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학문하기" 기사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4. 10. 11. 03:22

먼저 "서화숙 칼럼: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기사를 링크한다. 짧고 쉬우면서도 생각해볼만한 글이다.

: http://media.daum.net/editorial/all/newsview?newsid=20141008101714312


이하는 나의 코멘트.



: 필자는 자연과학 분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내 생각에 이 코멘트는 인문사회분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치명적으로 작동한다. 특히나 외국어 '원전'의 권위가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필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처음부터 외국어가 자연스럽고 편한 소수--물론 그런 경우는 대체로 한국어로 추상적인 사고를 섬세하게 진행할 때 약점을 드러내곤 하지만--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텍스트와 마주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학부를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직업이 지식과 사유를 정말 깊게, 많이 축적하기를 요구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직업적 학자/연구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작업한다는 것은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 모두에서 처음부터 과도한 페널티를 부여라는 조건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하나의 텍스트를 읽고 그럭저럭 무난한 글을 써내는 경우처럼 독서의 질적/양적 요구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는 크게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경우는 어떨까? 우리는 개념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일을 그것을 다루는 작업과 등치시키곤 하는데,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개념을 다룬다는 것은 개념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논리들을, 그 뼈대만이 아니라 근육과 힘줄, 필요하다면 혈관까지 살피고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쳐내고 재조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해 개념을 다루는 작업의 정수는 개념을 조작하고 그것의 동적인 성격을 꿰뚫어보는 일, 개념을 동역학적으로 파악함으로서 그것을 전진시키고 그로부터 새로운 개념을 배태하는 데 있지, 핀으로 꽂아놓은 표본마냥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내용을 잘 암기숙지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개념을 자습서의 설명마냥 기계적으로 외우고 적용하면서 단지 주류적인 해석과 어긋나지 않음을 유일한 지적인 작업으로 간주하는 것, 내 이해가 어느 해설서의 설명과 들어맞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의 미소를 짓는 것은 우리의 지적 열등함을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다.


 당연하지만 개념의 참된 이해, 개념을 자유롭게 그러나 엄밀하게 사고하고 그에 비판적 성찰을 가하는 것은 특히나 인문학의 경우 개념적 사유를 구성하는 도구, 즉 언어적 숙달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비교하자면 소설가들, 시인들이 언어를 조탁하는 데 필요한 숙달도 이상의 섬세함과 철저한 이해가 개념적 사유에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이 칼럼의 필자가 언급하는 것처럼 외국어,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들을 읽는 작업이 자신에게 보다 익숙하고 자기가 잘 다룰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의 훈련을 대체해버린 이들에게 개념적 사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적 숙달이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지금까지의 한국 인문학계를 본다면,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이 장벽을 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 노력이나 자질의 문제가 아님은 몇몇 사례로 충분하다. 아도르노는 미국 망명시절에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사고할 때의 어려움을 누차 토로했으며, 하버마스는 자신의 주저를 쓰면서 (그 번역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밝히면서도) 영어 텍스트의 독일어본을 인용했다. 파울 틸리히의 학문이 미국을 통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자신의 사유를 영어로 표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단순화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닐 것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관계가 이럴진대, 결코 독일어보다 영어에 가까울 수가 없는 한국어는 어떨까?


 물론 외국어 텍스트의 축적이 일정량 이상 진행되면 머릿속에서 한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로 사고하는 체계가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성된 외국어가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를 통해 이미 달성된 사유수준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본인의 한국어 사유수준이 얼마나 조악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예외적인 재능이나 노력을 제외한다면--그리고 당연히 모든 학자들에게 이런 예외를 요구할 수는 없다...나 자신도 둘 다 갖추지 못했다--자국어를 통한 사유의 축적 및 그 수준을 후천적으로 습득한 외국어가 따라잡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나는 여기에 다음의 경험에 입각한 가설을 덧붙이고 싶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추상적인 사고는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한 언어를 일정 수준 이상 정련할 때만 도달가능하다. 뒤집어 말한다면, 한국어로 해당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어를 통한 사유의 단련이 전자를 대체할 때 양자에 들인 노력은 그 단순한 합으로 계산될 수 없다. 비유컨대 고차원적 사유를 위해 3만큼의 훈련이 필요하다면, 한국어로 2를 쌓은 상태에서 외국어로 1을 더해봐야 그것은 대체로 2+1(운이 좋다면 2+1이 언어의 이질성에 대한 감각을 길러줄 수는 있다)에 머물 뿐 3이라는 단일한 값으로 통일되지는 않는다. 둘째, 애초에 하나의 언어를 통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다른 언어의 수련을 통해서도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고차원적인 사고로 갈수록 그렇다.


