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인문학은 교양 앞에서 평등한가"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4. 10. 14. 23:10

"과학과 인문학은 교양 앞에서 평등한가" / 김상욱

원문링크: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41014.22030201634


이하 나의 코멘트.






내가 이 글을 읽은 페이스북 페이지에 리플로 단 코멘트. 귀찮아서 토씨 수정 안 하고 옮긴다.


"이 글에서 제일 마음에 안드는 건 수많은 학문들을 '인문학'으로 퉁쳐버리는 단순함입니다. 철학이랑 과학을 대척점으로 놓고 틀을 닫아버리면, 예를 들어 바로 그 철학과 과학 양자를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은 뭐가 되는지. 자연과학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은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 중 자기들이 비난하는 '인문학'이란 덩어리를 사려깊게 이해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서는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회의적이 되네요. 덧붙이면 저는 이 글의 필자가 '교양'bildung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지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교양지식에서 과학의 비중이 적어서 불만이라면, 저는 오늘날 교양이나 인문은 아무나 어떠한 성찰없이도 마음껏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게 불만입니다."



조금 파편적으로, 그러나 디테일하게 적어 보자.



- 단순히 한국사회의 '상식'(필자가 '교양'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사실 상식으로 옮기는 게 더 뉘앙스가 맞을 것 같다) 중 자연과학적 지식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주장이라면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해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상식 자체가 부족하며, 이른바 (자연과학적 지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교양 지식 자체를 축적하는 기회가 현저히 적다는 것을 문제삼는 쪽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서울대에서 2008년부터 복수전공/부전공 의무화를 시행한 것처럼, 안 그래도 부족한 교양교육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지 않은 채로 자연과학적 지식의 축적량이 인문쪽 지식보다 상대적으로 모자라다는 이야기만 한다면 문제의 핵심을 전혀 짚지 못하는 거다. 교양/상식이라는 파이 자체가 쪼그라드는데 그 안의 자연과학쪽 지식이 쪼그라드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인문 비중이 너무 높다고 프레임을 짜버리면 애초에 전문화된/개인의 경제적 생활에만 관련된 지식이 교양지식 자체를 먹어들어가는 진짜 문제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도를 볼 때마다 자연과학이니 인문사회학이니를 따지기 전 차라리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시선, 또 제도/비제도가 끼치는 영향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가르치는 쪽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 내가 모든 사람이 배워야한다고 생각하는 학문 중 하나인 논리학은 인문도 자연도 독점적인 영유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 인문 전공자 입장에서 이 글이 정말 이상하게 읽히는 건 애초에 '교양'이라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양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말해보자면, 교양교육이 교육의 중심초점으로 등장하는 건 근대 서유럽을 기준으로 할 때 대략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다. 도식화해서 설명해보면 이전까지 주어진 신분에 맞춰 자기 할 일 및 그에 따른 지식만 챙기면 됐는데 사회구조 자체가 바뀌면서 (자본가 및 공무원 등의) '능력있는' 사람이 새롭게 사회를 이끄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즉 기존의 신분에 따른 교육이 성립할 수 없게 되면서, 이런 부르주아 계급(본래 부르주아는 성/도시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며 자본가와는 조금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을 위한 고등교육이 필요해지게 된다. 19세기 독일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교양교육의 이념이 바로 새로운 교육을 위한 이념이고, 이때 교양은 그걸 특정한 한 가지 분야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종합적이고 완성된 인간을 '형성'bildung한다는 의미에서 나왔다. 헤겔이나 빌헬름 폰 훔볼트, 슐라이어마허 같은 사람들이 이런 교양교육의 이념을 이끄는 사람이고(19세기 중후반 정도까지 영국대학은 엄청 후졌다...가 동시대인들의 평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때 에콜 폴리테크닉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전반적인 대학교육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대학 바깥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말해보면 (프랑코 모레티를 따른다면)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최초의 완성형으로 간주되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쓴 괴테가 앞의 사람들보다 조금 먼저 태어난 동시대인.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적어도 사회/국민/교양/문화와 같은 개념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그러니까 근대사회에서 문학이나 예술이 교양의 다수를 점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렵다. 애초에 대중문화가 자연과학적 지식을 직접적으로 포괄하는 경우는 진화론 정도를 제외하곤 잘 모르겠다(지동설 논쟁 때 교양과 결부되는 사회집단이 있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19세기 교양교육의 이념을 형성한 사람들 이래로 '근대적 교육과정'에서 예술이나 종교, 철학, 역사와 달리 자연과학 중 어디까지고 교양지식이고 어디부터 전문지식인지는 판정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예컨대 진화론적 주장이 종교/철학적 논의를 위해 2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배경지식으로 간주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자체가 인간을 성숙한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려면 좀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처럼 학문분과체제가 지독하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교양과목을 인문쪽 전공자들이 전담해서 가르치는 상황은 그런 점에서 근대인들이 교양교육이라고 생각한 게 어떤 영역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화석 같다고 보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용된 글의 4~6번 같이 막 던지는 얘기에는 전혀 동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렇게 엉성한 '교양론'이 나오는 것 자체가 오늘날 교양의 지위가 얼마나 쇠퇴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일지도.


