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수. <기업가의 방문>, 또는 대학의 기업화와 권력의 구조에 관하여

Reading 2014. 9. 4. 01:19

노영수. <기업가의 방문: 어느 기업 대학에서 생긴 일>. 후마니타스, 2014.


*본래 1-3을 먼저 썼고, 그 다음 P.S. 를 썼고, 나중에 (본래 추기2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4를 덧붙였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4번이 결국에는 가장 중요하다. 짧은 글은 아니지만 지루함을 참고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1.


 이 책은 노예양성소의 노예들 사이에서 노예되기를 거부한 사람이 겪은 일에 대한 기록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2008년 중반, 박용성의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했다. 박용성 이사장은 기업을 위한 인재양성소와 같은 기치를 걸고 중앙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한다. 신자유주의적 지배 하에서 '개혁'이라는 단어는 (마치 '효율성'이 그러하듯) 마술처럼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마치 키르케의 주술에 걸린 이들처럼--그러니까 돼지로--만들어버리곤 한다. 그 주술에 맞서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즉 개혁이란 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개혁이라는 주술을 한 겹 걷어내고 실질을 본다면, 중앙대는 (기업들을 위한) 노동노예를 길러내는 노예양성기업이 될 것이었다; 즉 노예를 길러내면서도 이익을 보는, 오로지 두산그룹에게만 기가 막히게 도움이 되는 사업인 셈이다.


 어떤 사업이었나? 두산과 박용성은 두 가지 이점을 얻었다. 1) 두산그룹을 포함한 기업들이 적절한 가격에 활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노동노예를 생산, 양성하는 공장. 2) 그 자체로 이윤을 획득하는 장소로 기능할 대학=기업. 이들에게 이러한 이점을 제공하는 대가로 교수들과 학생들은 예쁜 개목걸이를 얻었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들으면 먹이를 주겠다는 것이다. 처음에 후자는 '기업가'를 맞이하면서 기업가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만큼 돈을 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러나 기업가는 먹이가 돈 봉투를 흔들면서 기꺼이 개목걸이를 차고 꼬리를 흔드는 놈들에게만 자기가 기분내킬 때 먹이를 줄 것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거래'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상식인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개목걸이를 차고 기업가의 구두를 열심히 핥던 이들에게는 이미 자유나 인간됨이 아니라 기업가가 흩뿌리는 먹이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아직 인간의 레벨에 있던 이들은 한편으로 어제까지 인간이었던 개들의 이빨에, 뒤이어 기업가가 먹이주머니에서 꺼내 휘두르는 망치에도 정면으로 버텨내야만 했다. 만약 이야기를 좀 더 간단하게 이해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동물과 사기꾼과 인간이 나오는 한 편의 우화를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200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그렇지 아니한 적이 어디 있겠냐마는, 자본과 궈력의 잔혹한 전진은 그것을 모사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을 빛 바래게 만든다...


 책은 무척이나--가치중립적으로 이야기해서--재미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읽기 시작해서 방에 도착해 다 읽을 때까지 씻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책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나 역시 대학교육의 붕괴과정을 직접적으로 목도한 사람으로서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개인적인 연이 되어 읽게 되었고, 이 자리를 빌어 그 연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굳이 내용요약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생략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너무 많다. 자본과 자본에 굴종하는 교수들이 학교와 교육을 말아먹는 방식은 너무나 대범해서 유쾌하기까지 할 정도다. 이게 현실만 아니라면 그냥 재밌게 읽을텐데, 여기에 벌어진 일이 모두 사실이라는 게, 그리고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서울대학교를 비롯해서) 유사한 일이 한국의 고등교육 전반에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일깨워준다는 게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일 것이다.