 (질적인 상승과 양적 축적은 본래 분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양적인 축적의 차원에서도 말해보자. 직접적으로 말해 텍스트에 대한 동일한 이해수준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서 한국어를 기초로 사고가 형성된 사람이 한국어 텍스트와 영어 텍스트를 읽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 두 권의 경우는 크게 영향이 없겠지만, 100권, 1000권 식으로 그 축적의 크기가 늘어날 때, 또는 100일, 1년, 10년간의 기간을 정한다고 할 때, 냉정하게 말해 머릿속에 저장되는 데이터의 양 혹은 해당 양을 축적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다지 깊은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 텍스트들은 크게 상관이 없겠지만, 해당 텍스트들이 사유를 촉발하는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단위시간당 수용가능한 양의 차이는 현저할 수밖에 없다. 직설적으로 말해 누군가의 독서량에서 자국어 텍스트 비중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가 본래 수용할 수 있었던 이상적인 양에 비해 모자란 값을 얻게 된다.


 양적 축적이 모자랄 때 연구자는 어떤 타격을 받는가? 특히나 인문학적 영역에서처럼 기본적으로 문헌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경우, 다시 말해 텍스트의 양적인 축적이 갖는 절대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가 근본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설 수밖에 없음은 분명하다. 기본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두 가지 불리함을 덧붙일 수 있다. 먼저 질적인 상승은 양적인 축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적인 축적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질적인 상승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자리잡는다. 둘째, 특히나 역사적인 안목을 갖고 작업하는 이들은--나는 그리고 거의 모든 인문학 영역에서 역사적인 안목이 갖는 강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개별 텍스트들을 배치하기 위한 전체적인 지도/시야를 머릿속에서 함께 구축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지도의 형성은 자료의 절대적인 축적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이는 앞서 말한 인문학의 문헌학적 성격에도 연결이 된다). 바꿔 말해 절대적인 축적량의 부족은 시야를 더 좁고 성기게 만들어 역사적인 사고의 형성 자체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물론 나는, 나 자신이 외국어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외국어 텍스트 읽기를 한국어 텍스트 읽기로 전부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심지어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언어적 섬세함'이 거의 요구되지 않을 것 같은 텍스트조차도 번역으로 읽을 때와 영어로 읽을 때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며, 이러한 차이는 번역서를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보충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자연스러운 복수언어 습득자--이는 한국에서 특정한 문화적/경제적 계급을 요구하므로 모두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를 제외한다면, 인문학 연구자들은 먼저 자국어를 일정 수준 이상 활용하여 기본적인 추상레벨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훈련 없이는 개념적 사유 자체에 도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둘째, 외국어 텍스트에 대한 언어적 섬세함이 일정 수준 이상 요구되는 분야를 제외한다면, 번역 텍스트에 대한 참조 및 그를 통한 지식의 축적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어디에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원전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결국 읽지 않는--아마 이 문제는 수많은 외국어문헌 연구자들에게 공통된 사실일 것이다--쪽보다는 번역으로라도 읽어두는 게 당연히 힘이 된다. 양적인 축적 및 그를 통한 전체적인 시야의 획득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실용적인' 태도에 서서 사고해야만 한다. 물론 특히나 외국어 문학분과처럼 외국어 텍스트의 독해 자체가 일정한 가치를 지니는 분야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인문학자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비판적) 사유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근본적인 기능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차적인 기능은 사유이며, 그 위에서 다른 특화된 분야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순서는 뒤바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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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벨 2014.10.19 15:56 Modify/Delete Reply

    요지와는 조금 떨어진 이야기지만기사 날짜나 이 게시물이 올라온 날짜를 보면 올해 기사가 맞는 것 같은데 2008년 수상자들을 언급했네요. 올해도 물리학상을 받은 세명이 모두 일본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들이긴 하지만요.
    저는 일본에서 박사과정 중인 물리학과 학생인데 모국어로 학문을 하는 것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일반인에게 설명하는 것에도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비전공자들의 관심이 한국보다 높아 보이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진입 장벽이 조금이라도 낮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BeGray 2014.10.19 17:13 신고 Modify/Delete

      네, 말씀하신 내용에 동감합니다. 특히 물리학 이상으로 비전공자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 인문쪽에서는 더더욱요...과도하게 진입장벽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대중적 인문학 열풍처럼) 지나친 수준저하를 감수하지 않으려면 모국어로 학술적인 작업들을 하는 게 더 필요해 보입니다.

      이전에 위키피디아를 갖고 유사한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여유 되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http://begray.tistory.com/10

  2. Л 2014.10.29 08:41 신고 Modify/Delete Reply

    다시 읽어도 참 좋은 글이네요! 아래를 인용하며 다시 공부하러... ㅎㅎ

    "우리가 개념을 자습서의 설명마냥 기계적으로 외우고 적용하면서 단지 주류적인 해석과 어긋나지 않음을 유일한 지적인 작업으로 간주하는 것, 내 이해가 어느 해설서의 설명과 들어맞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의 미소를 짓는 것은 우리의 지적 열등함을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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