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환. <애니멀 타운>. 전규환과 김기덕, 도시와 인간

Critique 2015. 1. 19. 04:10

전규환 각본 및 감독. <애니멀 타운>. 트리필름 제작, 2009. [2009년 스페인에서 먼저 나왔고 한국에는 2011년에 개봉]


1.


타운 3부작의 두 번째 편 <애니멀 타운>을 드디어 보았다. <모차르트 타운>(2008)과 <댄스 타운>(2010)을 재작년 군대에서 보고 <애니멀 타운>을 언젠가 보고 싶었는데 결국 본 셈이다. <댄스 타운>에 대한 기억이 다소 흐려진 상태라 얼마나 공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으나 타운 3부작 중에서, 그리고 최근에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다. 애초에 만든 의도가 매우 달라 이런 말이 적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국제시장>보다 이 영화가 훨씬 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그래서 <국제시장>에 대한 코멘트는 바리바리 준비해놓고 정작 글을 쓸 생각이 사라졌다). 내가 최근에 본 영화들에 국한한다면, <애니멀 타운>과 비슷하게 흥미로운 영화는 김기덕의 작품들(<악어>, <피에타>) 뿐이었다.


<애니멀 타운>은 타운 3부작의 핵심에 있는 두 가지 모티프를 다른 두 작품보다도 강렬하게 표현한다. 하나는 인간에게 언제나 내재한 동물적인 것, 다른 하나는 서울이라는 도시 지층의 삶이다. <모차르트 타운>이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도시 하층의 삶을 재현했다면 <애니멀 타운>은, 물론 카메라의 다소 기계적인 무덤덤함은 여전하지만, 세 작품 중 가장 서사/플롯의 인위적인 면모에 의지한다. 영화는 두 개의 메인플롯과 하나의 서브플롯으로 진행된다. 전자발찌를 찬 아동성애자이자 도시의 하층 노동자인 오성철(이준혁 분)과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무언가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받는 제본소 주인 김형도(오성태 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각각의 메인 플롯들을 이끌어 간다. 고물을 수집하는 도시빈민/아동노동자 차은이(김희선 분)는 부분적으로 양자를 매개하고 또 작게나마 독자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세 개의 플롯 혹은 인물의 삶은 모두 도시의 하층부의 삶, 즉 빈곤과 불황, 분노와 좌절의 흐름에 휩싸여 느슨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이들의 삶 사이의 연관관계는 마치 별자리/짜임관계konstellation처럼 한국 2000년대 후반의 어떤 리얼리티를 재현한다.


단순한 착취-피착취 관계라기보다는 모두의 삶을 늪처럼 차분히 그러나 놓아주지 않고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불황으로 나타나는 도시의 물질적인 삶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 바닥에 뿌리박힌 동물적인 면모를 이끌어낸다. <애니멀 타운>에서 이 역할을 주도적으로 떠맡는 인물은 오성철이다. 열정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성욕 자체를 기계적으로 표출하는 섹스를 포함해 성철의 신체와 신체를 움직이는 동력들은 영화의 전면에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동물적인 삶, 문명화된 인간의 외피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욕구들로 이끄는 것은 도시경제의 불안정성 그 자체다. 하층 계급 노동자로서 그는 철거가 예정된 건물에서 가스도, 온수도 끊긴 채로 살아간다. 그의 방은 성매매여성이 불 좀 때라고 타박할 정도고, 몸을 씻기 위해 찬물에 떨거나 (휴대용 버너로 데운) 물을 아껴 써야 하며, 마실 물은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떠온다. 그는 아파트에서 마치 먹이를 찾아 도시 곳곳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들개처럼 살아간다. '문명에서 버려진 삶'의 조건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의 동물적인 면모를 이루면서 그를 그의 내면에 깃든 또 다른 동물적인 욕구로 몰아간다.


