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일기. 둔감함. 문학과 불확실성. 파국과 모더니즘.

Comment 2014. 9. 25. 22:45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시간 대비 입력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그냥 전반적으로 지쳐서 그런가...아무튼 간에 요즘 전반적으로 사물과 사태를 충분히 세밀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계속 든다. 복잡한 것을 충분히 복잡하게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보고 있는 기분, 스스로도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상황. 언어 표현도 마찬가지다. 더 세밀하게 써야할 상황에서 자꾸 뭉뚱그리는 둔탁하고 편리한 언어로 후퇴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하면 무난하게 틀리지 않을 수야 있지만, 틀리지 않는 게 전부라면 글을 써서 무얼할까.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의식을 명료하게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야 분명하나 그것조차도 점차 내게서 흐릿해지고 있는 듯하다. 머리와 눈 사이에, 의지와 몸 사이에 안개 같은 얇은 막이 끼어 있고, 그 막을 뚫거나 그걸 감안하고 더 힘을 쏟는 대신 무기력하게 잠들고픈, 정지하고픈, 멈추어 멈춘 상태 자체를 즐기고픈 충동이 내 어깨를 붙든다.



조교로 들어가는 수업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유쌤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문학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이며, 우리가 받는 훈련은 그러한 인내를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살면서 그게 전부일수는 없겠지만, 이런 능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어떤 면에서 정말 헨리 제임스를 읽히는 수업에 값하는 멘트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을 섣불리 해소해버리거나, 그것에 굴복해버리는 것도 아닌 그것을 견디는 능력. 인문학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 뜬구름잡는 소리보다 이런 지나치는 말 하나가 더욱 값지다. 이틀 간 계속 곱씹고 있다. 이 말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거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20세기 초반 서구 모더니즘 텍스트들을 읽다보면 확실히 파국에 임박했다는 종류의 감각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그리고 조이스는 이런 감각이 없는 건 아닌데 뭔가 굉장히 다르게 보는 것 같다...단순히 아일랜드인이라고 쳐버리기엔, 베케트랑 조이스가 같은 것 같지도 않고). 예이츠처럼 거의 대놓고 쓴 사람도 있고, _Women in Love_의 알프스 설원에서의 죽음이라거나, <마의 산>의 요양원, _Wasteland_의 "Unreal City", 베케트는 보통 <고도>가 유명하지만 사실 _Endgame_이야말로 아주 강렬한 열사heat-death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버지니아 울프는 내가 읽은 것 중에서는 _The Waves_가 제일 막막했다. 조금 더 앞쪽으로 가서 콘라드를 보면 _Heart of Darkness_나 _The Secret Agent_가 그렇고. 살짝 뒤의 시점에서 벤야민의 폭력에 대한 글이나(당연히 프랑스의 소렐이 떠오르고) 아도르노의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텍스트가 그런 감각을 보여주고. 나는 그런 종류의 감각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여기는 무척이나 둔감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공간이지만, 그런 둔감함 가운데도 무겁게 내려앉는 어떤 절망적인 분위기, 급작스러운 파국이라기보다는 서서히 발목과 무릎과 허리를 타고 올라와 마침내 목까지 도달한 밀물 한 가운데에 있는 분위기, "망했다"와 같은 감각이 있다. 사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20세기 초반을 연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느낌이 든다(당연하지만 '순수한' 문학연구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시대의 감, 그리고 왜 이 시대가 여기에 도달했는지, 무엇을 왜 해결할 수 없었는지, 어떻게 우리는 파국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 파국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고 사악하게 살 수 있지 않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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