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전제정치화,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

Critique 2014. 10. 6. 05:00

"친박 인명사전 2편 공개" 기사 링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0641


이하는 이 기사로부터 촉발된 코멘트.






이런 사전까지 만들어지는 나라라니...두 번이나 만들어질 정도라는 게 더 황당하다. 우리는 '염치가 없다'는 표현의 한 용례로 2013년부터의 대한민국 정부 조직을 사전에 추가해도 될 것이다.


 나는 어차피 현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한 말을 믿지도 않았지만, 아마 대통령 본인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깊이 신경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현 대통령에 대해 비난할 때 사고와 언행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에 기초해 말하곤 한다. 그러나 애초에 자신의 언행에 일관성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비난으로 느껴지지도 않을 터이다(그가 유일하게 일관성을 보여준 영역이 있다면, 아버지 및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나 기분 나쁘니까 욕하지 마"라는 칭얼거림 정도다). 행정부의 중심으로서 주권자, 대통령의 자리는 타인에게 한 말을 지키고 자신의 말에 공적인 신뢰 및 덕성을 부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유감스럽게도 현 대통령은, 나는 이때 개인이 아닌 공적인 주체로서 그를 호명하는데, 자신이 (아마 그가 대통령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을) 전제군주가 아니라 대통령임을, 그래서 자신의 권력유지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갈등조정에 대한 책임을 의무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는 듯 하다.



1.


 상황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네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1) 대중 민주주의의 주권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으며 2)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닌 전제군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행동하는 그를 견제할 방법이 일시적으로나마 부재하고 3)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이 아닌 전제군주에게 통치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적지 않게 구성되어 있으며 4) 현 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하고 다른 사회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대안 정치주체가 부재하다(그리고 이는 대안의 탈을 쓴 또 다른 전제군주를 초래할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 네 가지 측면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 풍경이 체제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개별적인 덕성의 영역에서까지 심각하게 퇴락해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 서구 근대에서 오늘날의 한국 정치를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사례를 꼽는다면 바로크 비애극을 포함한 16-17세기의 궁정극일 것이다; 궁정이 세계 자체의 부패와 타락을 보여주고, 갖가지 어리석음과 음모가 뒤엉켜 모든 이들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만약 벤야민이 연구했던 바로크식 궁정비극을 빗대어 오늘날의 조건을 생각하는 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뜻한다. 90년대 문민정부와 그를 뒤이은 신자유주의 정부의 공식적인 슬로건, 곧 보다 작은 정부, 사적인 영역에 개입하지 않는 정부--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자포자기적 표현을 상기하자--의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공적인 영역이 사적인 혹은 시민사회적인 삶에 침투하고 그것을 지배할 가능성이 기술적 발전과 함께 오히려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군사정권 하의 통치가 명시적인 억압과 그에 반발/대항하는 세력들의 갈등구도였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부의 통치전술은 대항세력 자체의 기초를 합법적으로 파괴한다. 결과적으로 파편화, 원자화, 개인화, 그 무엇이 되었든 '혼자'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은 공적 권력의 침투에 맞서기 위해 의지할 보루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 공적인 영역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결과적으로 누가 집권하느냐, 그리고 집권자가 어떤 덕성/역량을 갖추었느냐에 따라 사회 전체의 지반이 영향받는 상황이 다시 등장했다; 이것이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궁정의 몰락을 다룬 작품들이 오늘날 갑자기 현재적인 것으로 돌아오는 이유이다.


 이런 조건에서 공적인 정치, 국가,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적 영역을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17-18세기의 서구 근대를 끌어와 도식적으로 비교한다면, 주권자 및 주권자가 기거하는 궁정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주권자가 국가-이성raison d'etat에 요구되는 덕목을 보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정치적 삶의 원리인 이성을 다른 곳에 정초하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은 '이성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재구축하는 흐름을 이론적으로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주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공론장의 구조변동>이 공적인 것public의 의미변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 기초한다). 한국의 담론장에서 보다 인기를 끌었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조소조차도 옛 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곳곳에서 하버마스와 공론장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정치적 이성을 타락한 공적인 영역이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 재구축해야 한다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부르주아 공론장의 한 표현형이 대의제에 기초한 의회였다면, 오늘날 한국의 조건은 좀 더 어두워보인다. 17세기의 맥락에서, 물론 여기에 대한 진술은 내 지적 범위를 초과하는 부분인데, 의회가 왕을 견제할 귀족연합 또는 부르주아들이 새로운 이성을 담아내는 덕성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특히나 영국의 맥락에서 공화주의와 덕성의 주제를 생각해보자--오늘날 한국에서는 애초에 의회 자체가 이미 타락하고 덕성을 상실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사진행 중에 '야한 사진'을 찾아보고, 자신의 임금을 올리기에 급급하며 갖가지 음모를 통해 시민들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국회의원의 이미지는 그 실제가 어떻든 간에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공론장이 단순히 형성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매개를 찾아야만 한다면, 의회는 이미 신뢰받는 수단이 아니다.


