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거대한 사기극>. 독서노트. [1403]

Reading 2014. 3. 18. 12:20

*2014년 3월 페이스북.


이원석. <거대한 사기극: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 북바이북, 2013.



객관적인 진술에서부터 시작하자. <거대한 사기극>은 현재, 즉 2014년 3월 초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자기계발담론 관련서 중에 가장 종합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마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과다. 무엇보다도 저자 본인이 자신하듯 이 책은 확실히 성실한 공부의 결과물이다. 설령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우리의 사회에 유사한 의식구조가 침투했음을 읽어낸 노력 자체를 존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그리고 냉소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라는 병적 상태가 이토록 넓고 깊게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결과물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부분적으로 한국사회의 비판적 지성들의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른바 지식 엘리트들이 자기계발담론의 천박함과 허구성을 단번에 파악하고 무시해버렸다면, 그리하여 이것을 특별한 문제조차 될 수 없는 일상적인 사기 정도로 간주해왔다면, 어느새 자기폐쇄적인 발전의 강박은 사회 전반을 휩쓸고 한국의 취미, 교육/교양, 문화, 인간관과 인생목표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삶에 중요한 고지들을 점령해버렸다. 그 자체로는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지만--, 언뜻 보면 조금 더 열심히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치중립적인 테크닉 정도로 간주되는 논리가 사람들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주된 원리 중 하나가 되어가는 동안 이 현상에 대해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공을 들여 맞대응하는 정세분석 자체가 부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뼈 아픈 진실일 것이다. 방송에서 아이돌스타가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를 동료 아이돌에게 권하고, 한국의 '국민적' 스포츠스타가 <시크릿>을 최고의 책으로 꼽은지 몇 해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거대한 사기극>이 나왔다;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인용하며 시작하는 이 책의 서두는 참으로 적절한 맥락 위에 놓여있다.

<거대한 사기극>은 학술서와 대중서의 경계 위에 놓여있다(물론 나는 좀 더 학술적인 성격을 띤 대중서/좀 더 대중적인 성격을 띤 학술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책들을 선호하지만, 한국에서 학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을 가르는 경계선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보다 좀 더 후자에 가깝게 그려져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름대로의 학적인 맥락을 끌어오는 것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계발열풍을 하나의 담론으로 규정하고 담론분석의 형식에 따라 대상을 다룬다는 것, 즉 논의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책의 '전문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면, 대상의 개별적인 분석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수준에서 나열하며 진행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대중적'이다. 아마 나와 같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할 때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와 같은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는 데서 오는 어정쩡함이다. 가장 의심어린 시선으로 본다면 이러한 어정쩡함은 대중서로서 충분히 명쾌하지 못하다는 불만에 자신의 학적인 성격으로 대응하며, 다양한 사례들을 충분히 구조화하는지 의문이 든다는 질의에 대중독자들의 편의라는 방패를 가져와 숨는다. 물론 앞서 말했듯 대중독자와 학적인 사유의 거리가 무척이나 먼 한국의 상황에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는 모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두에 밝혔듯 다루는 범위의 폭넓음과 그럼에도 결코 어렵지 않게 읽힌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도가 결코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이 보다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가시지 않는다.

이 책의 최대의 강점은 누차 강조하듯이 폭넓은 시야와 박학함에 있다.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함에 있어 저자는 거의 매 지점에서 독자들이 연결시킬 수 있는 배경지식과 지적 맥락을 꺼내드는데, 그가 제공하는 맥락들은 대체로 그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생각할 거리를 준다. 독자들은 저자에 관해 상상하면서 <거대한 사기극>이 그의 전체 공부의 넓음에 비교해 볼 때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동시에 비판의 대상인 자기계발의 담론이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것, 다시 말해 책과 강연, 유행 등의 형태로 물질화된 것임은 (아마 이것이 저자의 방법적인 틀로서 '문화연구'가 가진 강점일텐데) 이 책이 무리하지 힘주지 않더라도 실천적인 성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은 베스트셀러와 저자,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유명인사, 가장 인기있는 학문, 그리고 언제나 공적인 문제였던 교육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것이 없다. 시장, 미디어, 교육기관, 대중정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에 특정한 형태의 병리적인 정신상태-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은 박학함을 자랑하는 책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지식 나열의 무의미함을 부분적으로 억제하면서 이 책에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을 부여한다.

