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마루야마 마사오와 어소시에이션> 국역 읽고.

Comment 2014. 9. 3. 01:42

가라타니 고진의 <마루야마 마사오와 어소시에이션> 국역 링크를 보고 코멘트한다. 원문 주소는 아래와 같다.


http://sarantoya12.tistory.com/7


내가 가라타니와 마루야마의 작업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지는 새삼 덧붙이지 않겠다. 물론 큰 틀에서 가라타니가 형성해온 작업의 줄기를 벗어나지는 않는데, 몇 가지 세심한 시각은 눈여겨볼 만 하다. 순서대로 떠오르는 요점을 짚어보자.


 제일 눈에 띄는 점은 1절에서 <근대비판/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산업자본주의/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근대의 초극>과 같이 유사해보이는 범주들을 모두 세심하게 구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비평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유사한 것 사이에서 작지만 유의미한 차이를 보는 힘에 있는데,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섬세한 용어사용은--나는 한국에서 포스트모던을 다루는 저술들 중 이 정도로 범주들을 세밀하게 구별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확실히 그가 여전히 비평가적인 면모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구별로부터 가라타니 자신의 작업이 갖는 특수한 면 혹은 단독적인 면singularity이 나타난다고 말한다면 왜 이런 용어사용이 중요한지 이해가 될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의 구별로부터 미래의 상이한 가능성들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2절과 3절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라는 앞 시대의 거물 둘을 다루면서 이들이 갖는 의미를 재독해한다(마루야마는 제법 번역이 됐는데, 고바야시는 나는 선집 하나가 국역된 것만 읽어봤을 뿐이다...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비평의 가치를 인정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드문 걸까?). 물론 가라타니의 작업 자체가 부분적으로는 이 둘의 작업에 대한 대결의 면모가 아주 없지는 않았고--특히 마루야마를 의식하고 쓴 글은 <언어와 비극>에 수록된 글을 보라--이미 예전에 자신의 평가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60대 중반의 나이에서 자신의 평가를 수정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가라타니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비평적' 전통을 참조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현재성을 이끌어낸다. 이는 사실 앞 시대 비평전통에 대해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보고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2,3절에서 가라타니가 마루야마, 고바야시, 와츠지 등의 논의를 다시 끌어오면서 여기에서 어떤 이론적인 틀을 추출해냈다면, 4,5,6절에서 그는 자신이 이끌어온 틀에 따라 일본사회를 분석한다(아마 가라타니의 스타일 상 마루야마의 논의를 끌어오면서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수정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 죽은 비평가들의 논의는 (현재의 시점을 포괄한) 일본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현재성을 획득하며, 일본사회는 이론적인 분석을 가능케 하는, 그러나 서구 및 다른 조건의 사회와는 구별되는 대상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 비평가의 임무 중 하나가 대상으로부터 대상의 중요성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면, 가라타니는 자신의 임무를 분명히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이러한 '접점'을 이끌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분석을 도출해낸다(여기에서 근대 이전 사회까지 올라가는 '역사적' 구조화의 시선이 나타난다).




가끔 가다 다른 외국어권 문화연구자, 특히 아시아권 문학 전공자들과 이론 관련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다.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가, "그런 이론은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심지어 이러한 핑계를 들어 이론이 필요없다는 식의 태도가 나오기도 한다). 그 말 자체는 평범한 사실일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멈춰버린다면 그건 반지성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가라타니가 보여주는 태도를 참조한다면, 서구의 이론을 일본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 출발하든, 서구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변용하든) 그러한 접점으로부터 보다 보편적인 이론적 틀을 끌어내는 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적용=대화를 필사적으로 수행할 때, 그리고 그 어긋남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하는 사람만이 진실로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여러 위대한 비평가들이 기본적으로 이전의 사고와의 비판적인 대화를 치열하게 진행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러한 틀은 우리랑 맞지 않아"라는 코멘트만 반복하면서 자신이 '틀리지 않는' 것에 만족한다면, 도대체 그런 공부 뭐하러 돈과 시간, 노동력을 들여서 해야 하는 걸까--그냥 다른 일을 하면서 그 분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 번역된 글도 이제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배울 게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결국 배울만한 것에서는 배울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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