 일베와 같은 사이버공간이 자폐적인 성격을 띤다는 박가분의 지적이나 (공적영역에 들어갈 수 없는 오타쿠들의 정치적 의사를 포괄하는) '일반의지'를 다시 끌고 오는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은 사적인 의사표현의 집결이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지 못하는 정황을 반영한다. 이는 다시금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근본적인 성격을 떠올리게 한다. 곧 한편으로 국가정부를 포함한 공적 기구로 권력이 집중됨과 동시에, 이 집중된 권력을 비교적 소수의 지배세력이 전유하며 권력의 배분 자체를 거부한다는 데서 20세기 후반부부터 등장한 새로운 정치의 독특함 및 그것이 과거의 전제군주정을 닮은 면모를 찾을 수 있다(물론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기술적인 면모를 제외하고도 두 가지 점에서 후자보다 우월하다. 형식적으로 전자는 대중민주주의에 기초해 있으며, 따라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침투의 측면에서 과거의 전제정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다. 둘째로, 과거의 전제정이 시장을 포함한 경제적 영역에 무력함을 노출했다면, 오늘날의 정부는 경제적인 영역에 대한 포괄적인 개입을 통해 시민사회의 물질적 기초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요컨대 오늘날 각종 공동체의 정치/문화적 무기력과 자폐적인 좌절감, 우울과 분노는 부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지배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


 근본적으로 외부로부터의 견제가능성이 없고 이에 따라 덕성/역량의 쇠퇴가 어떠한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는--박근혜 정부의 인사정책은 악몽과 같은 '적임자 없음'의 거의 환유적인 연속이라는 점에서 진실로 악무한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한국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은 다음과 같은 선택지들 내에서 진행될 것이다. 1) 가장 흔한 반응으로 그들이 교육받아온 대로 현재와 같이 지배자들의 의사에 복종하는 경제적 인간=동물로서의 삶을 연장하는 것 2) 자신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공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권력의 일원이 되는 삶, 곧 새로운 극우파적 행동양식. 이 두 가지가 전형적인 우파적 대응이라면, 다음 셋은 중도파부터 좌파까지의 대응양식을 보여준다. 3) 자유민주주의적 통치의 규칙 하에서 정부를 개혁하고 덕성을 재도입하는 것--안철수의 실패한 시도가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여전히 가장 유력한 길 중 하나다-- 4) 애초에 공적인 영역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규범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 것--경제적인 형식으로서 협동조합의 등장과 (적어도 지금까지의) 번성은 암묵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보여준다-- 5) 정치체 및 사회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재구축하는 것; 이는 지젝과 바디우를 포함한 '공산주의적 이념'이 그 물질적 토대를 결여한 채로도 한국사회에 다시 들어오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는 3번과 같은 입장을 사민주의의 이미 실패한 기획에 머무는 미련한 짓으로 간주한다.


 다만 4는 3과 5 어느 쪽으로든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4가 순수히 사적인 삶으로서의 경제/문화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면 3번과 같은 자유주의-사민주의 기획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우파적으로 전용될 경우 1로 이어진다), 자신의 경제적인 성격을 정치경제적인 것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면 5번의 구체적인 표현형이 될 수 있다(우파에서는 2와 연결될 수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유지시키고자 하는 경쟁적인 시장 자본주의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대안을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대응은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사고를 대략적으로 정리해본다면, 오늘날의 정치적 난국을 돌파하려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반드시 검토해야만 한다. 1) 사적인 요구를 공적인 의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공동체의 재구축 2) 공동체의 의제를 공적인 권력-실천으로 매개시키는 메커니즘 3) 2번과 연결된 문제로, 현재 권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는 지배세력을 견제하고 또 그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며 최종적으로 권력의 독점구조 자체를 무너트리는 것 4) 1~3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인 생활의 토대로서 경제적인 삶의 양식mode 5) 가장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배제할 수 없는 문제로 공적인 덕성/역량을 함양하는 것; 우리는 대중정치를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가 덕성을 압살함과 동시에 거의 그 반작용에 가깝게 대중정치에서 공적인 덕성을 전시display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 신자유주의는 대중정치를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민주정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현재의 정부가 무반성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시장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함께 계속해서 현재의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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