성욕과 분노는 성철의 삶을 끌어내리고 또 계속해서 괴롭히는 욕구, 탈출할 수 없는 신체라는 점에서 그의 삶 자체를 영원히 동물적인 것으로 제약하는 근원이다. 삶의 가혹함에 몰리면서 그는 지나가는 차은을 보고 자신의 아동성애적 성향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튀어나오는 걸 느껴야 하며, 모욕적인 승객 앞에서 폭발한 분노는 그녀를 반 죽여놓는 폭력으로 표출된다. 이때도 정신을 잃은 승객의 피칠갑이 된 얼굴과 벌거벗은 하반신을 무심하게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시금 이들의 삶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동물적인 것들로 포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목을 매고 죽으려는 결심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삶을 에워싼 동물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적인' 욕망의 발로다. 그러나 성철이 인간적인 죽음, 즉 '목을 매고 자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그가 저지른 과거의 죄--아동성폭행임이 암시되어 있으며 이는 역시 그 자체로 동물적인 것의 모티프에 속한다--에 여전히 붙들린 피해자 형도에 의해서다. 물론 목을 맸을 때의 신체적 반응, 질식과 실금은 우리 육체의 동물적인 면을 다시금 상기시킨다...목을 매고 죽는 데 실패했을 때 성철이 마주치는 것은 오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육체, 아동성애와 조절될 수 없는 분노가 횡행하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아리 자체다--피에 젖은 얼굴로 울면서 소변을 보는 순간은 인간의 신체라 배출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뒤엉켜 육체를 뒤엎는다는 점에서 성철의 삶을 그 자체로 집약한다. 결국 성철이 맞는 죽음은 도로에 튀어나온 멧돼지와의 충돌로 인해서인데, 짐승의 시체와 나란히 응시되는 성철의 시체는 그의 삶이 개의 삶이 가리키는 동물적인 것으로부터 끝내 벗어날 수 없었음을 뜻한다; '로드킬' 당한 이는 멧돼지만이 아니다.


제본소의 주인으로서, 어쨌든 자신의 노동 이외에도 (기계와 배달용 오토바이라는) 생산수단을 가진 중하층 계급의 소자본가로서 형도는 분명 성철과 동일한 층위에 놓여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경제적 삶 또한 오랜 불황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는 결국 자신의 피고용인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가정 안에서 그의 삶은 다른 가족들과 분리되어 있으며 자신이 집사로 있는 교회에서도 그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있을 수밖에 없다(영화의 다소 예기치 못했던 결말에서 이유가 밝혀진다). 그리고 그의 삶에도 동물적인 요소들, 그 자신이 통제해오던 인간적인, 문명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것들이 침투한다--직선적인 질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오성태의 얼굴과 말투, 목소리, 걸음걸이는 이준혁의 짝눈, 살집과 근육이 뒤엉킨 동물적인 육체와 대척점에서 영화의 구도를 이루는 한 축이다. 직원을 해고한 후 그는 담배에 의존하기 시작하며, 치킨집 여주인의 반쯤 노출된 가슴에 눈길을 계속 빼앗긴다. 눈물과 피가 삶에 들어오고,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을, 질서를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트린 성철을 마주치고 그를 추적한다. 성철의 범죄로 인해 형도의 삶이 송두리째 빈 것으로 전락했으며 그 빈 틈새로 점차 파고들어오는 육체-동물적인 모티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인간은 하나의 동물일 수 밖에 없다고 강요하는 도시의 진실을 보여준다; 동물적인 것의 손길은 마치 그러한 추잡함이 지워질 수 있다는 믿음의 결과물처럼 드러나는 형도의 발목을 붙잡아 동물적인 것의 전자발찌를 채워 끌어내리는 것이다.


 '애니멀 타운'에서 택시를 몰고 돌아다니는 성철도, 오토바이를 몰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형도도, 폐지/고물을 싣는 유모차를 끌고 헤매는 차은도 모두 버려진 도시를 헤매는 들개와 같은 존재들이다--차은이 다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장면이 성철과 멧돼지의 시체를 응시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연결은 셋의 의도된 유사성을 보여준다. 차은을 성철이 응시하고 성철을 형도가 응시하는 장면은 마치 짐승들 사이의 쫓고 쫓기는 삶을 보여주는 "동물의 왕국"을 닮았다. 그러한 짐승들이 헤매는 도시, 인간에게 인간이 벗어났다고 믿는 짐승의 삶을 덧씌우는 서울은 그 순간 하나의 자연이자 폐허가 된다. 한쪽 벽만이 남은 집으로 덩굴이 덮고 주차장은 잔디가 뒤덮으며 해가 지면 인적없는 마을 터에 늑대와 개, 고양이와 쥐들이 돌아다니는 자연=폐허 말이다. <애니멀 타운>은 문명의 정점을 표명하는 도시가 단순히 짐승들이, 동물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물과 짐승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전혀 다른 톤이지만 사카구치 교헤의 <Zero에서 시작하는 도시형 수렵채집생활>을 그 곁에 두고 싶다. 사카구치의 책과 전규환의 영화는 자본주의의 한 끝에서 문명과 자연이 쇠락해가는 폐허로서의 도시에서 뒤엉키고 있음을 증거하는 자료들이다.




