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Reading 2015. 1. 12. 14:16

휴식기 치고는 생각보다 많이 싸돌아다닌 지난 주 후반부. 그래도 꾸역꾸역 책은 읽었다. <스펙타클의 사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를 읽었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역. 도서출판 울력, 2014. Trans. of _La Société du spectacle_ by Guy Debord, 1992(1967년의 초판에 새로운 서문만 붙였고 본문수정은 없다고 한다).


: 처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건 수년 전 아감벤의 <목적없는 시간>을 읽으면서다. 최근 대중영화에서 스펙타클이 활용되는 방식에 대해 흥미가 생겨 찾아보았다. 다 읽은 뒤의 소감은 아감벤에게 낚였구나, 정도. 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한 내용이 아니었다. 드보르는 구체적 현상으로서의 스펙타클을 비판하는 대신--그런 인상을 주는 진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1960년대, 즉 "2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서구사회의 스펙타클적 성격을 크고 추상적인, 루카치를 연상케하는 헤겔-맑스주의적 언어로 진술한다. 이 책의 서술적 형식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처럼 파편적인 단편 221개를 나열하는 스타일을 채택했음을 감안한다면 드보르가 의도한 작업이 무엇인지 조금 더 잘 드러날 것이다--본문 쪽수가 작은 판형의 국역본으로도 200쪽 가량임을 고려하면 정말로 짧은 글들, 차라리 문단들의 모음인 셈이다. 단편들의 반복과 축적이 마치 입체파가 대상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병렬하는 것처럼 스펙타클의 사회에 관한 하나의 종합적인 상을 구축하는 데 성공적인지 판정할 정도로 꼼꼼히 읽었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는 책이다. 결국 소외 및 그를 유발하는 새로운 문화/사회체제에 대한 고전적인 헤겔-맑스주의적 분석의 반복 이상으로 이 책을 특별하게 읽히게 해주는 진술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예컨대 책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4장 "주체와 표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보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왜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지 못했는가를 비교적 선구적으로 고찰한 텍스트라는 역사적 평가는 가능할 수 있겠으나 오늘날의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드보르보다 그러한 분석과 고찰을 더 잘 수행한 네오-맑스주의적 텍스트를 찾기 어려울 성 싶지는 않다. 예컨대 문화가 더 이상 혁명적인 사회/삶을 위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지 않았다는 통찰에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30년 정도 전에 보다 정교한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드보르의 텍스트가 현존하는 스펙타클의 구체적인 사례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소외 경향에 대한 일반화된 진술들을 반복적으로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스펙타클이 무엇인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생생한 인식을 포착하기는 어렵다(실제로 이 책에서 스펙타클의 정의/설명/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나오지 않는다). 굳이 그런 걸 찾자면 6,7,8장 정도가 내 눈에는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긴 했다. 이후 영화에 대한 드보르의 작업 등이 번역되지 않는 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다소간 그 독해에 있어 고립된 상태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들의 인용.


"스펙타클은 사회 자체, 사회의 부분 그리고 사회 통일의 도구로서 동시에 제시된다. 사회의 부분으로서 스펙타클은 특별히 모든 시선과 의식을 집중시키는 영역이다. 스펙타클은 이 영역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악용된 시선과 허위의식의 장소이며, 그것이 실행하는 통일은 보편화된 분리의 공식적 언어에 불과하다." (15, 테제 3)


"스펙타클은 반박과 접근이 불가능한 거대한 실증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스펙타클은 반박을 용인하지 않는 자신의 보이는 방식, 즉 가상의 독점에 의해 그러한 무기력한 수용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 (20, 테제 12)


"현대사회의 실천적 힘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타클 속에 하나의 독립적인 제국을 건립한다." (25, 테제 22)


"스펙타클의 기원은 세계의 단일성의 상실에 있다. 현대적 스펙타클의 거대한 팽창은 이러한 상실의 총체를 나타낸다. [...] 스펙타클 속에서 세계의 한 부분이 세계의 전면에 표상되며, 이것은 세계를 능가하는 위치를 점한다. 스펙타클은 이러한 분리를 의미하는 공통 언어에 불과하다. 관객들을 한데 결합하는 것은 이들의 고립을 유지시키고 있는 중심과의 불가역적 관계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분리된 것을 한데 결합하지만, 그것을 분리된 상태로서 결합한다."(31, 테제 29)


"존재하는 모든 것에 몹시 행복해하는 찬동과 순전히 스펙타클적인 저항이 마치 동일한 것처럼 서로 결합될 수 있다. 이것은 불만 자체도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 이를테면 경제적 과잉이 그러한 원료, 즉 불만을 가공할 수 있을 정도까지 생산 영역을 확대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나타낸다." (56, 테제 59)


"스타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생산적인 특화들의 분산을 보상해야 한다. 스타는 자유로이 총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삶의 양식과 사회의 이해 방식을 표상한다. 스타는 실현 불가능한 사회적 노동의 결과물을 구현한다. 그는 노동의 부산물--만인이 인정하는 하나의 과정의 시작과 끝인 권력 바캉스, 즉 [구매] 결정과 소비--을 몸짓과 표정으로 연기한다." (57, 테제 60)


