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세미나 후 메모.

Reading 2014. 8. 19. 22:18

이전에 같은 텍스트, 특히 <영혼과 하피>를 두고 정리한 글 http://begray.tistory.com/101 과 같이 읽으면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 총괄 메모. 원래 페이스북에 간단한 소회를 적다가 조금 길어져서 옮긴다. 약간은 '공부하는 사람들'을 예상독자로 삼은 글이므로, 이리저리 함축하고 있는 전제들이 좀 있다. 이해 안 되는 대목이 있다면 리플로 알려주면 가능한 친절히 답변할게요.


<공포의 변증법>_Signs Taken for Wonders_ 세미나가 끝났다. 다음 권은 <세상의 이치>_The Way of the World_. 개인적으로는 이번 텍스트가 세 권 읽은 모레티 중에서는 제일 흥미로웠고, 사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남았다. 이런 저런 여건 상 3주에 걸쳐 매번 3시간 정도밖에 할애를 못했다. 그러나 각 권에서 다루는 주제나 모레티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J선배 말마따나 책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 주제라...욕심 같아서는 최소 한 5주 정도 잡으면서 불타게 토론했으면 좀 뽑아먹는 기분이 들었을 터. 뭐, 어차피 지금 공부가 끝인 것도 아니고, 이 텍스트 갖고는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또 세미나가 가능할 거라 믿는다. 맑스주의 비평/유물론/역사비평에 관심있는 사람들만 모아서 비판적 읽기 모임을 해도 괜찮을 정도. 다만 모레티가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논의들이 적지 않은 데다가 (못해도 여기서 루카치가 헤겔이나 교양소설 말하는 부분 이해하려면 적어도 루카치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아도르노나 바흐친처럼 모레티가 의식했음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웬만큼 문학사나 비평이론에 대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100% 씹어먹기는 매우 어렵다. 내 공부가 좀 더 넓고 깊게 되어있으면 그만큼 더 많은 것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텐데 아직 공부량이 많이 모자라다. 그래도 두 번째 읽으니까 확실히 처음 읽을 때 스쳐지나갔던 풍경에 비해 많은 것들이 보여서, 이 텍스트의 중요성을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그런 점에서 세미나에서 부족하게나마 읽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1) '객관적인 학문'으로서 문학연구를 정립하는 문제

2) 문학사, 특히 19-20세기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의(이건 지금 미국의 시점에서는 많이 낡아보이겠지만, 한국에서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앙금으로 남아있다...아니, 사실 외국에서도 해'결'이라기보다는 해'소'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3) '새로운 유물론'으로서 진화론적 모델의 논의

4) 미시적 차원의 해석틀과 거시적 차원의 해석틀 사이의 매개 문제

5) 특히 소설장르의 형식 문제

6) 장르 개념 정의: 소설novel, 비극, 모더니즘, 그리고 대중문화

7) 대중문화와 아방가르드, 그리고 유물론적 비평

8) 국가 혹은 사회--즉 지정학적 요소와 문학장르의 문제

9) 문학과 정치, 문학과 학문

10) 문학비평과 '수사학'

11) 맑스주의 문학비평, 또는 유물론적 문학연구의 쇄신

12) '어떤' 역사에 기대는가에 대한 논의


곁에 책을 두지 않은 채로라도 당장 이 정도 주제들을 죽 나열할 수 있다. 이 모든 질문들을 모레티가, 불과 30대 초반의 나이에 건드렸다. 그것도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새삼 그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논문 중의 상당 수는 20대에 쓴 거다) 괴물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벌써 30년 전 책이지만 지금도 낡지 않았고 곱씹을 게 매우 많다.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건데, 모레티가 얕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한국의 연구자들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이걸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보는 게 좀 더 정직한 판단인 듯 싶다. 이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기는 쉽지만, 이 사람이 제기하는 주장의 함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그 위에서 논쟁이 성립할 수 있도록 비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독서가 요구된다. 이론, 비평사, 문학텍스트 셋 모두 광범위하게 읽지 않으면 애초에 모레티가 무슨 함의를 두고 이야기를 하는지--분명 그는 자신의 주장을 꽤나 솔직하게 펼치지만, 아주 많은 것들을 우회적으로 다룬다--제대로 따라가기도 버거울 것이다.