2.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보니 서두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기업가의 방문>이 갖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충분한 분석이 곁들여지지 않은 다소 투박한 형태로나마 구체적인 사실들이 정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 자체가 저자 개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다보니 사태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심급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는다(교육운동에 대한 저자의 경력을 생각해볼 때 나름의 의도한 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대신 저자가 겪고 기록한 날 것에 가까운 일들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현상을 조금 더 파고들어갈 여지가 있다--그 점에서 이 텍스트는 어줍잖은 소설들에 비해 동시대의 매우 중요한 기록물로 남는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물론 중요한 책은 읽혀야 한다는 나의 입장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노영수는 서두에 '쌍끌이 어선'에서 일한 경험을 배치한다. 배의 선장 혹은 고용주=기업가는 배 위의 생활 및 고용계약 등에서 사실상 지배적인 '갑'의 위치에 선다. 나머지는 모두 '을'이다. 물론 '을' 사이에는 위계서열이 있고, 더 높은 을이 더 낮은 을을 압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갑의 명령에 의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을이 제 아무리 선량한 심성을 품었을지라도 갑이 목걸이를 죄는 한 동료 을을 쪼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

 맑스는 <자본>의 한 서문에서 자신은 개별 자본가의 선의나 악의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자본가를 자본가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구조를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자본가가 아닌 노동노예가 관건으로, 무엇이 노동노예를 노동노예로 만드는가를 보아야 한다. 세 가지 사실을 꼽자. 1) 갑은 을을 대체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얼마든지 갖추고 있다. 전반적인 저성장 기조 및 (정치적 권력과 결탁한) 대자본으로의 이윤집중, 이로 인한 사회하층계급의 소득부족 등으로 인해 노동의 공급과잉이 초래되었고, 이는 자신을 대체할 수많은 후보들과 직면한 을이 '갑질'의 패악에 아무리 고통받아도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2) 을이 연대를 통해 집단적 주체를 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주의화'=원자화 혹은 죄수의 딜레마에 갇혀(개인적 이데올로기의 차원), 다른 한편으로는 갑측의 대 을 전술 및 노조를 결성하는데 장애가 되는 제반 조건에 부닥친다(제도/문화/상황의 차원). 3) '균형자'로서 정치/행정/사법권력이 스스로의 역할을 방기한다. 이른바 "IMF 사태" 및 노무현 정부의 급진 신자유주의화 이후로 고용자의 전제적 권력을 견제해야 할 균형자들, 곧 정치, 행정, 사법 및 여론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 사민주의적 패턴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빈곤층 및 노동피착취자의 증대는 계급투쟁을 통해 정부의 분배기조를 강화시켜야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한국사회의 공적 권력은 지난 10여년 간 지속적으로 우파들이 독점해왔고, 그 결과 고용자=자본가가 수퍼 갑질을 해도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한 마디로,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탐욕스러운--오늘날만큼 사회 각지의 자본가들이 노골적으로 탐욕스럽게 움직이는 때가 있는가?--자본의 권력에 비해, 송사리들은 미약할 뿐만 아니라 단결("떼")도 되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노예들을 상대하는 전술은 꽤나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어졌으니, 약자들이 집단적 세력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각자 고립된 송사리들은 '공정한' 제3세력으로서의 공적권력에 의지하려 하지만, 애초에 자본가들 및 그 추종자들이 공적 권력을 점거한 상황에서 이들의 호소가 씨알이 먹힐 리가 만무하다. 결국 각각의 송사리들은 (마치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듯) 자본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가끔은 다른 송사리가 자본가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해야만 한다(자본가의 이빨에 썰리는 다른 물고기를 보면서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걸 보면, 인간을 사로잡은 자기중심의 이데올로기는 정말로 위대하다!). 무언가 순순히 먹히지 않고 발버둥치는 물고기가 있다면, 이 송사리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사실 그 물고기가 살아남는 편이 자기들의 더 나은 안녕을 보장할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고기를 공격하고 굴복시키고자 한다...


 저자가 쌍끌이 어선에서 겪는 일들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구조다. 그리고 그가 복학한 대학, 두산이 본격적으로 '개조'할 대학, 그래서 기업 대학이라기보다는 대학 기업이란 말이 좀 더 어울리게 될 중앙대는 점차 쌍끌이 어선이 되어 간다. 다시 한번 맑스를 인용하자면, 그가 원숭이의 해부를 위해서 먼저 인간의 해부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노영수의 서술은 바로 그러한 논리에 따라 대학 기업의 현실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먼저 가장 착취적인 어업계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대학은 기업이 되었다. 그곳에서 '국토대장정에 참여하고, 박용성과 악수하고, (두산의 뒷받침을 받는) 총학생회에서 활동하고, 두산그룹에 입사하는 이들', 그러니까 자신이 소비자로서 두산-중앙대가 제공하는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사실 근본적으로 노동노예일 뿐이며 (잘 하면 착취에 좀 더 잘 기여하는 마름이 될 수도 있겠다...물론 먹이를 주는 손은 마름의 목도 언제든 조를 수 있다) 자기가 중간관리자라고 철썩같이 믿는 교수들 또한 전혀 예외는 아니다.


