 벤담의 텍스트 두 번째 파트가 일종의 행정적 테크닉으로서 판옵티콘의 "관리"방법에 할애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분명히 말하건대, 판옵티콘 자체가 어떻게 건축되는지를 서술한 1부에 비해 판옵티콘의 운영과 관리에 대해 서술한 2부가 훨씬 더 중요하게, 꼼꼼하게 읽혀야 한다. 이 놀랍도록 실용적인 정신은 근대국가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행정의 사고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에예스는 "철학자"에 이어서 "행정가가 온다"고 썼다(138); 시에예스가 철학자였다면 벤담은 행정을 사유하는 철학자다.


그렇다면 효율적인 운영이란, 뛰어난 행정이란 무엇인가? 벤담의 사유는 이 지점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감옥운영의 핵심이 "경제성의 원칙"--"초과 비용의 문제"(38)라면, 그 원칙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의 핵심은 인간에게 내재한 이윤추구의 동력이다. 따라서 감옥의 효율적인 관리는 이러한 이윤추구의 동력을 가장 잘 실현시킬 인간들, "사적 이익"에 맡겨져야 한다고 벤담은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관리자가 전횡을 휘두를 가능성은? 그래서 행정이,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해진다: "수감자의 이익과 운영자의 이익이 동일시되는 수단을 찾아"내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43), 이 방법에 대한 서술이 <판옵티콘>의 진짜 핵심이라고 해도 좋다(여기에는 대중에 대한 공개를 포함해 오늘날 행정적 처리과정에도 먹힐만한 아이디어들이 종종 엿보인다). 운영, 관리방식, 죄수들의 격리, 노동, 식사조절, 의복, 청결함, 교육 및 휴식시간 활용, 일탈자 처벌(상호책임), 석방 후 재사회화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한 지점들에 대한 고려가 녹아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마치 만능부품처럼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 모두 적용할 수 있다"(70)--이 텍스트에서 판옵티콘은 감옥만이 아니라 병영, 학교, 식민지 개척을 위한 '행정적 처리방식' 혹은 만능도구 그 자체다.


이와 같은 행정적 과정이 염두에 두어야하는 두 가지 핵심개념은 '노동'과 '인간자원'이다. 시에예스와 마찬가지로 벤담에게 노동은 중요하다. "노동, 그것은 부유함의 아버지이며, 가장 훌륭한 재산인데도 왜 저주로 묘사하려 하는가?"(53). 이렇게 훌륭한 노동은 벤담의 체계에서 인간과 사회의 시점을 연결하는 주요한 개념적 도구가 된다. 개인은 노동하는 주체가 될 때 자기 자신을 위한 생산이 가능해질 뿐더러 나아가 비로소 타인을 위한, 사회를 위한 실체적인 '생산'이 가능한 무언가가 된다; 나는 그것을 인간자원이라고 부르고 싶다. 즉 인간을 노동하는 방법을 배울 때 사회의 쾌락/생산을 최대화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자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수감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더 많이 활용"(50)할 수 있는--여기에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한다--인간이 되어야 한다; 감옥은 수감자를 노동하는 주체로, 달리 말하자면 인간자원으로 재구축하는 국가의 장치다. 앞서 말했듯, 수감자들이 단순한 범죄자로 남는다면 이는 사회적 자원의 낭비이며, 감옥은 이러한 낭비를 막고 버려진 돌덩이로부터 언제든 가공할 수 있는 광물을 추출하는 재활용 장치인 것이다; 벤담이 수감자들에게 산수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61)은 자원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 자체의 재활용 과정 안쪽에서 인간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자원이자 부품으로 간주된다; 뒤집어 말하면, 죄수들은 사회의 가공처리과정 앞에서 철저히 객체/대상object화 된다. 공리주의적 인간관이 타자없는 주체의 감옥을 만든다면, 공리주의적 사회이론은 이러한 개인들을 하나의 자원으로 삼아 필요에 따라 망설임없이 재주조할 수 있는 국가관을 함축한다.


반드시 짚어야 할 지점은 벤담이 공적인 인간들의 덕성에 의지하는 "신뢰에 의한 관리"와 사인들의 이익추구적 본성에 의지하는 "계약에 의한 관리"를 대립시킨다는 사실이다(38-41). 벤담은 자신의 이익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선으로 자신의 삶을 도약시키려는 공화주의적/덕성의 인간관과 자기 자신의 이윤/쾌락추구 자체를 삶의 유일한 지평으로 놓는 자유주의적/효용의 인간관 사이의 오래된 대립을 의식적으로 되풀이한다. 후자에 입각해서 사고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벤담의 입장인데("공적 정신은 느슨해지며 새로움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금전적 이익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치열해진다" 39) 벤담이 덕성의 인간관을 꺼내들면서도 정작 그것을 껍데기로 만들고 있다는 것, 벤담은 덕성의 인간을 묘사할 때조차도 결국 그것이 효용의 인간인 것처럼 그려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덕성의 인간이 실패하는 까닭은 그 또한 본래 효용의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리는 엄밀히 말해 논리적 타당성이 결여된 논증이지만 동시에 벤담 혹은 효용주의적(공리주의적) 사고에서 덕성과 같은 성향을 애초에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평평해진 인간들의 세계에서 상승과 타락의 고저가 있는 인간을 사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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