국역본이 순서를 좀 개판으로 꼬아놓긴 했는데, 대략의 흐름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따로 코멘트를 했지만, 1장(국역본 11장) <영혼과 하피: 문학사의 목적과 방법에 관한 성찰> 및 11장(국역본 10장) <문학적 진화에 관하여>는 각각 열고 닫는 글로서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읽기를 요구한다. 서론은 방법론적 전제로서 정상과학으로서의 문학연구=문학사를 천명하면서 '취미판단의 헛소리'들과 헤겔적인 비평 양자를 비판하고 텍스트들을 미시적 차원에서 수사들로 분절한 뒤 거시적 차원에서 (전체사의 일부인) 문학(사회)사의 맥락에서 재구축하는 기획을 설정한다. 이때 모레티의 핵심개념으로서 장르 및 장르의 형식들은 미시레벨과 거시레벨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11장은 서두의 문제제기에 대한 일종의 가설적인 예시로서, 진화론적 논리, 특히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론을 빌어와 장르형식(거시) 및 장르 내의 장치들(미시)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을 한다. 이때 18-19-20세기 (교양)소설은 각각 장르의 변이형들이 증식했다 줄어들고 다시 증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2절이 거시레벨의 설명이면 3-4절에서는 (굴절적응의 논리를 들면서) 미시레벨 및 거시-미시를 연계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자체가 아주 진지한 층위의 논의라기보다는 한번 예시를 보여주는 편에 가깝다. 1장에서 내가 이런 논의를 제기했는데, 11장에서 하는 것처럼도 해 볼 수 있지 않겠냐, 이렇게 시범을 보이는 것처럼. 바꿔말하면 그만큼 진지하게 읽고 근본적인 전제로들까지 깊숙이 파고들어야 하는 글들이다.


근대 이전의 르네상스기 영국비극을 다루는 2장 <대일식>("The Great Eclipse")을 제외하면, 3장부터 10장까지 모레티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19-20세기 유럽,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감상'소설'Moving' literature을 다루는 6장(국역 5장) <유치원>("Kindergarten")을 제외한다면 거의 영국-프랑스-독일에 집중되어 있다. 3장(국역 1장) <공포의 변증법>("Dialect of Fear")과 5장(국역 4장) <단서들>("Clues")은 각각 영국의 괴물소설과 추리소설을 다루며 대중문화와 역사비평을 접합시키려는 시도에 속한다; 모레티에게 대중문화는 매우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단 그게 대중문화의 옹호자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매우 다르겠지만. 4장(국역 3장) <호모 팔피탄스>("Homo Palpitans")는 발자크의 소설과 '도시적 인성'urban personality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문학텍스트와 도시적 삶에 대한 스케치로는 나름 최상급에 속하는 편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이 텍스트에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발터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는 것일텐데, 사실 보들레르 자체가 스스로를 전형으로 생각한 작가가 아닐 뿐더러 벤야민도 도시적 삶에 대한 보들레르의 시선(보통 "산책자"flaneur로 유명한) 자체를 하나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인물로서--어떤 면에서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구현하여 자본주의적 삶의 악무한을 깨트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로서--간주하기 때문에 모레티의 겨냥은 번지수가 틀렸다(이 부분을 설명해준 발제자 J선배--위의 J선배와는 다르다--에게 감사를). 애초에 발자크의 산문과 도시를 연결한 뒤 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벤야민의 설명에 태클을 거는 것도 조금 안 맞고. 그러나 틀렸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벤야민 혹은 벤야민에게 걸려있는 특정한 관점 자체에 대한 모레티의 반감 혹은 비판의 맥락을 읽는 게 더 중요한데, (예컨대 모레티에게 중요한 게 타협, 일상, 연속성과 같은 계기라면 벤야민은 거의 그와 상극의 위치에서 단절, 폭파,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짧게 정리할 게 아니므로 후일을 기약하자. 누가 이 주제로, 곧 문학비평과 역사철학적 전망에 대한 세미나를 열자고 해도 응할 마음이 있다!