"무대에 놓인 스펙타클의 대리인은 스타의 자격으로서 개인의 대립물, 다시 말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개체성의 적이다. 이 대리인은 동일화의 모델로서 스펙타클 속에 투입되면서 자율적인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사태의 추이에 순종하는 일반법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57, 테제 61)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고 역사를 유기하는 현재의 사회조직이다. 스펙타클은 역사적 시간의 토대 위에 건립되는 시간의 허위의식이다." (159, 테제 158)


"자본주의의 생산은 공간을 통일시킨다. 외부사회들은 더 이상 이 공간에 제약을 가할 수 없다. 이 공간은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보편화 과정이다." (167, 테제 165)


"도시계획은 계급의 권력 수호를 위한 부단한 과업--도시의 생산 조건이 위험하게 집결시킨 노동자들의 원자화 상태의 유지--의 현대적 실현이다. [...] 그러나 고립을 향한 보편적 운동--이것이 도시계획의 현실이다--에는 계획화할 수 있는 생산과 소비의 필요에 따른 노동자들의 통제된 재통합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체계 속의 통합은 고립된 개인들을 함께 고립된 개인들로서 다시 포획해야 한다. [...] 이 공동체는 또한 고립된 개인을 가족 세포 속으로 동반한다. 스펙타클적 메시지를 위한 수신 기기들의 일반적인 사용은 고립도니 개인을 지배적인 이미지들--이미지는 오직 고립 속에서 절대적 힘을 획득한다--로 가득 채운다." (170-71, 테제172)


"스펙타클적 소비는 동결된 옛 문화와 이 문화의 부정적인 표명에 입각하여 재활용되는 반복을 보존한다. 그래서 스펙타클적 소비는 문화 영역 안에서 공공연하게 이 소비가 자신의 총체성 안에서 은연중에 존재하고 있는 모습, 즉 소통 불가능한 것의 소통이 된다. [...] 문화 속에서 역사를 망각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 스펙타클[....]" (테제 192)


"이미지 사회의 본질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194, 테제 199)


"부어스틴은 자신이 비판하고 있ㄴ즌 미리 꾸민 "가장된 사건들"의 확산이 오늘날 사회생활의 균일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기인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역사가 유령처럼 현대사회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동결된 시간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균형을 보존하기 위해 삶의 소비의 모든 층위에서 구축된 가장된 역사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194-95, 테제 200)


"스펙타클은 "만남의 능력 장애"를 위한 체계적인 조직이자 환각적인 사회적 사건에 의한 만남의 대체--만남의 허위의식, "만남의 환상"--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타자에 의해 식별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더 이상 자신의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분리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이데올로기는 이 편안한 안식처에서 서식한다." (210-11, 테제 217)


"스펙타클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자아는 세계의 현전-부재로 에워싸여 진압된다. 또한 스펙타클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가상의 조직이 믿게 하는 허위의 실질적인 현전 아래 경험된 모든 진리가 억압되기 때문이다. [...] 소비자가 느끼는 모방의 욕구는 바로 자신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모든 측면에 의해 조건 지어진 유아적인 욕구이다. [...]" (212, 테제 219)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지리적 불균등발전론>. 임동근, 박훈태, 박준 역. 문화과학사, 2010. Trans. of _Spaces of Neoliberalization: towards a Theory of Uneven Geographical Development_ by David Harvey, 2005.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었으며 영어로는 2006년 _Spaces of Global Capitalism_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 한편으로는 (칸트적 범주로부터 유래하는) 우리의 인식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현상들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장치로서 공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데이비드 하비를 느리게나마 추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매우 생산적인 저자의 저술들을 당장 다 따라갈 필요는 없고 어차피 나의 목적은 논리와 이론적 사고 그 자체의 이해와 획득에 있기 때문에 비교적 이론적인 스케치에 가깝다는 이 책을 집었다. <신자유주의화의 공간들>은 2004년 행해진 두 편의 강의("신자유주의와 계급권력의 복원", "지리적 불균등발전론을 위한 노트")와 한 편의 에세이("공간이라는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다. 세 편의 글 중 앞쪽의 것이 비교적 정세분석적인 성격을, 뒷쪽의 것이 보다 이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첫번째 글 "신자유주의와 계급권력의 복원"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하비의 다른 책, 예컨대 <신자유주의>와 같은 짧은 책을 읽어본 이에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을 내용이다. 여기에서 하비는 19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 및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이 위기를 맞게 된 이후 지속적으로 수행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적 정책들 및 그 반작용으로 나온 신보수주의의 흐름을 간략하게 일별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지리학자라기보다는 국제적 정치경제비판에 조금 더 가까운 텍스트다. 신자유주의정책이 마치 고전적 자본주의의 귀족-자본가-국가의 결합체와 같이 부를 타 계급에서 착취하여 자신들에게 집중하는 새로운 계급권력을 창출했고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사회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신보수주의적 국가권력이 작동한다는 하비의 변증법적 설명은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다(푸코와 들뢰즈를 경유한 전혀 다른 경로를 거친 이론틀, 예를 들어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에서도 매우 유사한 입장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글 "지리적 불균등발전론을 위한 노트"는 지금까지 발전의 지역차를 설명해온 여러 이론들을 소개한 뒤 그 이론들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논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논의의 핵심은 지리적 불균등발전론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발달이라는 (맑스주의적) 맥락과 접합시키는 데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러한 흐름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포함한다. 가장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고찰들을 담은 "공간이라는 키워드"는 마찬가지로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맑스주의적 문제의식과 연결시키기 위한 사색들을 포함한다. 하비가 자신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앙리 르페브르는 물론 라이프니츠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델링의 논리를 탐색했다는 점은 꽤 놀라운 일이다. 비판지리학에 완전히 무지한 나로서는 여기서 하비가 설명하는 바를 거의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 차후 르페브르의 저술들과 하비 자신의 보다 이론적인 과거 저술(특히 <자본의 한계>)을 읽은 뒤에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공간이라는 개념/범주를 충분히 소화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게오르그 크네어, 아민 낫세이.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 정성훈 역. 갈무리, 2008. Trans. of _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_ by Georg Kneer, Armin Nassehi, 2000. [본래 1993년에 출간되었던 듯 하다]