2.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나는 한국 도시의 하층부를 탐구하는 시선들로서 전규환과 김기덕을 함께 보는 작업이 무척이나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김기덕 역시 데뷔작 <악어>에서부터 비교적 근래의 <피에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도시 하층계급의 삶을 탐구해왔다. 그러나 전규환의 타운 3부작과 김기덕의 작품은 유사한 대상을 매우 다른 형식을 통해 조명한다. 전규환이 배치하는 인물들의 삶은 결국 도시라는 장소가 어떤 진실을 갖는가에 대한 물음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한다. 김기덕은 (적어도 내가 본 몇 편의 영화들에서는) 그러한 도시에서 빚어진 특정한 전형--주로 강한 인정욕망을 가진 거친 하층계급 남성--이 모든 것의 한 가운데 있다. 도시는 조폭, 일수꾼, 앵벌이, 넝마주이처럼 도시적 삶의 (반半)주변부에 놓인 남성인물이 자리하고 이들이 태어났고 살아가는 공간으로,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허용하는 듯 하면서도 끝내는 좌절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등장한다. 도식적으로 대비시킨다면 전규환에게 인물이 도시의 일부라면 김기덕에게 도시는 인물의 모태이자 동시에 그 대립물로 나타난다; 마치 <피에타>에서 '어머니'가 이강도에게 그런 존재이듯 말이다...<악어>에서부터 도시와 문명으로부터 내려온 여성인물은 남성주체의 욕망을 자극하고 일깨우고 그 목표가 되면서 동시에 남성주체를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상'이자 '공간'인 것이다--마지막 장면에서 수갑의 양가적 기능, 용패에게 여성의 곁에 남아있게 허락하면서 동시에 수면으로의 탈출을 가로막고 죽음에 이르도록 제약하는 기능은 이후에 이르기까지 김기덕의 영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모티프의 시초이기도 하다.