 위의 구도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기업가의 방문>의 본문에 속하는 '중앙대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대학의 기업화/자본의 침투를 신성한 대학의 학문이 침범당하고 모두가 돈을 좇는 세태의 일부 정도로, 그러니까 도덕적 견지에서 속물들을 비난하는 시각에서 바라보곤 한다. 그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은 그러한 나이브한 시선보다 훨씬 무섭다. 중앙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학의 진정한 기업화는 그것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데만 있는 게 아니라 대학 내 권력이 특정위치(중앙대의 경우에 이사장=자본가라면, 서울대의 경우에는 이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 두산회장인 박용현이 국립대학법인 서울대의 이사장 자리에 앉았으니 사태는 비슷해졌다)에 집중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유일한 보스가 있고, 그 보스를 제외한 모두는 언제든 해고가능한 피고용인=노동노예가 된다. 말을 듣지 않는 노동노예는 해고, 처벌, 징계, 손해배상을 건다. 98년 이후 한국의 기업문화가 가파르게 자본가/경영인에의 권력집중을 보여주었다면, 오늘날 한국 대학의 기업화는 그러한 권력집중적 조직문화가 대학 내 다양한 주체들의 행동양식을 먹어치운다는 데 핵심이 있다. 대학이 상업화된다거나, 돈 되는 학문을 제외하고 소외된다거나, (박용성 체제가 보여주듯) 대학본부가 조폭처럼 학생들을 털어먹는다거나 등의 이야기는 사실 이 문제에 비하면 주변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업문화'가 대학 자체를 재구축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우파적 언어에서 '개혁'이라는 용어로 통칭된다. 요점은 '개혁'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다 치워버리기 위해서는 학내 구성원들의 모든 권력/저항권을 박탈하고 그것을 단일한 개혁주체에게 몰아준다는 데 있다(사실 이러한 권력/지배구조의 재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개혁'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해서 어떤 개혁을 이뤄야하는지 통상적으로는 잘 의문시되지 않는데, 보통 동원되는 대의는 대학재정의 확보다. (널리 인용되는 전 하버드 총장의 말을 따라) 교육은 돈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어야 교육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체제가 돈이 잘 벌리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혁은 거의 필연적으로 현재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기업가의 방문>에 나오는 박용성의 정책은 좀 무식하게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이러한 양상을 매우 잘 보여준다. 돈 안 되는 학과는 정리하고, 산업/상업적 활용도가 높은 기술-학문에 투자하며, "기업을 위한 인재양성" 또는 취직율이 핵심적인 지표가 된다. 물론 자본은 대체로 주어진 임무에 헌신하는 말 없는 저가만능로봇을 원하지 비판적 사고능력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역사/인문정신 강조"라는 표어 아래 행해지는 각종 입사시험의 '꼬라지'를 보라--대학은 더 이상 사회비판 혹은 사회개선과 위한 교육을 수행하지 않게 된다. '부작용'으로, 한국의 대자본은 대체로 언제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정부 및 지배적인 권력의 작용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학자들 또한 임면권을 전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대학 내 보스에 의해 축출된다.


