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또는 경험주의적 미학

Comment 2014. 11. 2. 15:49

<[강연] 작가 김훈 "나는 왜 쓰는가"> 링크: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31/2014103103307.html


이하는 이 강연 및 문답에 대한 논평.





김훈은 자신이 유물론자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에 더 가까워보인다. 경험주의 철학텍스트가 아니라 경험주의적 태도에 입각해서 살았던 사람들 말이다. 철학 혹은 순도 높은 이념은 허공에서 뜬 채로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 또한 하나의 존재양식이다. 그 철학을 땅과 맞닿게 하는 순간 철학은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정의했던 말들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철학이 아닌 사상사, 논리가 아닌 수사의 연구는 스스로가 순수하다고 믿었던 개념이 땅에 발을 딛고 걸어가는 궤적과 발자국과 부르튼 발과 발에 묻은 진흙과...마침내 그것이 죽어 묻히는 장소까지 따라간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로서의 문학연구자는 철학자보다 조금 더 '완전하다'. 경험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깔끔한 개설서를 읽으면 그만이지만, 경험주의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차라리 새뮤얼 존슨의 <라셀러스>를 읽는 쪽이 낫다(데이비드 흄은 양자의 차이를 면밀히 의식하며 살아간 것 같다...그가 <영국사>를 썼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터뷰에서 김훈의 말은 모순적이다. 나는 그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특히나 경험주의적 태도는 그것이 순전하면 순전할수록 삶에서 모순적인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경험주의의 대부 존 로크가 스콜라 철학의 수사들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기가 막히게 유연한 수사적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감각과 사실("팩트"), 생존을 위한 노동 및 물질적인 재화 등에 대한 깊은 존중심이 있고 질서, 체계, 의견, 문체, 수사 등은 그 대립항으로서 배격된다. 그러나 감각과 사실에의 집중만으로는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나오는 판단에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없다. 한편으로는 "82달러에서 2만달러까지" 사실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야만성"과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애초에 사실만이 중요하고 사실만을 써야한다는 가치판단 자체가 순수한 경험으로 해소될 수 없는 '의견'의 산물이다. 그가 아무리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가 사실을 고집할수록 그의 사고와 언어에는 필연적으로 의견이 비집고 들어간다; 의견 또는 특정한 방향의 서사적 종합이 없다면 사실을 구축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김훈은 사실의 토대 위에 정의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편적 사실들의 집적물에서 정의를 끌어낸다는 건 본래 불가능하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보고 겪은 '순수한 사실들'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정의를 끌어와 설정해야 한다. '순수한 사실의 토대'에 집착하면 더 집착할수록 우리의 귀는 이데올로기의 바람에 더 힘차게 팔랑거리곤 한다. 우리는 김훈이 결론으로서 내놓는 정의를 바라보는 대신 그가 도대체 무엇을, 누구의 삶을 '순수한 사실'로 간주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김훈의 경우에는 사실로 환원될 수 없는 그 근본적인 태도가 미학으로 나타난다. 그의 근본에는 단순한 경험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경험주의적 미학이 있다; 그가 사실을 고집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사실로 환원될 수 없는 특정한 미학적 논리의 표출이다.


김훈이 <난중일기>의 언어, 군인의 언어에 매혹된 까닭은 무엇인가. 문장의 간명한 구조가 거론된다. 문장이 간명한 것은 하나의 이유에 불과하다. 그가 <난중일기>에서 본 것은 단순한 언어적 논리만이 아니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군율과 죽음이다. 한편에는 죽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죽음을 강제하는 권력이 있다. 삶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 먹고 사는 경험에 매달리는 이에게 삶의 가장 확실한 체험이자 경계선으로서의 죽음만큼 인상적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한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권력만큼이나, 그 힘을 체현하는 삶만큼이나 중요한 존재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경험에 대한 이끌림은 삶의 테두리로서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삶을 종결짓는 권력에 대한 이끌림으로 이어진다. 그 권력을 다시금 하나의 삶으로 체현한 존재가 김훈에게는 군인으로서의 이순신이다. 아마 그가 고대 서구에 살았다면 자식의 생살여탈권을 지닌 가부장에 대해 썼을 것이다(나는 잠시 김훈과 하이데거, 그리고 아감벤이라는 연결망을 상상한다). 그런 면에서 <칼의 노래>는 오늘날의 한국에 실종된 가부장을 재구축하는 문학적 표현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경험주의적 미학이 가부장에 대한 동일시로 옮겨간다.


김훈이 가부장에 대해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최근 인구에 회자되었던 세월호 및 자본주의에 대한 언급에도 잘 드러난다. 세월호를 떠올리면서 그가 선장과 (자살한) 교감이라는 '아버지들'을 고민하는 것, 지배권력의 복잡한 양태들 중 (가부장으로서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유달리 언급하는 것은 그의 근본적인 미학 및 그 미학이 집중된 대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19세기 전반의 영국으로 치면, 그는 자유주의자(휘그)가 싫지만 동시에 사회주의자도 될 수 없는, 전통적인 삶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토리)에 가까워보인다. 통상적으로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로 유명했지만 2010년대 한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어느새 보수주의로, 가부장에의 희구로 빠져든다. 김훈의 독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의 "유물론"이,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 맘에 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그 끝에 가부장 또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권력에 대한 은밀한 향수와 이끌림이 있다. 그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Trackbacks 0 : Comments 2
  1. pt 2016.10.04 13:12 Modify/Delete Reply

    와, 잘 읽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문을 쓰려고 하는데 귀중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아 기쁘네요. 김학준님의 일베 연구 논문 검색하다가 우연히 여기에 들어왔는데, 괜찮으시다면 종종 들러서 이런저런 글들 읽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BeGray 2016.10.15 02:11 신고 Modify/Delete

      아 한동안 블로그 관리할 정신이 없어서 답변이 늦었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블로그 오시는 거야, 여기는 열린(?) 공간이니까요 ㅎㅎㅎ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