 도시와 인물이 맺는 상이한 관계는 두 감독의 영화텍스트에서 인물의 육체와 욕망에 대한 상이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전규환의 영화에서 냉정하고 무감한 카메라는 인물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욕구를 마치 인간에게 내재한 어쩔 수 없는 (거의 불편하기까지 한) '기능'으로 그려낸다. <애니멀 타운>과 <댄스 타운>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준혁이 목을 매는 장면은 양자 모두 인간의 신체에 내재한 분비물과 질식 상태에서 뻗어나오는 단말마적인 움직임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훑는다. 타운 3부작의 섹스 신들을 함께 비교하는 일은 흥미로운데, <모차르트 타운>에서는 삽입섹스가 의도적으로 중단되고 남성인물의 자위로 끝나며, <애니멀 타운>의 성철은--아마도 상대방이 여아가 아니기 때문에--삽입섹스를 통해 절정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다. <댄스 타운>에서 길바닥 위의 섹스 장면은 문자 그대로 동물적인 성욕의 해소에 가깝다; 세 편의 섹스 모두는 서로에 대한 애정 혹은 제약불가능한 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섹스를 수행하는 개개인의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쪽에 가깝다. 이들은 도시의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파편화된 삶, 단자적인 삶을 그 자체로 형상화한다; 모든 작품에서 유의미한 인간관계는 없으며 각자는 어떠한 고독감도 없이 고립상태로, 마치 그게 그 세상의 자연스러운 법칙인양,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개개인들의 고치들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전규환이 그리는 도시의 진면목이 보일 것이다. 타운 3부작은 어떠한 인간적인 희망도 말하지 않는데, 이는 영화가 절망을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영화는 인간이 아닌 도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인간의 서사를 공간과 장소의 서사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나는 지아장커와 함께 전규환의 영화에서 좋든 싫든 근본적인 새로움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김기덕의 영화는 역으로 인간적인 것을 그 한가운데에 두고, 그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전규환을 지배하는 모티프가 비-인간적이라면) 초-인간적인 것을 끌어낸다. 김기덕의 영화를 지배하는 모티프 중 하나는 과잉이다. 폭력의 과잉, 고통의 과잉,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무지 끊이지 않고 도로를 적시는 강도의 피처럼) 피의 과잉 등등...<악어>의 섹스 장면에서 용패의 과장된 몸동작, '어머니'에게 삽입섹스를 시도하는 강도를 보라(심지어 <풍산개>에서는 침묵의 과잉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과도한 진술일까?). 우리가 김기덕의 영화에서 속죄라든가 짐승(야생)의 모티프를 본다면, 이는 세계 자체와 대립하는 인물들로부터 억눌린 에너지를 거의 폭발에 가깝게 이끌어낸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요컨대 강한 욕망(인물)과 강한 억압(세계)이 대립하고 그 대립에서 전자는 초인적인 것, 과잉된 것, 넘쳐서 어쨌든 폭발과 발산 자체가 중요한 에너지를 생성해낸다; 속죄의 모티프는 이러한 에너지 자체가 표현되고 또 갈 길을 찾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악어>를 보자. 최초에 도시의 계급구조에서 배태된 하층계급 남성이 있고, 이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상층계급의 여성이 있다.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이 욕망은 도시의 계급구조 혹은 체제에 내재된 더 강력한 폭력에 가로막히고, 이 좌절은 다른 형태의 강력한 에너지로, 극단과 과잉으로 표출된다(왜 <풍산개>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가?). 나는 이 도식이 김기덕의 영화 모두에 해당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김기덕의 주요한 모티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의 영화에서 에너지의 생성과 변화는 변증법적인 성격을 띤다고도 할 수 있으며, 여기서 도시는 그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김기덕 영화는 좋든 싫든 섹슈얼리티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단지 전통적인 페미니즘 독해, 여성의 억압과 해방이라는 기제를 중심에 놓는 분석이 맞지 않을 뿐이다. 김기덕은 남성에 대해 말하며 여성은 그 남성의 욕망체계의 한 부속으로만 남을 뿐이다--철저히 기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피에타>의 '어머니'나 여성인물의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결국 후반부에서 그것이 완전히 탈각되고 '아버지'의 시선이 영화를 잠식하는 <사마리아>를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하다. 애초에 여성인물의 재현이 아니라 남성인물 혹은 특정한 형태의 남성성 자체의 재현을 초점에 놓는 텍스트라는 걸 인정하고 비평을 출발할 필요가 있다. 김기덕의 남성 재현이 갖는 최대의 리얼리티 중 하나는, 한국 남성의 이성애적 욕망 혹은 그에 기반하여 구축된 성적 정체성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계급적 구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악어>와 <나쁜 남자>, 나중에 보다 희석된 형태로 드러나는 <풍산개>에서도 하층 남성은 항상 자기 자신보다 우월한 여성을 앞에 두고 욕망과 열등감의 뒤얽힘을 마주한다... 여성을 창녀로 만드는 시선, 혹은 여성에 대한 과도한 폭력과 그 반작용처럼 등장하는 숭고화는 자신과 절대로 동등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매우 고전적이나 지금도 유효한 형태의 남성적 주체의 핵심을 드러낸다. 한국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계급의 언어와 뒤엉켜서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고전적인 성차분석의 틀을 먼저 세워놓는 대신 남성성이라는 사태 자체로부터 분석을 이끌어 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인간적 공간으로의 이행이라는 전규환의 시선이든, 남성주체의 내면에서부터 초-인간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김기덕의 서술이든 양자가 공통적으로 '평범한 개인'의 '일상적 내면'에 대한 이탈과 거부를 공통분모로 갖는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양자가 함께 거부하는 지점에서 머무르고 또 그러한 일상의 논리를 미니멀하게 극단적인 지점에 이르기까지 들춰내는 이로 홍상수를 꼽을 수 있다. 셋을 하나의 꼭지점으로 놓는다면 우리는 전규환-홍상수-김기덕이라는 꼭지점으로부터 하나의 직각삼각형의 도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3차원적으로 보면, 홍상수가 일상의 논리를 극단화하고 아이러니컬하게 내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거부'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셋이 함께 거부하는 어떠한 지점을 상정하고 일종의 정사면체를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어떤 저항, 일상적인 삶,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개인의 삶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예술적 경험의 출발점에 있었고, 이 출발점에서 세 감독을 이해하는 서사를 희미하게나마 목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이들이 어디에 멈출 것이고 혹은 멈추었는지의 여부는 조금 더 넓은 시점에서 지켜볼 이야기겠지만(아마 가장 빨리 멈춘 이는 홍상수가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리라...나는 도식적인 기능에 머무는 수준이기는 하나 <피에타>에서 <악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형상이 출현했다는 점은 좀 의미심장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한국에서 영화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된 상품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는가에 답변하기 위해서 여전히 이들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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