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적인 것'에의 수요: 한 '취재후기'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4. 9. 28. 21:29

이하의 글은 링크된 글 "<언론이 말하지 않은 대학 축제 의상 논란의 10가지 디테일>의 진짜 취재후기"(https://www.facebook.com/eunha.park.9406/posts/635680006544335)에 대한 코멘트.






필자 박은하 기자의 글 중 이 글은 공유(펌)이 없다. 모두가 '개인적인 취재후기'라고 생각하고 그냥 재밌게 읽고 넘어간 결과일텐데, 나는 이 글에서 조금 더 중요한 문제를 짧게 언급하고 싶다; 필자가 얼마나 그 논점을 의도했는가와는 별개로 말이다. 아래는 같은 필자의 글을 읽었다는 전제로 적는다(http://slownews.kr/30878).


 전에 어떤 일 때문에 필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이 분과 얼굴보고 이야기한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였다ㅋ). 그때 나는 신문에서 포털로, 소설에서 웹툰으로 대중문화의 공간 및 그 대표적인 예술의 위상이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내 관찰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 적이 있다. 지난 10여년 간 한국의 대중사회에서 급속도로 사라진 것 중 하나가 일정 수준 이상의 비평적 코멘트였고, 지금 웹툰을 포함해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이 폭증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분류하고 선정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다시 요청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로서 '비평적인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나는 이 주장 혹은 예측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며, 대중사회 곳곳에서, 심지어 극우파 집단에서도 나타나는 '인문학'으로의 회귀는 단순히 상업자본주의의 새로운 영역 이상의 차원에서 분별력 또는 비평적 사고의 재도입이라는 측면을 갖는다고까지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지식/예술 너머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맥락화하고 (어떤 기준으로든) 가치매기는 작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맥락을 참고한다면, 0번 항목에서 필자가 지나치듯 제기한 질문, 곧 "이 컨텐츠에 무슨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비평적인 개입comment이었다고 말이다. 자신의 글에 대해 메타적인 층위에서 풀어내는--사실 이는 오늘날 보기드문 사례인데--대목에서 필자는 자신이 팩트와 의견을 분리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읽는 이들은, 심지어 글의 부분들을 종합적으로 연계짓는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포함해, 1번부터 10번까지를 나름대로 하나의 서사를 갖춘 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개별적인 '팩트'들만큼이나 글 전체의 서사 혹은 암묵적인 논리를 수용한다.


 실제로 글을 보면, 1번부터 4번까지는 단순한 팩트가 아니라 5-6의 (1-4의 상황이 나타나는 맥락으로서의) 현상진단과 7-10의 숙대 총학생회 결정에 대한 옹호를 위한 최초의 정보제시에 가깝게 읽힌다. 실제로 1-4만 순서대로 읽어도 '사실들'이 일종의 논리적 흐름을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맞춰 제시된다는 건 분명하다; 1-4를 읽으면서 오히려 특정한 의견을 갖지 않게 된다면 그쪽이 예외적인 독자일 것이다. 논술로 치면 최초의 떡밥문장과 비슷하달까. 그리고 나아가 이 글 전체는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특정한 종합적인 이해를 암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이자.


 필자가 어떤 의식적인 의도를 담든 담지 않았든 그건 여기서 이 글이 만들어내는 효과=서사(주장)의 차원에서 보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요점은 이 글이 단순한 사실제시가 아니라 사태의 맥락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종합적인 상황을 제시하며, 그 안에서 분명한 의견을 표명하고 또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의견을 갖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 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필자가 독자를 이끄는 지점까지 가본 독자들은 단순하게 숙대의 결정을 비판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물론 최근에 이승환이 이 글을 공유하면서 덧붙인 코멘트는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애초에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읽는 독자들도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슬로우뉴스에 소개된 글은 내가 앞서 다소 막연하고 거칠게 제시한 비평적 개입/논평의 두 가지 요건과 닿아있다. 곧 우리는 특정한 사건과 지식을 포괄하여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형성해야 하며, 더불어 그러한 맥락 안에서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기자'라는 직업에 입각해서 쓴 글들이, 한국에서 통용된, 그리고 또 고정된 기사 글쓰기의 양식에 따라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면, 최초에 페북을 통해서, 그리고 슬로우뉴스를 통해서 대중에게 공개된 글은 두 가지 요구에 정확히 부합한다. 물론 아래의 "진짜 취재후기"의 1번 항목에서 필자는 두 가지 글쓰기 양식 간의 차이를 전혀 다르게 설명하지만, 나는 그게 진짜 요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또는 기본적으로 기자식의 글쓰기를 표본으로 전제한 뒤 다른 글쓰기를 그와의 차이점에 맞추어 설명했기 때문에 충분히 본질적인 해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는 "진짜 취재후기"의 1번의 끄트머리에서 자신의 "이슈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욕구"를 언급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했듯 이 글을 단순히 논쟁참여적인 성격이 보다 솔직하게 드러난 글(2번에서 필자는 그런 관점에 좀 더 적극적으로 입각해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한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개입은 많지만, 내가 제시한 비평적 개입의 두 가지 요건, 곧 사태의 의미를 맥락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그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가치판단을 내리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춘 글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게 예나 지금이나 비평가들은 많지만 제대로 읽을만한 글을 쓰는 비평가는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말해, 물론 개인적인 논평과 조금 더 공적인 성격 사이를 줄타기하듯 오가곤 하지만, 슬로우뉴스에 언급된 글은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킬 탁월함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그게 이 글이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 줄로 말하자면 비평적 개입이 고사한 이 시대에 부분적인 해갈로서 말이다.


 마지막에 던지듯이 말하자면, 솔직히 평소에 슬로우뉴스와 ㅍㅍㅅㅅ에 대해 별 관심없이 살던 사람으로서 필자의 말만 보고 이와 같은 '언론'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기성언론과 보완적 구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데,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만으로 어떤 성공적인 '보완'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결여된 지점들이야 너무 많다보니 '새로운 언론'이 '기성 언론'과 다르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은 적지 않을 것이나, 그게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참여시킨다는 것만으로 성취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참여자의 자유로움보다는 글쓰기, 그리고 오늘날 시대와 사회에 필요한 글쓰기가 어떤 종류의 글쓰기인가에 대한 질문에 기초한 '새로운 언론', '새로운 글쓰기'의 성격규정이 요구된다. 내 답이야 짐작할 수 있다시피 비평적 개입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게 전부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하여간 내 입장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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