: 제목 그대로 루만의 사회적 체계이론에 대한 안내서. 역자가 밝히고 있듯 루만의 마지막 주저 <사회의 사회>를 포함한 1993년 이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어차피 새롭고 난해한 사유에 입문할 때 개설서는 그럭저럭 튼실한 한 권이면 충분하며 결국 사상가의 언어와 어떻게든 직접 맞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사실상 제대로 된 다른 안내서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책은 짧지만 책이 안내하는 루만의 사고방식,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언어 자체가 다른 이론틀과 상이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작은 논리 단위를 수용할 때까지 진도가 꽤 더디게 나간다(이건 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사회학 베이스가 없는 나로서는 다른 이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인간주체나 사회적 구조물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는 대신 (여러 인간주체들, 루만의 용어로 '인격'person들을 관통하는) '소통'의 공간으로서 사회를 정의하는 루만의 논리는 사회를 설명하는 익숙한 틀과는 꽤나 다르다. 이 책의 순서는 그러한 난점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짜여있다. 1장이 루만을, 2장이 체계이론의 지적 배경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루만 체계이론의 기본개념들을 소개하는 3장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기초적인 개념을 구성하는 논리에서부터 루만의 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별다른 노력없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아닌 셈이다. 개념들 및 개념들이 연결되어 있는 근본적인 논리를 디테일하게 설명한 뒤 4장에서는 미시적 단위로서의 개념들이 연결되어 사회의 주요한 거시적인 모티프들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설명한다(루만의 핵심 모티프 중 하나는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분화된 영역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는 이후에 루만을 따라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피상적인 느낌을 따름이지만, 내게 루만의 이론은 적지 않게 현대독일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인상을 준다). 5장은 루만의 체계이론이 어떻게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 특히 생태학적 문제와 (얼마전 작고한 울리히 벡을 의식한)위험을 다루는 데, 그리고 비판적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활용될 수 있는지 간략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한 권으로 루만의 이론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어차피 개설서를 요약할 생각도 없다. 대신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서만 적자면, 결국에는 3장과 4장이 핵심이다. 앞서 말했듯 3장은 미시적인 개념을, 4장은 거시적인 사회체계의 논리를 다룬다. 다만 4장이 당연히 앞서 설명된 개념들을 바탕으로 전개되기에 3장에 대한 이해 없이 4장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다소 길고 힘들어도 3장의 논리를 최대한 꼼꼼하게 이해한 뒤에 4장으로 가기를 권한다. 루만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특정한 담론체계의 형성과 지속,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서 푸코와 유사한 "반인간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만 잘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 책의 설명은 의외로 잘 이해될 수도 있겠다. 나는 이어 <체계이론 입문>-<열정으로서의 사랑>-<생태적 커뮤니케이션>-<사회의 법>-<사회의 사회> 순서로 읽기를 느리고 꾸준하게 지속할 생각이다(<예술체계이론>의 번역수준이 어떤지 확신이 안 선다. <사회적 체계들>로 번역되었어야 할 <사회체계이론>의 번역수준에 대한 절망적인 코멘트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아마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제외하면 내 연구에 직접적으로 인용될 바는 없겠지만, 결국 이론의 공부는 특정한 논리적 사고의 습득 자체를 목표로 하지 이론의 직접적인 쓸모를 향할 것이 아니다. 후자는 오히려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제약한다; 사유는 자신이 그 쓸모를 가늠할 수 없는 장소를 헤맬 때 비로소 성장하는 법이며, 그 쓸모를 이미 알고 있는 장소에 머무는 것은 성장없는 되풀이랑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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