 정리하면, 7번 주장에서처럼 교양교육에서 과학과 인문사회학의 평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교양교육의 이념 자체로부터 시작하는 조금 더 복잡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는 어렵다. 막말로 골수 인문주의자(...)들이 19세기 교양의 이념 갖고와서 "교양교육에서 자연과학이 인문이랑 평등해야한다는 이야기부터가 헛소리다"라고 해버리면 이 글의 필자가 뭐라고 반론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교양이지만, '열역학 제2법칙'은 교양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리학자가 보기에 이 두 질문의 중요도는 비슷하다"; 이럴 때 정통적인 교양인은 "물리학자는 전문가지 교양인이 아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한국사회 전반의 평균적인 숙달도가 떨어진다는데 동의하는 나조차도 필자 식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하고픈 마음이 안 든다. "사람들이 자연과학 분야의 최근 상식에 너무 뒤떨어져 있다" "그런 쪽도 좀 일반상식이 되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정도로 이야기했다면 그냥 좋아요 누르고 지나갔을텐데 엉뚱하게 교양이랑 인문학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는 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 4~7처럼 논증을 위한 최소한의 분석조차도 안 되는 글을 파헤치면 일시적인 쾌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별로 생산적일 것 같지 않다. 이미 이 글의 논제를 '상식적으로' 알아서 잘 이해하는 길은 적었으니 조금 더 쓸모있는 논의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자. 교양교육, 또는 한 사회에서 '인간을 성숙한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라 간주하는 활동을 구성하는 지식은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은 결국 국가/사회/문화와 같은 층위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링크한 본문에서 제기된 "왜 셰익스피어는 교양이고 열역학 제2법칙은 아니냐"는 의문에는 두 가지 방향으로 답변가능하다. 1) 우리는 국가-문화의 차원에서 '셰익스피어'가 함축하는 서양근대문화 텍스트들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내용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는 서양근대문화 및 그것이 포함된 문화적 요소를 전적으로 결여한 이와 마주쳤을 때 그와 사회적 교류를 하고 그와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어려울 수 있음을 뜻한다. 2) 우리는 (일부 자연과학계열 학자/기술자를 제외하고) 엔트로피에 관한 법칙들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필연적인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당 법칙이 기술적으로 적용된 도구가 우리 삶에 필수적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해당 법칙에 무지한 채로 그 도구를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해당 법칙을 모른다고 해서 그와 사회적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역시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드물다.


 바로 이 정체성의 형성을 둘러싼 교육/문화의 역할 때문에 (교양교육에 불만을 가진 자연과학의 '지지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서구, 특히 미국에서는 문학정전의 편성 및 국민문화의 범주를 둘러싸고 수십 년 간 엄청난 격돌이 있었다. 영문학이 다른 국민문학분과와 비교해서 이론적으로 엄청나게 확장되는 게 바로 이 정전canon을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말 및 2000년대에 조금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듯 싶다가 어느새 대중의 시야에서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교양교육과 정체성 형성 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안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공론화되지도 못한 채로 묻혀버렸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와 함께 자본 및 국가가 "기업이 즉시 활용가능한 인간자원"을 대대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게 교양의 재구축을 위한 논의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교양교육의 커리큘럼에 대한 반성 및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마치 회계를 졸업필수로 넣은 모 대학처럼) 이른바 '실용적인' 지식들이 교양교육을 대체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링크한 글과 같이 자연과학적 지식의 비중을 높이자는 주장은 이런 면에서 자칫하다간 교양을 밀어내고 (전문화되고 또 종합적 지식과 무관한) 실용지식을 늘리자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무반성적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앞서 이 글이 인문학에 대한 당황스러울 정도의 무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교육의 문제에서 이야기한다면, 이런 주장은 한국사회의 제도/비제도적 교육을 구성해온 역사적 맥락에 대한 반성이 없을 때 너무나 쉽게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퇴락할 위험이 있다. 인문 만이 아니라 교육을 만만하게 보는 게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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