7장(국역 6장) <기나긴 이별: <율리시스>와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죽음>("The Long Goodbye: _Ulysses_ and the End of Liberal Capitalism") 및 8장(국역 7장) <<황무지>로부터 인공낙원으로>("From _The Waste Land_ to the Artificial Paradise")는 각각 두 명의 극단적인 하이-모더니스트 제임스 조이스와 T. S. 엘리엇의 대표적인 텍스트를 다룬다. 요점은 영국을 포함한 서구 세계의 전반적인 하강과 '세계의 의미상실'이라는 사태 앞에서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두 명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가 정 반대의 답변을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서 제시한다는 데 있다. <율리시스>는 텍스트의 형식을 통해 사멸하는 자유주의 영국의 사회를 극단적으로 체현한다. 조이스가 '신화' 혹은 사물의 질서를 사물 자체의 층위로 떨어트리는 아이러니를, 요컨대 "모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여준다면, 엘리엇은 신화 자체를 파편들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전체"(총체성과 맞닥트릴 때 우리는 항상 '어떤', '어떤 형식의' 총체성인지를 물어야 한다!)의 원리로 채택하여, 신화='질서'를 사물에 부과하려 노력한다. 조이스가 그 자체로 어떤 장르의 극단적인 결말을 보여준다면, 엘리엇으로부터 모레티는 신화 혹은 새로운 세계의 논리를 강조했을 때 그것이 원하는 바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모레티의 엘리엇 및 모더니스트 독해에는 암암리에 동시대에 대한 코멘트가 전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챕터를 이해하기 위해서 홉스봄, 특히 <제국의 시대>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를 권한다. 모레티는 이 둘을 인용하지 않거나 특히 후자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활용하지 않지만, 신화와 세계 사이의 문제가 어느 한 가지 선택으로 풀릴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아도르노의 <오디세이아> 독해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나는 <신음악의 철학>을 참고하면 좀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코멘트를 읽는 독자들 중 이 책을 대략이나마 이해하면서 따라갈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9장(국역 8장) <미결정의 마력>("The Spell of Indecision")은 이 두 챕터를 보충하는 글로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가 모더니스트들, 특히 조이스에게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좀 더 서술한다.


10장(국역본 9장) <진리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은 분량은 짧고 글 자체의 구성은 꽤나 기괴하지만 (1절 장르의 지정학, 2절 현대 비극의 장르론, 3절 좌파의 혁명의존에 대한 비판) 매 절 자체가 워낙 풍성한 논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레티 본인이 '왜 과학적인 태도를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단서를 직접적으로 제공하기에 숙독할 만하다; 다른 데서 말했듯이 사유는 인간적인 것이다. 맨 처음과 끝의 두 글을 제외하고는 가장 포커스가 넓다. 공간적 범위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선진부분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을 함께 다룰 뿐더러 다루는 문학적 형식 또한 소설(물론 모레티가 novel이라고 칭하는 것은 19세기 bildungsroman을 가리킨다), 현대 비극, 모더니즘이라는 독특한 배열을 제시한다. 희곡 전공자 J선배에 따르면 2절에서 모레티가 현대 비극을 짧게 간추리되 핵심을 짚어 설명하는 내공은 실로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관심 있는 사람은 꼼꼼히 읽어봐도 좋겠다. 모레티의 주종목(?)은 소설과 이론이라는 게 조금 아이러니컬하겠지만.



여튼 논문모음집이라고는 해도,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나름의 서사와 문제의식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퍼즐조각 맞추듯 재구성해서 이해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나름대로 분명한 서사가 있는 책이므로, 문학에 취미 이상의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는 읽기를 권한다.




