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 <유아기와 역사>

Reading 2014. 12. 4. 11:40


조르조 아감벤. <유아기와 역사: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_Infanzia e Storia: Distruzione dell'esperienza e origine della storia_). 1978. 조효원 역. 새물결, 2010.


아감벤의 <유아기와 역사> 국역본은 읽어본 아감벤의 텍스트들 중 <사물의 표시>와 함께 가장 이론적인 텍스트인데, 역시 젋어서 (70년대 말) 쓴 글이라서인지 다소 기계적인 도식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한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번역은 대체로 무탈한 듯 하지만 이론의 언어에 꽤 많이 매달리는 글이라 조금은 천천히 읽어야한다. 다만 잠재태-현실태 같이 이후 아감벤의 논의에 중요한 틀을 이루는 (그래서 아감벤의 논문집 중 _Potentialities_가 왜 번역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개념적 도식을 인식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도식을 이 텍스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본서보다 10여년 뒤 1988-89년 불어판이 출간될 때 덧붙인 "언어 실험"에서 잠재태-현실태 구도를 언어에 적용해 설명하는 부분은 조금 더 명확할지도. 물론 <유아기와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글이라 생각되는 건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표제작 "유아기와 역사: 경험의 파괴에 관한 시론"과 3장 "시간과 역사: 시점과 연속성에 대한 비판"이다.


전자는 벤야민이 "이야기꾼"에서 언급한 경험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를 받아 고대부터 근대까지 주체와 경험/인식의 역사를 다루고 다시 주체를 초월하는 심급으로서 언어 이론의 역사를 다룬다. 제일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론가는 에밀 벤베니스트(방브니스트? 정확히 뭐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경험-주체-언어라는 항에 "말 없는 것"으로서의 유아기라는 경계적인 상태를 집어넣어 도식을 조금 복잡하게 만드는데, 나중에 한번 더 읽어야 명료하게 정리가 될 듯 하다. 여튼 아감벤이 고대철학부터 동시대의 프랑스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광범위한 지적 축적을 쌓았는가를 보여주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언어이론도 흥미롭겠지만, 주체 개념의 변화와 진리-경험 개념의 변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한번 정도 따라가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고대-중세-근대를 연결하는 시선 자체가 드물지 않던가(물론 그러한 설명이 아감벤의 것이라는 제한은 덧붙여 두자).


문제의식이 제일 흥미로운 것은 역시 "시간과 역사"였다. 제목에서처럼 서구 사상에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하고 근대적 시간관이 어떻게 혁명적 정치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래서 새로운 시간성/역사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고대, 기독교, 근대(헤겔), (초기)맑스, 벤야민-하이데거, 항유적 시간관을 제시하고 뒤의 셋에서 혁명적 시간관을 위한 가능성을 찾는다. 문제의식도 공감하고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기도 한데--내가 변증법이라는 주제를 뒤쫓게 된 것 역시 시간, 운동, 이질적인 영역들의 종합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그가 제시하는 '대안들'에는 선뜻 설득이 되지 않는다. 아주 단순화하면 선형적인 시간관을 깨트리고 매 순간 혁명적 가능성의 실현/실천을 주장하는 건데...일단 나는 초기 맑스나 메시아주의에 의존하는 관점이 그렇게 실천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아마 맑스주의자라면 아감벤이 왜 <자본론>을 비롯한 맑스의 후기 저술의 시간관을--예컨대 <자본론> 2권은 명백히 시간에 대한 개념이 강조된 텍스트인데--건드리지 않고 초기의 논의에만 그를 국한시키는지 의심을 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아감벤의 혁명적 정치에 대한 구상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고찰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단'이나 '메시아'와 같은 모티프를 <유아기와 역사>에서 벌써 꺼내고 있다는 걸 강조해두자.


제법 기대하고 읽었던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다룬) "왕자와 개구리"는 별로였다. 앞서 "시간과 역사"를 읽은 뒤 봐야 하는 글인데 기본적으로 아도르노를 헤겔적 관점과 동일시한 뒤--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동시에 아주 맞는 것도 아니다--변증법적 매개와 같은 개념을 전부 부정하고 벤야민의 "문헌학적 방법"을 이질적인 영역들이 대상 속에서 무매개적으로, 직접적으로 종합된 것을 보는 방법론으로서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논리가 70년대 말에 토대와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라는 고전적인 인과율 개념에 대한 비판이 필요했던 시점에는 나름 시의성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조금 더 정교한 모델링이 요구된다. 여기서 아감벤이 제시하는 방법론은 더 이상의 정교화가 없다면 서로 다른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뒤섞는 '비변증법적' 사유에 다름없어 보인다(그리고 국내에 소개된 아감벤의 다른 텍스트에서 이 문제를 더 면밀하게 다루는 것 같지는 않다...<도래하는 공동체>를 읽어봐야 할까?). 아감벤이 아도르노에 맞세우는 맑스를 다시 가져와 아감벤에 맞세운다면, <자본론>은 근본적으로 물질영역을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처럼 가정한 뒤 그 영역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과 원리가 무엇인가를 추상화해서 설명하는 텍스트이며, 그와 같이 이질적이고 부분적인 독립성을 가진 영역들의 차이를 다시 종합하는 것이 진정한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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