 한 줄로 말한다면, 자본의 이윤창출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간주되는 분야 이외의 것들은 모두 고등교육의 공간에서 추방당하거나 잘해야 굴복을 강요받는다. 여기에는 권력에 대한 견제도, (더 많은 자본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민도, 보편적 문제를 위한 사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어떤 것을 위한 자리도 남아있지 않다. 잠시 대학의 역사를 참고한다면, 서구에서 대학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흐름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 하나는 에콜 폴리테크닉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의 인재양성'을 위한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중세 프랑스와 칸트, 훔볼트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국가 및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보편적 이성 및 자기실현 등의 기치를 내걸었다(요즘 보편적 이성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는데, 칸트의 대학론에서 이성이 본래 현실의 다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국가-자본-우파 이데올로그들의 연합, 한 마디로 지배권력의 카르텔이 공고한 장벽을 형성하고 있는 시점에서--사실 새누리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는 지배권력의 연합-작동을 위한 공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한국의 대학은 두 가지 흐름 중 권력에 복무하는 길을 충실히 밟아나가고 있다. "시장에 더 잘 적응한다는 것" "더 경쟁력있고 효율적인 대학"이 되겠다는 슬로건을 건 순간 이들에게는 보편적 이성이 아닌 도구적 이성만이 남는다. 도구가 될 수 없는 것들은 추방당하고, 무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몇 안 되는 보루 중 하나였던 대학은 이렇게 권력의 품으로 기어들어간다.



3.


 마지막으로 권력투쟁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시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예컨대 노조와 사측의 투쟁처럼, 일정기간 이상 길어지는 싸움을 볼 때 우리는 종종 황당한 함정에 빠지곤 한다. 즉 강자가 선심쓰듯이 어떤 조건을 하나 양보하거나, 또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었을 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약자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 정도면 상대도 양보했으니 너도 그만 받아들여"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보수적 심성, 사고를 포기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핵심은 어떠한 약속이, 거래가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양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얻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러한 투쟁의 종료 이후에 "어떠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가에 있다. 요컨대, 사측이 제 아무리 고용보장을 한다고 떠벌려도, 서울대학교 이사회가 다음부터는 제 아무리 공정한 선출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할지라도, 권력의 남용을 제약할 실질적인 방안이 없는 이상 전부 공염불에 불과하다. 정확히 그러한 권력의 무제약적 사용을 방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약자들에게 주어지는지, 다시 말해 권력관계의 구조 자체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보는 게 중요하다.


 아마도 탈무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족과 떨어져 공부 중이던 한 청년이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들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노예에게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겼고, 청년에게는 갖고 싶은 것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조항을 달아놓았다. 이를 본 노예는 신나서 청년에게 달려온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분과 재산을 상실했다는 좌절감으로 실의에 빠진 청년에게 현명한 조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갖고자 하는 것으로 노예를 선택하면, 노예의 재산은 주인의 것에 속하니 네가 모든 것을 다시 가질 수 있지 않느냐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노예가 도망치거나 재산을 챙겨 달아날까봐 교묘한 속임수를 쓴 아버지의 지혜를 올바르게 이해하라고.


 요점은, 노예가 '구체적인 것'들을 아주 많이 챙긴다고 하더라도, 그가 청년의 한 마디에 따라서 언제든 다시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청년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 한)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권력구조에 속해있다는 것, 이러한 권력구조 자체를 손대지 않는 한 노예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과의 직접적인 갈등구도와 무관하게 약자를 위한 삶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모두를 위한 통찰이다.



4. 


 <기업가의 방문>에서 저자가 무언가 승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아주 드물게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학생사회의 저항의 동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법정투쟁'을 통한 결과물들, 요컨대 두산-중앙대가 마치 뗑깡부리듯(우리가 버리는 말 중에 요긴한 쓰임새를 가진 것들이 종종 있는데, 이 단어를 이러한 용례로 쓰는 것이 그러한 요긴한 쓸모의 한 사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던진 징계의 남용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재판결과에서 비롯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연대능력을 상실하고 파편화된 개인들이 집단화=권력의 획득에 도달하기 힘든 오늘날 국가와 같은 공적인 권력에 개인적인 호소를 통해서만 무언가 유효한 판정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산에 대한 불매운동이나 여론을 통한 비판 같은 것들이 유효하게 전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하의 시민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교정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여론-집단행동이 거의 효력을 상실했으며 이제 남은 수단은 사법적인 것에 국한됨을 의미한다...당연히 사법부 또한 지배의 카르텔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오늘날 노동쟁의에 대한 보수적인, 그러니까 지배자들의 권력에 추 하나를 더 올려놓는 판결의 증대는 이러한 수단에 호소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워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두산-중앙대는 재판부의 판결을 가볍게 무시하고 또 다른 징계를 발부한다. 권말에 나오는 "유기정학" "무기정학"과 같은 표현은, 당연히 유기징역, 무기징역과 같은 뉘앙스를 주는데, 특히나 대학이라는 그 자체로 막대한 돈/시간의 투자를 요구하는 인증기관으로부터 쉽게 탈출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조건에서 사적인 제재가 거의 준 공적인 제재처럼 등장하는 사례다. 한 마디로, 오늘날이 약육강식 사회라는 말이 이미 흔한 것이 되었다면, 모리치오 비롤리Maurizio Viroli가 지적한 것처럼(<공화주의>) 한국사회의 강자, 직접적으로 자본가들은 약자들에게 자신의 지배력을 거의 무제약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함께 지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모든 인간이 평등해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금언은 오늘날 수정되어야 하는데, "자본-권력은 인간에게 늑대다"가 조금 더 적절하다; 후자에는 오로지 자본 및 지배권력만이 개인-인간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으며 그 역은 불가능하다는 권력의 불균등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을 교정하는 장치는 이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물론 한국에서 이러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한 적은 거의 없다)