아쉬움으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분명한 단점으로 생각되는 면도 있다. 이는 이 책의 학술적인 측면,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논의의 형식과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 <거대한 사기극>은 자기계발의 범람을 역사-담론-형식-주체라는 틀로 분석한다. 일견 이데올로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텍스트의 구조는 그러나 텍스트에 가까이 다가가 읽어본다면 다소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첫 장 "자기계발의 역사"를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로 특정한 베스트셀러/인물/현상을 언급한 뒤 그것이 어떤 의미와 맥락을 지녔는지 서술하는 방식의 반복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의 축적이 갖는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이 책이 어디까지나 본래 연재물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사례 제시-설명 및 논평의 반복된 구조는 이 텍스트에서 자기계발의 담론, 형식, 주체를 분석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각각의 분석들이 서로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요즘은 추상적인 것을 그 자체로 무익한 것으로 보는 그다지 지적이지 않은 태도가 유행이지만, 구조와 원리를 추상화해서 파악하는 능력(power of abstraction)을 강조한 맑스의 태도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나는 이 책의 분석에서 충분히 추상력이 작동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장 "자기계발의 담론"의 마지막 부분, "자기계발과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그랬어야 하는 대목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소 일반화된 비판적인 설명들을 진술하는 것에서 얼마나 더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특히나 미국-신자유주의와 같은 특정한 세계의 한계선 자체를 구성하는 개념들에 대한 진술은 때로 엄격하지 않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다(아마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사려깊게 살펴본 적이 있는 이들은 이 책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다소 초역사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거대한 사기극>을 읽으면서 자기계발과 긍정심리학의 논리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병리적이며,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애초에 인식불가능한 지점으로 밀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회복이 매우 어려운 지점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넓고 깊숙하게 사회 전반에 퍼졌는지를 알 수 있다(긍정적인 태도를 거의 강박적인 수준으로 강조하는 한국군의 사례가 다뤄지지 못한 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자기계발의 논리-태도가 어떤 것인지, 단순히 자기계발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본질적으로 자기계발의 논리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병적인 상태를 고발하는 책에 가깝다. 이에 관해서는 책이 출간된 직후 저자와 직접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앞으로의 저술이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 이어지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된 상태인데,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탤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의 논리에 대한 분석이 분명한 실체를 붙잡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자기계발의 논리 자체의 성격에 기인하는 면도 있다고 말이다. 만약 우리가 자기계발의 논리를 가장 조야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리주의적 태도의 구현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식과 사유의 범위 자체를 자기 자신의 내면과 감각으로만 한정시키는 자기폐쇄적 성격을 띤 자기-이해 방식임을 아울러 인정해야 한다(당연하게도 외부의 타자/객체/세계는 주체의 쾌와 이윤의 촉진만을 위해 활용되는 조작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된다). 조금 더 평범한 진술로 말한다면, 애초에 자기계발의 논리가 허용하는 세계-이해의 범위 자체가 극도로 좁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며 매우 좁은 세계에서 오직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만 허용되는 맹목으로 밀어넣는다. 자기계발의 논리가 가진 단순성과 실체없음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세계의 복잡한 부분을 모조리 인식의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자기계발의 논리가 갖는 진정한 위험은 그것이 단순히 무지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자폐적인/분열증적인(schizophrenic) 정신상태를 유발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계발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충만한 본질이 아닌 무언가를 부정하고 황폐화하는 효과로서만 서술해야하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지배라는 관점에서 자기계발의 정신을 설명한다면, "지배의 외주화" "자율적인 피지배"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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