2. <문학적 진화에 관하여>에 대한 메모. 1보다 먼저 쓴 내용이므로 중복되는 게 조금 있다.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아무리 생각해도 역제가 너무 짜증난다... Signs Taken for Wonders 가 물론 번역하기 쉬운 제목은 아니지만...)을 세미나 준비 때문에 두 번째로 읽었다. 역시 책은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 한다. 처음에 보이지 않던 단서들, 스쳐지나간 사고의 흔적들이 눈에 밟히고, 그것들을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넓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최초에는 눈에 한 페이지만, 심하면 한 문단조차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그때 그때의 단어와 문장들의 현전에 압도당한다면, 한번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어디에 강세를 부여하고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조금 어렴풋하게나마 파악이 된 후 읽을 때 비로소 '논리'가, 더 나아가서는 특정한 정념이나 (푸코적인 뉘앙스에서) 담론이 시야에 들어온다.


국역본에서 각각 10장, 11장을 차지하고 있는 두 편의 글, <문학적 진화에 관하여>("On Literary Evolution")와 <영혼과 하피>("The Soul and the Harpy")는 본편의 배치에 따라 읽는 게 좋다. 즉 원본에서 '여는 글'이었던 <영혼과 하피>를 먼저 보고 마찬가지로 맨 마지막의 '닫는 글'이었던 <문학적 진화에 관하여>를 보는 편이 좋다. 전자가 일종의 문제제기, 프로그램의 표명이었다면, 후자는 자신이 던졌던 문제제기에 답변하기 위한 이론적인 고찰을 가장 투명하고, 대담하고, 조금은 서툴게 수행한다. 다른 데서 한번 정리했지만(블로그 참조), <영혼과 하피>에서 모레티는 문학의 '정상과학' 혹은 (취향의 난립이 아닌 보편성을 담보한 학문으로서의) 문학연구를 주창하면서 미시적 차원의 '수사학'과 거시적 차원의 문학사회학/'역사학'(말할 것도 없이 아날을 염두에 둔)의 연결을 제시한다. <문학적 진화에 관하여>에서, 모레티는 다윈주의의 틀, 보다 구체적으로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u Gould의 논리를 참고하면서 문학사를 기술하기 위한 참조점으로 진화론적 논리, "우연과 필연"이라는 두 모티프로 해명할 수 있는 문학사의 논리를 제출한다. 즉 거시적 차원에서 장르 및 문학적 형식들의 역사를 생물 변이형들의 진화/적응/도태와 같은 논리로, 미시적 차원, 곧 '수사학'에서는 개별 텍스트/장르 내의 문학적 장치들의 변이와 진행을 유사한 논리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레티는 후자를 해명하면서 훨씬 더 비평적 곡예를 펼치는데, 뒤집어 말한다면 그만큼 후자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시적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장르 내의 장치/모티프들' 자체도 절대로 '미시적'이지 않기도 하고. 어쨌거나 나는 <문학적 진화>는 한 편의 흥미로운 스케치이자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시도라는 건 높이 살 수 있으며, 이중에서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을 모레티가 계속 가져가는지는 이후에도 주목해서 봐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근대의 서사시>를 참고할 때 거시적 차원, 곧 장르의 역사 자체에서 진화론적 논의를 차용한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 활용된 것 같다. 모레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자신에게 필요한 논의들을 매우 폭넓게--그처럼 폭넓게 이론적 논리들을 참조하고 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비평가는 달리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활용하며, 뭔가 이상하면 언제든 버렸다 새로 필요가 생기면 바로 주워서 써먹는 게 가능한 '실용적인 태도'에 있다. 얼마든지 서툴고 부족한 글을 쓸 수 있고, 나중에 고쳐서 재활용하거나 과거 자기가 제출한 이야기를 바로 제끼고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도 사실 오늘날과 같은 '혼란기'에서는 배울만한 태도다.


더불어, 이 책에서 <진리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나 <유치원>("Kindergarten")처럼 모레티 자신의 정서/태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곧 자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글도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론을 물신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를 보듯이, 이론/연구를 읽으면서 그것을 제창한 인물의 삶과 내면을 더듬을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모든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철학도, 이론도, 어떠한 사유도 인간의 산물이다. 이걸 잊지 않는 게 모든 인문학적 읽기의 기초라고 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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