 이러한 권력의 불균등성 하에서는, 비롤리가 강하게 지적했듯 정치적인 평등, 시민적 권리의 정상적인 작동과 같은 것도 불가능하다. 중앙대 공식 커뮤니티가 사실상의 여론검열기구로 작동한다는 사실, 두산-학교의 정책에 반대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막아버리겠다는 직접적인 의사표명을 보라; 한국에서 대학의 전통적인, 그러니까 지금은 거의 소멸되어 가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민주주의 하에서의 시민교육이었다면 (선거/투표는 교육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가의 방문>에서 묘사되는 중앙대는 더 이상 그러한 시민-주체를 형성하는 장소가 아니다; 나는 본문에 쓴 것처럼 "노예양성소"가, 물론 그 학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분나쁠지 모르겠지만, 노영수의 경험을 통해 드러난 두산-중앙대의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노영수의 경험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과 기업의 피고용인이라는 상이한 정체성이 충돌하는, 그래서 후자가 전자를 먹어치워가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우파의 연속되는 집권은 힘의 장kraftfeld에서 심지어 이데올로기 생산 및 유포에서조차 자본가들의 전략이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투표장에 들어서는 순간에까지도 투표권자는 정치적 주체subject라기보다는 자본권력의 종속된 노예subject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자본을 견제하거나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공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란 표현을 그에 함의된 꺼림칙함 때문에 폐기처분하면서 생긴 문제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고/퍼트리고/주입시키고/그에 저항하는 공간들이 정치적 대립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장치dispositif인가를 망각했다는 것이다. 어디서든 이윤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내는 자본가의 코는 정작 이 계기를 놓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좌파들은 이데올로기 투쟁 자체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투쟁 공간=장치 자체를, 그 물질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서 우파들에게 한 수 배울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전술적으로 열등했다. 지금도 이와 같은 탈취는 어디서든 이루어지고 있으며 (적어도 서울대는, 물론 그 자체가 공인된 지배권력의 재생산 장소이기도 하지만, 법인화와 함께 지배권력의 합법적인 개입을 위한 통로가 개방되었다-) 이러한 공간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는 그 공간에서 교육받는 시민주체들의 수만큼 지배권력의 충실한 동조자들, 혹은 (결국에 먹이를 주는 손 자체에 의해 폐기처분될 운명이라도) 자원들을 내어주게 된다는 것도 망각하면 안 된다; 패배의 대가는 가볍지 않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오늘날 교육과 교육의 장치들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아니 더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한국처럼 지배권력의 물질적인 지배가 강고한 공간에서 그것과 물리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외부적 변화가 갑자기 주어지거나 집단적 주체가 재형성되기 전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권력에 대항하고 그 카르텔을 무너트릴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의 형성 및 그를 위한 물질적 공간의 구성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배권력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을 하나만 더 언급하자. <기업가의 방문>은 지배권력의 작동방식을 탐구하는 기록물로서도 요긴하다. 두산-중앙대, 아니 박용성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도 가리지 않으며, 법원의 판정도 자신들이 무시할 수 있는 한 얼마든지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무시무시하다. 이러한 '실용적인' 태도는, 특히나 약자의 입장에서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러한 실용적 태도가 함의하는 보다 중요한 가르침은 전쟁과 투쟁의 공간에서는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 여론의 영역의 구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산-중앙대는 손해배상, 직접적 징계, 여론 형성과 같은 분야들 모두에서 전방위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압박한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자본가는 자본/시장의 영역에서, 국가는 국가의 영역에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움직인다는 사고의 틀을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두산-중앙대는 필요하다면 자본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시민사회적 영역에서도 압력을 넣으며, 정확히 그러한 부분에서도 헤게모니를 획득할 때 자신의 (반항자들에 대한) 승기가 완전해 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 뒤집어 말한다면, 투쟁과 저항의 방식에 "영역 구분" 따위는 없다.


 우리는 자본/국가/시민사회의 근대적 분할을 순진하게 믿고 그것으로 되돌아가자고 외치는 대신 (자본가는 시장으로 돌아가고 대학은 다시 대학 본연의 역할을 하자는--물론 대학 본연의 역할이 무엇인가는 보통 의문시되지 않는다--구호가 바로 이러한 순진함의 전형적인 사례다) 오늘날의 권력이 자본=국가=시민사회(가라타니의 표현을 빌면 "자본=국가=네이션")의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듯이 오늘날의 반격도 저러한 영역을 무너트리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3번 항목에서 지적했듯, 오늘날 기업적 조직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침투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문제로 작동한다. 일단 저 문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해당 조직에서 저항이나 약자의 권리 같은 건 제기하기조차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기업은 기업의 영역으로 돌아가라"가, 자본에 속박된 피고용인과 시민사회의 주체는 분리되었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기업조차도 그 문화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금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도 근본적으로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침해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권리는 기업과 작업장에서도 관철되어야 한다고--당연하지만 "정상적인 기업문화"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로서, 그 한계는 언제나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그것을 거부하는 자본가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조차도 상실할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 기업가가 시민사회의 양성소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대학을 방문했다면, 반격의 지향점은 단순히 중앙대를 탈환화는 것이 아니라 두산을 포함한 한국의 기업들을 역으로 "방문"해주어야 하는 데 있다. 전술은 승리와 승리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필요하지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P.S. 아마 이 책에 내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면 (약간의 시차가 있지만 저자와 나는 거의 같은 시기에 대학생활을 겪었다) 내게 대학생활이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낭만적이었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게 학부시절은 공동체적인 것들이 천천히 고사해가는 과정이었으며, 그러한 비가역적인 과정에 대한 발악의 몸부림이 기억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본적으로 나와 저자의 삶이 매우 달랐던 것도 있겠지만, 내게는 저자와 같은 성격의 투쟁도, 저자와 같은 동료도 없었다. 중앙대가 갑작스런, 거의 단절에 가까운 충격을 맛보았다면, 내가 있던 학교는 그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현재도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중간에 몇 차례 인상적인 투쟁은 있었지만, 어쨌든 성공하지 못했으며 교수사회의 무기력과 학생사회의 자포자기하는 냉소가 그 빈 공간에 남았다.


더불어, <기업가의 방문>에서 학생-교수들에 대한 스케치가 굉장히 제한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 또한 지적해야 한다. 텍스트는 2008년 이후 갑작스레 학생/교수들이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데, 내 생각에 우리 세대를 휩쓴 자유주의의 전면화가 중앙대를 홀로 남겨둔 것이 아니라면 "기업가의 방문"에 맞서 이들이 보여준 무기력함과 순응 또한 나름의 역사적 맥락을 갖고 사고되어야 한다. 98년 이후 낭만적 공간으로서의 대학개념은 사실상 지속적으로 쇠퇴해갔으며, 그 자리를 자유주의적 개인들, 창문없는 단자들이 채웠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텍스트가 원용하는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은 사실 노부인 자체가 아니라 노부인의 '악마적 약속'에 휩싸이는 소도시 사람들의 취약한 내면을 드러낸다. 우리는 대학의 기업화와 함께, 그것에 그다지 인상적인 저항을 보여주지 못한, 그리고 그것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한 이들의 정신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선이야말로 뒤렌마트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한 독자의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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